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34 강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다.
말씀: 마태복음 20:1-16
요절: 마태복음 20:16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오늘 말씀은 유명한 포도원 품군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만을 뚝 떼어서 생각하면 얼른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19:27절에서 베드로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를 비롯해서 예수님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보상심리가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양들 섬기느라고 끼니도 굶고 잠도 못 자고 핍박도 받고 쫓겨 다니기도 하고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들은 배와 그물과 부모와 처자등,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현세와 내세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꾸 보상을 요구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영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저 같으면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그래, 니들이 이제 컸다고 할 말 다하는구나? 개구리 올챙이시절 모른다더니”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그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이 멀어서 그 포도원이 얼마나 좋은 포도원인지, 그 주인이 얼마나 인격적인지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직접 품꾼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동이 트자 마자 아침 일찍 포도원을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일자리를 찾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일당 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을 하고 채용하였습니다. 품군들은 자신들을 불러주신 주인에게 감사하며 포도원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볼 때에 아직 일군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제 삼시 즉 오전 9시에 또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장터에서 놀고 서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러자 품군들이 주인에게 감사하다며 인사하고 포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낮 12시에 주인은 또 나가서 품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주인은 오후 3시에 또 나가서 품군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작업 마감시간 한 시간 전인 오후 5시에도 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디 일자리가 없을까 싶어서 사랑방 신문, 벼룩시장, 교차로, 가로수, 광주드림 등을 열심히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물었습니다. “왜 종일토록 놀고 서 있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사람이 없어요?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주인이 말했습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품군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는데요?” 주인이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띠고 말합니다. “괜찮아, 빨리 와서 일해. 너희도 품삯을 줄께” 이렇게 해서 마침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6시 작업종료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람찬 하루 해를 끝마치면서--” 드디어 품군들이 기다리는 임금받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점심 먹는 시간과 임금 받는 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품군들은 너도나도 줄을 서서 임금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마다 속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임금을 받아서 집에 갈 때 쌀을 사가지고 가야지” “막내아들 장난감을 사가지고 가야지” “아내에게 줄 생일선물을 사야지”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고등어 몇 마리 사가야겠다” 효심이 가득한 박정욱 품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품군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인은 가장 먼저 오후 5시에 온 품군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씩 주었습니다. 다음에는 3시에 온 사람을 부르더니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정오에 온 품군도 불러서 한 데나리온을 주고 오전 9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그리고 아침 일찍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임금을 나눠 주면서 너무 기뻤습니다. “이들이 오늘 일을 하지 못했으면 시장에서 놀다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을텐데-- 그러면 온 가족이 굶고 힘들텐데” 일을 해서 품삯을 받아서 집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자신도 기쁘고 품군들도 다 기뻐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금을 다 지불하고 주인이 사무실로 돌아 왔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들어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는 품꾼들의 얼굴 표정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일한만큼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라” 잠시 후 한 사람이 앞에 나와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늦게 와서 1시간 일한 품군과 새벽같이 와서 12시간 일한 품군에게 똑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회사가 어디 있습니까? 오후 5시에 온 사람들은 서늘할 때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벽부터 와서 하루 종일 등골 빠지게 일했습니다. 더구나 요즘 날씨가 오직 덥습니까? 우리는 러닝셔츠가 다 젖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와 저 늦게 온 사람들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각자 일한만큼 정당한 댓가를 지불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국가 고충처리 위원회에 재소하겠습니다.” 자, 이들의 요구가 합당합니까? 부당합니까? 백번 합당합니다. 저라도 이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우리 다같이 13-1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주인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주인이 일찍온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들과 분명히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처음에 약속을 했고, 주인은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들보다 늦게 온 사람에게 너무 많이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적게 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배가 아프다는 것이죠.
그러나 주인은 뭐라고 말합니까?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를 주었던지 왈가왈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의 소관이지 일찍 온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주인 것을 가지고 주인 마음대로 하는데 뭐가 나쁩니까? 문제는 일찍 온 사람들이 주인의 본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주인은 어찌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포도원에 들어와서 일을 하고 그들이 다 품삯을 받아서 굶지 않고 잘 살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주인입니까? 정말 선한 주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인을 향해서 나쁘다고 원망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주인은 분명하게 못 박아서 말했습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Take your pay and go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말이 주인의 말의 핵심입니다.
자! 이 비유에 나타난 먼저 온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품삯을 계산할 때에 주인과의 관계에서만 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과의 비교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1:1 관계에서만 보면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숨 쉬고 사는 것만도 감사합니다. 건강한 것도 감사, 정상적으로 학교 교육을 받은 것도 감사, 북한이 아니라 남한 땅에서 태어난 것도 감사, 임진왜란이나 6.25때 태어난 것이 아니라 평화의 때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말씀이 풍성한 UBF로 불러 주시고 이처럼 좋은 성전에서 예배드리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여러 목자님들의 섬김과 사랑을 듬뿍 받고 성장하게 된 것이 감사합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제자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가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양들을 도우면서 내면이 강해지고 목자의 심정을 배우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나의 믿음이 순수해지고 정금처럼 연단되어지는 것을 인해서 감사합니다. 이외에도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사랑이 풍성한 포도원에서 일하게 하신 은혜를 할렐루야 찬양합시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1:1로 생각하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데 지금 주님께서 내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가 그것은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꾸 옆에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분깃만 가지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자꾸 곁눈질을 합니다. 다른 사람은 얼마나 받았나 보자. 그래도 그 사람이 나보다 적게 받았으면 괜찮습니다. 마음에 위로를 받고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하고 똑같이 받거나 더 받으면 난리가 납니다. 서서히 배가 아프고 배알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시기심과 미움 때문에 마음이 힘듭니다. 그 사람이 보기 싫고 밉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화살이 누구에게로 돌아갑니까?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 하나님은 부당하시다”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난리를 피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까?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기도 일자리 없어서 전전긍긍하다 주인 잘 만나서 채용되었으면 다른 사람이 일자리 없어서 마음 고생하는 심정도 이해해 줘야 줘.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너 정말 잘 됐다. 늦게라도 와서 품삯을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야죠. 우리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면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감사해야죠. 은혜를 받아야죠. 같이 기뻐해줘야죠.
또 하나님 편에서 생각해 보면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구나. 자격없는 나도 채용해 주시더니 더 자격없는 저 사람도 채용해 주시고 품삯도 풍성하게 주시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 이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시는구나. 하나님은 못 줘서 안달이시구나” 그래야죠. 그러나 우리는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질 못합니다. 다른 사람 편에서 생각하지 못합니다. 매사에 나를 중심으로 내 유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밉고 주인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한량없이 넓지만 우리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문에 포도원 주인처럼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best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best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도 잘 되기 원하시지만 다른 사람도 다 잘 되기 원하십니다. 그 사람이 잘난 사람이건 못난 사람이건, 키가 큰 사람이건 키가 작은 사람이건,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건 못하는 사람이건 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마저도 동일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해를 모든 사람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내리십니다(마5:45). 때문에 하나님은 아침 일찍 온 사람도 사랑하시고 정오에 온 사람도 사랑하시고, 1시간 전에 온 사람도 다 사랑하십니다. 어찌하든지 다 구원받기 원하시고 다 천국 포도원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가 부모가 되어서 자식들을 키워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부모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자식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학교공부도 잘 못 따라가고 자꾸 몸이 아프고 사고치고 그런 자식도 동일하게 사랑스럽습니다. 아니 문제없는 우등생 범생이 자식보다 자꾸 문제 일으키는 자식에게 더 마음이 더 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재산이 꽤 많은데 아들이 둘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모범생으로 자라서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머리도 못 따라가고 건강도 안 좋아서 힘들게 직장생활하고 근근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나중에 유산을 남길 때에 둘째 아들에게 더 많이 남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아들은 자기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지만 둘째 아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둘째아들에게 더 많은 유산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원칙대로 따지면 그렇게 하면 안 되죠. 그러나 이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경제적 가치로 따지면 99 마리의 성실한 양들을 놔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사고뭉치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이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경제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을 배반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 줄 수 있습니까? 그것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줄 수 있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다 전폭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나 50% 사랑하시고 저 사람 50% 사랑하시고. 두부 자르듯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50억의 인구가 있으면 나를 50억분의 1 사랑하시고 저 사람도 50억분의 1 사랑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나도 100% 사랑하시고 저 사람도 100% 사랑하십니다. 송명희 시인이 그런 찬송가를 지었잖습니까? “세상에 나 하나만 있어도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있어도 독생자를 내어 주시는 주” 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너 한 사람만 있어도 세상을 창조하시고 너 한 사람만 있어도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각 사람의 주가 되시고 각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고 각 사람의 목자가 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요, 천국의 가치관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1절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천국은 마치 이러이러하니” 예수님은 지금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나라, 이 세상의 기업, 이 세상 기업주들의 마인드를 이야기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짧은 소견과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자기들만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그렇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죠.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모든 것을 주고자 하시는 마음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면 물과 피를 다 쏟고 완전히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도 catch 했더라면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그런 말이 나오겠습니까?
제가 어려서 어느날 소풍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날따라 어머니가 얼굴 표정이 어둡고 마음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는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더 좋은 소풍 가방을 가져가는가를 놓고 동생하고 피 터지게 싸운 기억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형이니까 좋은 가방을 가지고 가야 한다. 동생은 어젯밤에 자기가 먼저 찜해놨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한다고 싸웁니다. 엄마는 아파서 죽던 말든 상관없습니다. 나만 좋은 소풍가방 가지고 가면 됩니다. 얼마나 철부지들입니까? 제자들이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잖습니까?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아온즉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버리긴 뭘 버렸습니까? 겉으로는 배와 그물을 버린 것 같지만 속으로는 더 무서운 야심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와 교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혀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종의 마인드, 노예의 마인드로 전락할 것이 아니라 청지기의 마인드, 동역자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 보다 늦게 와서 축복 받은 사람보고 비교하고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신앙이요, 유치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배울 것은 항상 출발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일찍 온 사람은 자신의 출발점을 잊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출발점이 어땠습니까? 자격이 있었습니까? 포도원에 들어올 만큼 탁월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일찍 들어온 것은 주인이 일찍 나가서 그를 채용해주었기 때문에 일찍 들어온 것이지, 그가 일찍 와서 포도원에 일찍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아무리 일찍 왔어도 주인이 아침 일찍 나와서 자신을 불러 주지 않았다면 못 들어왔습니다. 출발점이 내가 아닙니다.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출발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출발점을 잊어버릴 때에 교만해지고, 마음에 감사가 사라집니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우리의 출발점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신입생 신체검사 때에 왔습니다. 입학하기 전부터 와서 파트모임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한번도 도망간 적이 없습니다. 2학년 때에 목동선서 하고, 3학년때 목자 선서하고 4학년때 요회 목자를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항상 일찍 왔다는 자부심,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은 UBF 진골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또 앞으로는 JBF 출신 CBF 출신, 2세 출신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UBF에 다녔다는 UBF 성골출신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출발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일찍 온 사람들은 엄청 자기 의가 강합니다. 일찍 왔으면 얼마나 일찍 왔습니까? 불과 10시간, 아무리 빨라야 11시간 먼저 왔습니다. 몇 달, 몇 년 빨리 온 것이 아닙니다. 겨우 몇 시간 일찍 와서 몇 시간 더 일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엄청나게 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난 한 사람을 위해서 수 십 년을 기다려 주셨습니다. 인류의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서 창세기 3장부터 수 천 년 동안 준비하시고 또 준비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또 보내시고 계속해서 보내셨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온 몸이 찢어지고 온 몸의 피와 물이 다 쏟아지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은 생각 안 하고 내가 땡볕에서 몇 시간 땀 흘리고 수고한 것만 가지고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가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출발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나된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온전히 100%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일생 무익한 종의 자세로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나를 포도원에 불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항상 출발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주권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은 기계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가 보기에 불공평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보면 다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과 주권은 선한 것입니다. God is good. 에베소서 2:10절에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선한 뜻을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보고 우리가 함부로 불공평하다, 악하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지금은 진행중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복하고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내일 또 보너스를 주실지 누가 압니까? 그러므로 오두방정 떨지 말고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다 하나님의 생각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심령이 강팎하고 원망과 불평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권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영접하고 거기에 순복하기 보다는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상대적 빈곤감에 빠져 시달립니다. 그러나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요절 말씀인 16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영원히 나중된 자도 없고 영원히 먼저 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아무리 일찍 왔고 훌륭하고 많은 일을 하고 수많은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교만하다 싶으면 즉시 끌어내려서 나중되게 하십니다. 또 그 사람이 내 세울 것도 없고 한없이 부족하지만 겸손해서 이 사람을 써야 되겠다 싶으면 즉시 그 사람을 높이셔서 먼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역사를 가만히 지켜 보십시오. 정말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높여주시고 장래를 보장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집요하게 첫째 자리를 요구했지만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16장부터 베드로가 그렇게 간절히 요구하는데 좀 자리를 보장해 주시고 도장 찍어주시지 왜 그렇게 훈련만 시키고 안 들어 주실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베드로를 위한 길이 아닙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요구한다고 장래를 확실히 보장해주시고 최고자리 주시면 베드로가 좋을까요? 당장은 좋겠죠. 그러나 베드로는 그때부터 타락합니다. 교만해져서 쓸모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 이 말씀이 얼마나 보배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내가 언제든지 나중 될 수 있기 때문에 깨어서 투쟁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먼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투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정말 만고불변의 진리요, 보석과 같은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옛 말에 부자 삼대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포츠 팀들도 보십시오. 영원한 우승팀은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유럽이, 서구세계가 한때는 복음역사를 주도했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다 죽었습니다. 영적으로 안일해지고 교만해지니까 나중 되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남미와 동아시아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나서 그렇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마감시간 1시간 전에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 부름받은 마지막 주자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온 자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늦게 부름받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뒷문 닫고 들어온 사람, 마감시간 한 시간 전에 온 사람 처럼 항상 겸손하게 감사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쓰시리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