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 강

                                                 상한 갈대를 향한 소망  

말씀: 마태복음 12:1-21

요절: 마태복음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어떤 사람을 바라 볼 때에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는가?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는가? 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자꾸 그 사람의 문젯점만 지적하고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주눅이 들어서 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좀 부족해도 자비의 눈,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꾸 encourage 해 주면 그 사람이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올림픽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유능한 감독들은 절대로 선수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수해도 야단치지 않고 위로하고 용기를 심어주고 격려해 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똑같은 사람을 놓고도, 정죄의 눈으로 바라보는 바리새인과 소망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예수님이 대조가 되어 나옵니다.


 문제의 발단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복음역사를 섬기느라 항상 배가 고팠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이 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그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삼았습니다.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왜 안식일에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밀을 타작하고 맷돌질을 하고 풍로 질을 하는 노동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만약에 자기 자녀들이 배가 고파서 그렇게 했다면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았을까요? 아마도 배고파서 보채는 자녀들을 위해서 자기들이 밀이삭을 잘라서 부벼서 정성껏 아이들의 입에 넣어 주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자꾸 밉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사랑이 있으면 다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실수를 해도 귀엽게 보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다 불만스럽습니다. 하는 짓이 다 밉게 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과 미움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제자들도 밉게 보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윗을 예로 들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21장에 보면 다윗과 그 충신들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심히 배가 고프게 되었습니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갔는데 그 곳에는 진설병을 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진설병은 제사장 이외에는 먹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 떡을 다윗과 그 일행에게 주었습니다. 원래 주면 안 되죠. 그러나 다윗이 불의한 사울에게 쫓기고 있기 때문에, 또 배고파 쓰러지면 안되기 때문에 준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하나님의 제사장은 사랑이 있었기 율법에 대해서 유연성있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제사장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 드리기 위해서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합니다. 양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피를 뿌리고 고기를 태우느라고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고통하는 백성들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열심히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문제 많은 사람들을 심방 다니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이시오, 구속역사를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성전 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오실 참 성전 예수님의 모형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자꾸 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을 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안식일 법을 철저히 지키는 훌륭한 사람 같아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모르는 가장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율법제도가 자비의 마음입니다. 만약에 아히멜렉 제사장이 자비심이 없이 율법만 고수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당신들에게 떡을 줄 수 없습니다. 굶어죽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법은 법이니까요”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자비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흠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에게 조금의 예외도 허용치 않으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출애굽기 34:6,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몇 대까지 베푸신다구요? 천대까지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우신 분, 그리고 신약의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하나님은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범죄 했어도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경고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그들이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끌어 모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느1:9).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얼마나 허물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잘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도 죄 때문에 하나님을 크게 실망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회개했을 때에 자비를 베푸사 더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하나님을 그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36:7-9)”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에도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내려와 주의 자비가 봄비 같이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나를 덮네 헤이 호 주의 자비하심과 헤이 호 주의 은혜로 헤이 호 나는 영원히 춤추리” 와! 우리가 어떻게 감히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출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생각하면 춤은 둘째 치고 고개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노래하고 춤추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찬송가를 불러 보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엄마한테 야단맞고도 금방 또 그 품에 뛰어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의 자비와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이사야 49:15, 16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라고 했습니다. 긍휼, 자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레헴’이라고 하는데 이 ‘레헴’이라는 단어는 ‘어미의 모태, 자궁’이라는 뜻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모태에 품고 있을 때에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식은 자신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비요, 긍휼입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자신을 배반하고 목에 칼을 겨누는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도 그가 자식이기 때문에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요, 긍휼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자기 것만 챙겨서 소돔으로 가버렸을 때에 괘씸했을 것입니다. 소돔에 가서도 롯은 한 번도 아브라함에게 전화를 하거나 메일 한 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롯이 그돌라오멜 군대에게 사로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만약에 아브라함이 율법적인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거 보라고, 하나님은 정확하시다고, 저 놈이 나를 배반하더니 그대로 당한다고. 싸다 싸. 하나님 감사합니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병사들을 데리고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워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해 내었습니다. 또 소돔이 유황심판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소돔 땅에 의인 100명이 있으면 그래도 멸하시겠습니까?” “50명 있으면요” “20명 있으면요” “10명 있으면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아들 달라고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얌체 같은 조카를 위해서 왜 그렇게 기도하고 도와주는 것입니까? 자비심 때문입니다. 행위로 보면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옛날에 한 짓거리로 보면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기도 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영혼 자체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심입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자비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바꾸어 말하면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가 어떤 것인가 한 사건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또다시 예수님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물었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때 예수님은 기계적인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다같이 11,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만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양은 그 사람에게는 전 재산이나 다름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지금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내일까지 기다려야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입니다. 두 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이 소중하기 때문에 만사제쳐두고 양을 꺼낼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양보다 얼마나 귀합니까?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은 안식일 날 소극적으로 일 안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서 안식이 없는 그 사람에 안식을 베풀어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한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을 내밀라” 그가 내밀매 그 손이 깨끗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사랑 없이 말라버린 바리새인들의 심령에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심은 그 심령에 흘러넘쳐서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꼬투리 삼고자 지켜보고 있어도 게으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을 제압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곤경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어떤 오해를 받고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심지어는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율법의 본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귀히 여기는 것”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것” “병든 영혼을 치료하여서 그 인생에 참 안식을 베푸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댓가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난 주 말씀 마태복음 11:28절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바리새인들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잘못해서 생긴 짐은 철저히 자기가 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죄의 댓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업보이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지라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잘못은 우리가 하지만 그 댓가는 예수님이 대신 지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 어깨로 넘겨라. 그러면 내가 대신 져 주리라”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비, 사랑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어제 TV 뉴스를 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낮에 한 남자가 어떤 사람을 뒤쫓아가서 칼로 찔러 죽여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 처럼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 장면이 CCTV 폐쇄회로 화면에 찍혀서 그대로 방영이 되었습니다. 정말 소름이 끼쳤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법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법을 세분화해서 연구하는 사람, 법을 정확하게 집행하는 관료 엘리트들은 넘쳐 납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자비의 마음이 식어가는 것입니다. 원칙을 따지기 보다 긍휼을 마음을 가진 사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기 보다 그 짐을 내가 대신 져 주고자 하는 사람, 그의 인생의 짐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덜어주고자 애쓰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반면에 미움과 분노의 감정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가 얼마나 바리새인과 같은 자인가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앙연수가 오래 될 수로고 사람들을 상대할수록 나의 율법적인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따지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런 내가 바로 바리새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 짐을 대신 져 주고, 같이 져 주고자 하는 긍휼의 마음을 소유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저자 마태는 이처럼 사랑과 자비심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사야서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일찍이 800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우리 다같이 18-21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첫째로 예수님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들렌다는 것은 소리를 높여서 자기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투기를 좋아하고 자기들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찌하든지 자신들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드러 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항상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소리를 치며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사람을 돌려 쳐 죽이라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로 예수님을 제압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치며 다그쳤습니다. “빨리 대답해 보시오, 할 말 없지? 당신이 졌지?” 그러나 예수님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없이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조용히 한마디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한마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을 물리치시고 여인에게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사마리아 여인을 도우실 때도, 니고데모를 도우실 때도 그 많은 사람들을 도우시면서도 예수님은 나팔을 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보면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인자가 행한 일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아무리 불리한 증언을 하고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쳐도 예수님은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풀어주겠다고 지원을 해 줘도 이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우리 죄인들의 허물과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자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갈대는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갈대가 부러져서 상했으면 또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꺼져가는 심지는 연기만 피우지 도무지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는 쓸모없다고 꺾어 버립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답답하다고 짓밟아 버립니다. 튼튼한 나무, 환한 불빛만 뽑아서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7, 28절에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면 하나같이 별 볼일 없고 허물투성이인 자들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한 사람도 쓸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떤 경영학자가 예수님의 제자 12제자명을 경영학적 측면에서 컨설팅 해 보니까 소망 가운데 채용할 만한 사람은 가룟유다 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연약하고 소망없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키우셔서 마침내 인류의 스승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같은 자들을 믿음의 거목으로 키우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 같던 자들을 도우셔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횃불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중동지방에 가보면 갈대를 잘라서 펜으로 만들어 사용한다고 합니다. 본래 성경도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또 갈대를 잘라서 피리로 만들어 불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던 우리를 사용하사 원대한 인류구속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3:2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편지로 삼으사 세상 가운데 널리 띠워 보내기 원하십니다. 함인근목자는 호주로, 최정한 목자는 미국으로, 김기도 목자는 아프리카로 날려 보내기 원하십니다.     


 또 주님은 한 많고 슬픔 많은 우리를 피리처럼 사용하사 하늘나라의 노래, 천상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여름수양회 때에 라이프 소감을 들어보면 얼마나 기구하고 파란만장하고 상처투성이인 분들이 많습니까? 사실 우리가 다 그렇습니다. 인생 스토리를 들어보면 다들 눈물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영웅들의 전기에 비하면 정말 우리들은 깜도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들어 쓰사 영웅들을 부끄럽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영웅들의 인생처럼 대 교향곡이나 화려한 왈츠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하늘나라의 합주곡입니다. 


 우리 송철수 목자님은 겉으로 보나 안으로 보나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철수 목자의 대학원 담당교수를 찾아갔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철수 목자는 한번 숨으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를 나오게 하기 위해서 손다니엘, 마리아 목자님은 속이 썩는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철수 목자를 볼 때마다 “저 양반이 과연 직장생활을 할 수 있을까?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심히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철수 목자님도 지난 8년 동안 소망가운데 베이비 씨팅해 주셨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여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하고 헌신적으로 하나님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영어예배 환경을 이루고 영어와 일본어를 꾸준히 공부하며 세계선교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마침내 어제 일본 동경에서 일본 수양회 도중에 믿음 좋고 실력 있고 아름다운 일본목자 니시에마 에리 자매와 정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니시에마 목자는 철수목자를 만난 후 철수목자가 순수하고 겸손해서 너무나 마음에 든다고 했다고 합니다. 정말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자비의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언제까지 참으십니까?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참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참고 또 참고 소망가운데 키우신다는 뜻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사모하고 바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생각 때문에 누구도 마음으로 영접하고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비와 사랑이 충만하셔서 어떤 연약한 자라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어떤 불이익과 협박과 위험을 감수하시면서까지 나 한 사람을 감당해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아서 소망이 보이지 않아도 포기치 않고 사랑해 주십니다. 내가  어떤 인생의 폭풍우도 이겨내는 영적인 거목이 되기까지 말씀의 양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내가 절망을 딛고 일어나 활화산 처럼 타오르도록 성령의 기름을 계속해서 공급해 주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되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찬양합니다. 저희도 이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덧입고 어떤 소망 없어 보이는 양도 포기치 않고 끝까지 도와서 이들을 이 시대에 영적 지도자로 키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