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08마태복음 제19강
뱀같은 지혜, 비둘기같은 순결
◇ 말씀 : 마태복음 10:16-11:1
◇ 요절 : 마태복음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사,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은 세상을 안타까이 여기셨습니다. 이에 목자없는 양무리들의 목자요 추수할 일군을 세우기 위해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사 권능을 주시고 전도 훈련을 내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그들이 가서 전파해야 할 메시지와 사명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도 예수님께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겪게될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러한 일을 당할 때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시련 뒤에는 진정한 구원과 승리의 영광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Ⅰ.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6-23)
먼저 16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 아직 어린 12사도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심정이 어떠하십니까?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세상은 복음을 대적하는 악한 영과 사상이 가득찬 곳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인본주의와 세속주의, 쾌락과 물질주의, 그리고 상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우리의 복음과 빛과 사상을 싫어하고 비웃으며 배척합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실 때 마치 양을 이리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십니다. 양을 이리가운데 보내면 어떻게 됩니까? 양은 이리의 공격 앞에서 자기를 방어할 무기가 없습니다. 양은 이리의 날카로운 발톱과 사나운 이빨에 할퀴고 찢겨 치명적인 상처를 받거나 피를 흘리며 잡혀 먹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면서도 왜 사랑하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3: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죄악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사랑하는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리가 득시글거리는 험한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사역을 감당하기를 원했습니다. 가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를 위해 세상에 나아갈 때 고난과 핍박이 있고 박해가 있을 것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에 이리가 가득하고 위험하다고 해서 제자들을 품에 안고만 있으면 그들은 온실 속의 화초가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거친 광야의 눈보라와 폭풍우도 견뎌내고 이기는 굳세고 강한 제자들로 성장하기를 소망하십니다. 로마서 8장 17b,18절에서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소망가운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영적 방향을 주셨습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우리는 이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아가서 이리에게 할퀴거나 물리지 않기 위해서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합니다. 이리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잘 감지하여 재빨리 피하고 달아나야 합니다. 이리가 이리저리 교묘히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멍한 눈으로 졸거나, 이리가 다가오는데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보며 한 눈 팔거나, 먹거리를 찾아 식탐의 즐거움에 빠지거나, 세상 쾌락과 안목의 정욕을 즐기고 있다가는 이리에게 잡혀먹기 십상입니다.
뱀의 지혜란 어떤 것입니까? 지혜란 통찰력이요 본질을 꿰뚫어 보는 힘입니다. 뱀이 그렇습니다. 뱀은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순발력이 뛰어납니다. 뱀은 위험을 감지하면 스르륵 순식간에 피하고 먹이를 보면 재빨리 물어 독을 내고 먹이를 칭칭 동여 감습니다. 뱀에게는 날카로운 뿔이나 발톱이 없어 오직 물고 늘어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뱀은 징그럽고 교활한 동물이고 사탄을 상징하여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늑대나 여우들이 많은 세상에서 복음역사를 감당하려면 이런 뱀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위기와 기회를 잘 포착하는 순발력과 한번 기회를 잡으면 절대 놓치않는 끈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면 비둘기의 순결은 어떤 것입니까? 비둘기는 생긴 것도 평화스럽고 순결합니다. 짝을 잃으면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고 슬피 울며 순결을 지킵니다. 또한 분면깃[粉綿羽]이란 깃털이 있어서 불결한 곳에 들어가도 때묻지 않고 깨끗함을 지키는 힘이 있습니다. 비둘기는 늘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항상 질서있게 행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후에는 귀소성(歸巢性)이 강해 딴 곳에 가지않고 항상 자신이 거하는 처소로 돌아옵니다. 비둘기는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는 순결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에도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런 비둘기처럼 세상에서 신앙의 순결을 지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순결은 신자의 생명입니다.
제자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순결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제자가 신앙의 절조와 순결을 상실하면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순결함에서 오는 거룩한 기쁨과 능력을 상실하여 제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순결을 지키는 것은 제자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시절에도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며 채식만 고집하여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단1:8). 식민지 백성이 왕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요 순종하는 것은 비둘기의 순결을 잃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다니엘은 신앙의 순결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뜻을 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다니엘은 신앙의 순결을 지키면서 이리의 사나운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부르짖어 기도할 때 지혜를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
17a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을 삼가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방향을 주신 후 제일 먼저 사람들을 삼가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서 겪어야 하는 상처와 피 흘림, 아픔과 고난, 핍박과 박해는 사실상 사람들로부터 옵니다.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고 도덕과 윤리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신뢰하고 의지할만한 대상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순수하고 믿음직스럽지만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없습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진정으로 조심해야 할 대상은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을 밥으로 생각하고 이용해 먹고 괴롭힙니다. 사람들에게는 이리보다도 더 날카로운 발톱과 무서운 이빨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무슨 악한 짓을 합니까? 17b,18a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과 임금 앞에 끌려가리니…” 사람들은 제자들을 정죄하고 고소하여 공회에 넘겨주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일을 당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 때문에 때로는 선배나 교수님 앞에 또는 직장 상사들 앞에서 욕을 얻어먹거나 자존심 상하고 무시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18b 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제자들은 이러한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때 나의 인생은 이제 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빠지기 쉽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데 나의 삶에는 왜 이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가하는 회의와 불신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 섰을 때 오히려 복음전도의 기회라 여겼습니다.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오히려 벨릭스가 두려워했다(행24:2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제자들은 이런 위험에 처할 때를 대비하여 어떻게 할까 염려치 말아야 합니다. 염려하는 대신에 성령의 지혜를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겸손히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께서 무슨 말할 것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혀와 입술을 주장하셔서 가장 지혜롭고 합당한 말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이리의 발톱과 이빨을 피해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공회에 넘겨지고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일뿐만 아니라 장차 무슨 일까지 당하게 됩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우리는 한 핏줄을 가진 혈육끼리 어찌 그리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둠이 빛을 거스르는 것이며 악령이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은 나중까지 견디라고 하십니다.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서라도 신앙의 순결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약속하십니다. 나중까지 견딘다는 것은 끝까지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와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마라톤 경주와 같습니다. 마라톤을 하면 도중에 여러 번 숨막히는 고비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후들거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수들이 과감히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합니다. 처음에 아무리 잘 달렸어도 42.195km를 완주할 때까지 인내하는 사람만이 승리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42km 지점까지 아무리 잘 뛰었다 할지라도 마지막 0.195km를 남겨놓고 인내하지 못하면 면류관을 쓸 수 없습니다.
신앙의 경주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의 길을 달릴 때 처음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많은 아픔과 고난들이 닥쳐올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미움받는 것도 괴로운데 사랑하는 가족에게서까지 아니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되면 정말 낙심이 밀려들고 신앙의 경주를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인내하라고 하십니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격려하시며 최후의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함으로 위대한 구원과 승리를 얻은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하며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12장 1b절에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선생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약1:4a)고 권면하였습니다.
Ⅱ. 두려워하지 말라 (24-33)
24,25절을 보십시오. “제자가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같고 종이 그 상전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제자들은 박해가 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데 왜 이런 박해가 오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너무 지나치게 열심을 내서 신앙생활을 하니까 이런 고생을 사서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은 스승이시오 상전이신 예수님께서도 바알세불이라 비난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셨으니 그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러한 비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희를 두려워하는 대신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6) 복음의 진리가 비록 현재는 배척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것이 참된 구원의 진리라는 것이 반드시 드러나고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진리를 광명한데서 당당하게 말하며 높은 곳에서 담대히 전파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27)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복음을 전파거나 믿음의 중심을 지킬 때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까? 죽음의 위험에까지 직면할 수 있습니다. 순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름없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어떤 위험에 직면하였는가를 말하여 줍니다.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11:36-38) 다니엘의 세 친구는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므로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져져 큰 시련을 당했고, 요한의 수제자 폴리캅은 예수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86세 때 화형을 당했습니다.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도 믿음을 지키다 순교당했습니다. 이처럼 핍박자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고난과 희생, 순교의 죽음을 각오하며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따르는 일입니다. 현재 나 자신의 믿음을 돌아다보면 다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난해 출간된 임병진의 『천국의 섬』은 주민 90%가 예수님을 믿는 전남 신안군 증도와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 그러니까 9․28 서울 수복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증도 증동리 앞 백사장에서 48명의 교인들이 공산당에 의해 한 자리에서 처형당한 것입니다. '이제라도 부인하면 당장 살려주겠다.' 그러나 어린아이 하나도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48명이 그 자리에서 생매장 당하고 각목에 맞아 숨지거나 죽창에 찔려죽었습니다. 이 책은 그 날의 참상을 증언하며 순교의 현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날 밤, 예수를 믿는다는 죄로 순교당한 사람들은 모두 48명이었다. 그 중 13명이 이판일 장로와 이판성 집사의 가족들이었는데 순교당한 가족 중에는 78세 되신 이판일 장로의 어머니도 계셨고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 이완순도 있었다. 어둠이 깊게 드리운 새벽, 늙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어린 손녀를 앞세워 죽으러가는 그 고난의 길이 어떤 길이었을 지는 도대체 어림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걸어가신 주님의 길이 바로 그 길이었을까?”(258쪽)
우리나라 섬 복음화율은 5%로 섬사람들은 토속신앙이 깊이 뿌리박혀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증도는 마을사람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이 된 곳입니다. 그 이유는 증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의 피'가 흐르고 ‘순교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증도를 비롯한 인근 섬 전체가 신앙공동체가 되어 '사도행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어 최근에 뜨는 천국의 섬, 증도가 된 것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위험과 시련 앞에서도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29-31절을 보십시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참새는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는 어떤 존재입니까?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될 만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의 대상입니다. 많은 참새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특별하신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이나 핍박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왜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시인해야 합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설령 우리가 이 땅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적당히 머리 굴려 편하게 잘 살았다 할지라도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나는 너를 모른다, 너는 믿음의 중심을 지키지 못했으니 저리로 가라.” 말씀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잠깐이요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생명이 코에 붙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합니다.
Ⅲ.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4-11:1)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떤 오해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전쟁이 없는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곳에는 갈등과 투쟁이 없어야하고 전쟁도 없고 평화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검을 주러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5,36절을 보십시오.“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며 능력을 발휘하면 부모 형제로부터 미움이나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정받고 칭찬받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자하면 미움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나 부모에게 미움을 받고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미움을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교회다니고 예수믿는다고 슬리퍼로 머리를 얻어맞고 물벼락을 맞기도 하고 호적에서 네 이름을 파가라고 합니다.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가정에 평화가 깨지고 불화가 일어나고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내 안에 오신 그리스도를 몰아내고 나를 다시 자신의 종으로 삼고자하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일어날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힘들 때면 내가 이렇게 미움을 받으면서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하는 회의와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아픔을 피하기 위하여 타협하고 싶어집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어떤 자가 예수님께 합당치 아니합니까?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성경은 물론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비나 어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싫어서 주님께 대한 지조를 꺾고 아비나 어미의 요구에 따르고 타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39절을 보십시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 세상은 인본주의와 물질과 쾌락적 가치관, 세속주의와 성공주의 가치관이 팽배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고자 할 때, 장차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까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얻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포기할 때 어떻게 됩니까? 그는 제자의 삶을 포기한 대가로 세상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아 좀 더 안정된 자리를 얻고 삶에 좀 더 여유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잃을 것입니다. 무엇을 잃을 것입니까? 그는 예수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을 잃는 것은 천국을 잃는 것이며, 영생을 잃는 것이며,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잃는 것입니다. 그는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얻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그들은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얻을 것입니다. 천국을 얻고 영생을 얻게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기업을 얻게됩니다. 그는 천하보다 소중한 영혼을 얻게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결론적으로,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한 자가 되어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오로지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일입니다. 우리가 찌는듯한 무더위 속에서도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충만히 덧입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며 열매맺는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