주일말씀
마태복음 14 강
믿음대로 되라
말씀: 마태복음 8:1-13
요절: 마태복음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히브리서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 때문에 감동을 받으시거나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가 믿음이 있을 때에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적으로 믿음을 갖기 쉽지 않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나병환자였고 또 한 사람은 로마의 백부장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이 들고 나온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한 사람은 나병이었고 한 사람은 하인의 중풍병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들도 이들의 믿음을 배워서 주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산에서 산상보훈 말씀을 마치시고 산 밑으로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이때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뒤를 좇았습니다. 마침 이때에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고 얼굴이 흉칙하게 일그러지는 병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피부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서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고 노력을 합니까? 특히 자매님들은 다른 것은 아껴도 화장품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광고 카피에서 “여자는 피부다”라는 문구를 봤습니다. 문법이 전혀 안 맞는 문장인데 대단한 광고효과가 있습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회사에 면접 보러 갈 때 몇 달 전부터 얼굴 마사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피부가 썩어서 냄새가 나고 문들어져 갈 때 얼마나 절망이 되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나병은 자기도 모르게 3년, 자신이 알고 3년, 남이 알고 3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균의 잠복기간이 길기 때문에 나병에 걸렸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고 수 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사람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한 많은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율법에서도 나병은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슬픈 운명을 마칠 수 밖에 없습니다(레13:44).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런 인생의 슬픔과 고통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과감하게 일어나서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자신을 깨끗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나병환자가 깨끗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병이 더 진전이 되지 않고 이 정도로 그쳐서 생명이라도 보존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하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게라도 해 주세요” 이렇게 사정사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간구가 어떠합니까? “주여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놀랍게 자신의 나병이 완벽하게 나아서 깨끗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창조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이 사람은 나병으로 인해서 육신은 망가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내면의 믿음은 보통사람보다 훨씬 더 강하고 긍정적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은 멀정해도 그 내면이 망가지고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한 없이 운명적이고 입만 벌이면 원망과 불평의 쓴 물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나병에 걸렸단 말인가?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나님은 나를 버렸어. 그러므로 나도 하나님을 버리고 저주하며 살거야” 하면서 평생 미움과 저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얼마나 영적인 말입니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로 믿었습니다. ‘The Lord’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님은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이 나병 정도야 얼마든지 능히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때문에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나병환자인 주제에 어떻게 여길 나왔어?” 이런저런 비난 섞인 말들이 오고 갈 것을 게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와서 주의 능력으로 치료함 받기 원하지만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 때문에 나아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람과 같이 오직 주님께만 눈을 고정시키고 주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나아올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 주셨습니까? 다같이 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의 흉한 손을 터치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행동입니다. 보통 사람은 나병환자와 마주보기도 꺼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터치하시고, 만져 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피고름 나는 나병환자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받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부정한 사람을 영접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배척하였습니다.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부정하다고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을 받아 주셨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를 보통 사람과 똑같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믿음이 없는 세상에 믿음을 가지고 나아온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 주십니다. 당시에는 나병환자를 만지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부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시는 것까지 감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람에게는 깨끗함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는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내가 원하노니” 아! 이 얼마나 감사한 말입니까? 세상에 누구도 자신을 원치 않았는데, 친구들도, 심지어는 가족들도, 자신을 원치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노니” 이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는 이 병자의 한과 슬픔을 일시에 녹여주는 놀라운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깨끗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깨끗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깨끗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의 깨끗함을 우리 인생들에게 불어넣어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잃어버리고 더럽고 지저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깨끗함을 선물해 주시기 원하십니다. 병든 자에게 건강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연약한 자에게 강건함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몸이 아파본 사람들은 건강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도 몸이 아픈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대전에 이 여호수아 목자님도 담낭염으로 입원하셔서 고생하셨는데 우리 목자님들의 기도로 한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저도 지난 주에 복통이 나서 한 이틀 동안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쉬고 약을 먹고 닝겔을 맞아도 깨끗이 낫지를 않았습니다. 저는 방바닥을 뒹글다가 문득 한 말씀이 마음에 부딪혀 왔습니다. 시편 104:14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 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나는 정말 진토와 같고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의 체질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구나. 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강건케 하실 수 있습니다. 저의 체력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리고 찬송가 528장을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주여 나의 병든 몸을 지금 고쳐 주소서 모든 병을 고쳐 주마 주 약속 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 주소서” 제가 이처럼 말씀을 붙들고 찬송하며 기도할 때에 마음에 위로가 되고 기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도 이런 저런 질병으로 인해 고통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우리의 병을 치료하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즉시 나병이 떠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나병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인생을 누가 회복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몹쓸 나균이 침투하여 그 삶을 망가뜨린 인생을 누가 감히 원상 복귀시켜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의 음성은 나병환자의 육체와 영혼을 깨끗이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찬양합니다.
나병은 보통 죄와 닮았다고 말합니다. 나병이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망가뜨리듯이 죄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형상을 파괴시킵니다. 나병이 사람을 추하고 더럽게 하듯이 죄도 사람을 추하고 더럽고 냄새나는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나병이 감각을 마비시키듯이 죄도 사람들의 양심을 마비시켜 나중에는 죄가 죄인지도 모르게 합니다. 사단은 요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더럽고 추한 죄의 나균들을 침투시켜서 이 사회를 점점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온통 음란하고 추한 문화들을 퍼뜨려서 그 영혼들을 파괴시키고 더럽히고 있습니다. 가정을 파괴시키고 청소년들의 정신 세계를 파괴시켜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란물들을 너무 많이 봐서 머릿속에 온통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이것들을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가 않는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아예 뇌를 꺼내서 깨끗이 씻은 다음에 다시 넣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그 사람의 어떤 추하고 더러운 죄의 자국들도 다 지우고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찬송가 190장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잠그게 될 때에 깨끗케 될 줄을 믿습니다. 에베소서 4:23, 24절에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될 때에 심령이 새롭게 되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에서 이런 놀라운 역사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중풍병은 신경이 마비되는 병으로 자신의 몸을 자기 마음대로 가눌 수 없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병입니다. 사람이 일어나고 싶을 때에 일어나고, 눕고 싶을 때 눕고, 걷고 싶을 때에 스스로 걷고 뛰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중풍병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밥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돈 많은 부자집 아들도 아니고, 백부장의 하인입니다. 하인은 주인을 위해서 등골 빠지게 일해야 겨우 하루 세끼 밥 얻어 먹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중풍병 때문에 그 몸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얼마나 주인에게 미안하고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고맙게도 그의 주인인 백부장이 그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나아와서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백부장의 기도였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Lord)여’ ‘Κύρίε’라고 불렀습니다. 사실 당시 로마군인들에게는 오직 로마황제만이 그들이 믿고 숭배하는 유일한 주(Lord)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주여’라고 물렀습니다. 아마도 그는 여러 가지 소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것 같습니다. 앞에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이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이요, 지배국가의 군인이었습니다. 또 지금 아픈 사람은 자기 아들도 아니고, 일개 하인에 불과했습니다.
당시에 하인은 말하는 짐승 정도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하인의 아픔을 외면치 않고 자신이 직접 그 문제를 예수님께 들고 나아 왔습니다. 그는 참으로 사랑이 풍성한 훌륭한 군인이었습니다. 대개 보면 그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백부장의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를 따라가서 하인을 고쳐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그런데 이때 백부장이 반응이 어떠합니까? 다같이 8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백부장은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로마의 백부장 정도 되면 얼마든지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보면 오히려 아랫사람을 시켜서 예수님을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자신이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을 때에 예수님은 도저히 자신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존귀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다만 말씀만 해 주셔도 감지덕지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정도면 얼마든지 자신의 하인이 나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평소에 말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가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군대에서는 그 사람의 직위에 따라 말의 권세가 달라집니다. 높은 사람의 말 한마디는 아랫사람에게는 절대적입니다. 실제로 군대에서는 사단장의 말 한마디면 직속부관에서부터 시작해서 저 아래 이등병까지 즉시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상관의 명령이면 이유를 불문하고 “직격하라”면 직격하고 “후퇴하라”면 후퇴해야 합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모든 일들이 즉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백부장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예수님의 수하에 있음을 믿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온 우주가 예수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보이는 세계든, 보이지 않는 세계든, 질병이든, 귀신이든, 그 어떤 세력도 즉시 다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즉 백부장은 예수님을 우주의 총사령관으로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공간을 뛰어 넘어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말씀만 하옵소서” “여기서 말씀만 하시면 저 집에 있는 우리 하인의 몸속에 있는 중풍병이 떠나서 나을 것입니다.” 와!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깜짝 놀라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such great faith!
예수님은 이 사람이 백부장인 것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복장이나, 그가 타고 온 백마 때문에 놀라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믿음에 놀라셨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능력을 믿는 그 순수한 믿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도 완악하여서 예수님을 잘 믿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잘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 잡을 것이 없는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인 백부장이 이처럼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은 것에 탄복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 그러자 그 시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주님은 우리를 축복하시되 우리의 믿음대로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50% 믿으면 하나님께 50%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100% 믿으면 100%의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먼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스펄전(C. H. Spurgeon) 목사님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삼손의 머리카락과 같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길었을 때는 능력이 출중했지만 머리카락이 잘리면서 능력이 사라져 비참한 죄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으면 큰 능력을 체험할수 있지만 믿음이 바닥나면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가복음 9:22절에 보면 귀신 들린 아이를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반신반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 주실 수 있으면 고맙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이 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믿음에는 불가능이 없느니라” “네가 믿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 그 아이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그 아버지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비로소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몇 년 했느냐? 직분이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오직 믿음만 보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믿음대로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창조의 권능은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천지창조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시라면 얼마든지 나병환자도 고치실 수 있고 중풍병자도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실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도 살려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있으라” 했을 때에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뭍이 드러나라” 하셨을 때에 뭍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믿고 의지하면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임이삭 목자님은 모슬렘권 키르키스탄에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셨습니다. 마가복음 11:22절 “하나님을 믿으라”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셨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대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쉬 공대가 단과대학인줄 알았는데 만 오천명을 수용하는 종합대학이라고 합니다. 한국어 교실은 본관 1층으로 가장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요지에 있다고 합니다. 올해는 12명의 한국어과 학생들이 배정되었습니다. 실은 작년에 개설하려고 학생까지 뽑았는데 교수가 없어서 수업을 시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9월에 정식으로 학기가 시작되게 됩니다. 김갈렙 선교사님 집에서는 벌써 4명의 자매님들이 장막생활을 하며 제자 후보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실 때에 친히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또 지난 주에 인도네시아에 Grace Kim 선교사님에게 메일을 받았습니다. 이분은 제가 이전 센타에 있을 때에 도운 분인데 뇌에 종양이 있어서 저희들이 근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뇌종양이 1/3로 줄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분은 뇌의 예민한 자리에 종양이 있어서 수술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요한복음 11: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종양을 점점 줄어들게 하심을 보고 우리도 놀라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는 불칼과도 같아서 역동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붙들기만 하면 됩니다. 백부장은 말했습니다. “단지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우리도 오직 말씀만을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 다른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수없이 많이 공부합니다. 또 가르칩니다. 그러나 말씀을 단지 기록된 문자로만 생각하면 아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지금도 온 우주를 움직이고 계시는 생명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우리 안에 놀라운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만이 아니라 양들의 마음가운데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태평양을 건너 시베리아를 넘어서도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해외에 계신 선교사님들과 핸드폰으로 통화할 때에 참으로 신기합니다. 전기선도 없는데 어떻게 무선으로 그렇게 선명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합니다. 인간의 기술로도 이렇게 음성을 멀리 보낼 수 있을진대 창조주 하나님께서 어찌 말씀의 권세를 멀리 보내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음으로 이번 여름수양회에 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