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35강
인자가 온 것은
말씀: 마태복음 20:17-28
요절: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후반부로 오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쟁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하든지 세상영광을 얻고 싶어하는 제자들의 가치관과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고자 하는 예수님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 포도원 품군의 비유는 베드로가 “주여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보상심리가 있었기 때문에 대답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과 야고보가 자꾸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하기 때문에 나온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세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도 이 세 사람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에도 이 세 사람만 데리고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제자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시고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 차리고 예수님과 같은 비젼을 공유하고 예수님과 같은 사상과 철학을 가져야 하잖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계속해서 강조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18, 19절을 봅시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이제 얼마 후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찹잡하고 힘들겠습니까?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정말 예수님의 수제자들이라면 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 드리고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어느날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두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절을 하면서 부탁했습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어머니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틀림없이 정권을 잡고 왕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실 텐데 그 때 자신의 두 아들을 서열 1,2위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촌간입니다. 그래서 혈연을 이용해서 자리청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맛바람의 원조죠.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봅시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예수님은 이들이 지금 뭘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리 청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자리에 앉게 되십니까? 황금보좌에 앉게 되십니까? 머리에 다이나몬드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시고 황금 홀을 들고 다니시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시게 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옷이 다 벗겨진채 채찍에 맞아서 온 몸이 터지고 찢어지고 피범벅이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채로 높이 달려서 물과 피를 다 쏟고 돌아 가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앉으실 자리는 죄수의 자리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의 양쪽에 앉게 해 달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양 옆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예수님과 함께 피 흘리며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이는 “너희가 십자가의 죽음의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들은 확신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영의정 좌의정의 자리에 임명만 해 주신다면이야 무엇이든지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맹세한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12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죽을 때까지 채석장에서 돌 깨는 노동을 했습니다. 그들이 구한대로 고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구하고 함부로 맹세하면 안 됩니다.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바란대로 에수님이 드신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자리는 예수님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제자들이 그렇게 탐하는 자리가 정말 그렇게 소중하고 대단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 자리를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지난 3년 동안 그래도 한 솥밥 먹으면서 동고동락해 온 사랑하는 제자들입니다. 배와 그물, 가족들까지 다 버리고 예수님 한분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따라온 충성스러운 자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장막생활하면서 온갖 고생과 수고를 감당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 온 동지들입니다. 또 예수님이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 자리를 내정해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정말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정말 수제자들에게 추천하고자 하신 것은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헌신하고 베푸는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우리 다같이 25-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토록 높은 자리를 탐하고 집착하는 이유를 이해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원리가 철저하게 힘의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높은 자리에 앉으면 자기 맘대로 아랫사람들을 지시하고 부립니다. 일단 권세를 잡으면 자기 멋대로 밑에 사람을 좌지우지 합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의 법칙만 보고 자라 온 제자들이 자연히 높은 자리를 탐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시절에는 너도 나도 학생이기 때문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자리가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회생활하면서 계급사회를 접해 보면 자리가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가 느끼게 됩니다. 제가 칼빈대회를 섬기면서 그제 한 식당에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옆 테이블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삼성라이온즈 선동렬 감독이었습니다. 제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습니다. “선동렬 감독이시죠?” “네” 대답하는데 상대방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사인을 좀 해 달라고 했더니 대강 쓱쓱 쓰고 끝냈습니다. 제가 대학 후배이기 때문에 “저 81학번이시죠, 저는 84학번입니다” “아 그래요” 관심이 없어요. 상대방을 쳐다보지를 않습니다.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대화가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테이블에 돌아와서 가만히 보니까 종업원에게 계속해서 이것저것 시켰습니다. “야 커피 좀 가져와라” “뭐 좀 가져와라” 반말로 이래라 저래라 했습니다. 종업원들이 바짝 긴장해서 열심히 왔다갔다 했습니다. ‘아! 자리의 힘이 참 대단하구나’ 느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의 말씀이 딱 맞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서 살다보면 자연히 제자들과 같이 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고 싶고, 막강한 권세를 쥐고 싶고, 내 맘대로 힘을 발휘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6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세상 사람들이야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할지라도 제자들의 가치관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아예 바라지도 않습니다. 바랄 수도 없죠. 제자들이기 때문에 주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 무엇입니까? 26, 2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가치관이 전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요, 종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도와 주는 자가 진정으로 큰 자라는 것입니다. 위대하고 큰 자가 되는 것은 자리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만큼 높이 올라가서 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무게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를 쓰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도움과 사랑을 베풀었는가에 따라서 그 삶의 위대성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가치관입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마태복음 20장은 “천국은--”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천국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철저하게 일찍 온 사람이 더 많은 보수를 받고 더 많은 대접을 받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아랫사람을 지배합니다. 때문에 세상에서는 목숨 걸고 자리 싸움을 합니다.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을 합니다. 반칙을 하고 뇌물을 쓰고 dirty한 언론플레이를 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러면 또 억울한 사람이 가만 있습니까? 나중에 권력을 잡아서 철저하게 보복을 합니다.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처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는 비극적인 악순환이 계속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원하셨습니다. 이 땅에 새로운 가치질서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 새로운 가치질서의 본을 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야 하고 인생의 방향과 철학이 달라야 합니다.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이 희생해서 남을 섬길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낮아져서 다름 사람을 이롭게 할까? 그것을 고민하고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절대로 높은 자리에 올라 가서도 안 되고, 직장에서도 승진해서는 안 되고 맨날 말단사원으로 있으면서 청소나 하고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학교에서도 1등해서는 안 되고 밑바닥에서 놀아서 다른 사람 기분좋게 해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는 공부도 열심히 해서 우등생이 되어야 합니다. 직장에서도 열심히 일해서 인정받는 사원이 되어야 합니다. 승진도 하고 표창도 받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일한 댓가 만큼 필요한 물질도 벌어야 합니다. 단지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를 위해서 사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더 영광을 받기 위해서 내가 더 편하기 위해서, 나의 쾌락과 안락을 즐기기 위해서 그것들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가진 지식을 사용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물질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돕고자 힘써야 합니다. 내가 쌓은 경력과 실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자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고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같이 28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온 것은”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을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제물로 나누어 주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가장 강력한 힘과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지위와 권세를 자기를 위해서 쓰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권세자들처럼 임의대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병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단의 권세에 매어 있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온전히 내어 놓으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대속제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의 물질과 시간과 정성을 좀 희생해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저는 가끔 점심 먹고 졸릴 때에 1:1 하는 것이 그렇게 힘듭니다.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무게가 3000톤 정도 되는데 그것을 참고 양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1:1한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힘듭니다. 우리가 졸음하나도 부인하기가 어려운데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준다는 것은 얼마나 힘듭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으면 힘의 논리에 의해서 지배되는 이 세상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슈퍼맨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도, 아이큐 300, 500이 넘는 탁월한 지식인이 나타나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힘으로 실력으로 밀어 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 주고 인생들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는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신 분이시지만 가장 무력한 자가 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섬김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므로 죄인들의 죄를 씻으시는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역설입니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놀라운 아이러니입니다. 왜 죄가 없는데 자기가 죄를 뒤집어 씁니까? 왜 아무 잘못도 없는데 죄인 취급을 받습니까? 왜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데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입을 열지 않습니까? 놀라운 아이러니,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역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행복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8절에 보면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렵습니다. 더구나 철저하게 경제논리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날 이 시대에서는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미련하게 보입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저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좀 힘을 키워야하지 않는가? 실력을 쌓아야 하지 않는가?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도 나와야 하지 않는가? 그래야 복음 전하기도 좋고, 세계선교하는 대에도 유리하고, 누이좋고 매부좋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또 그런 사람도 언젠가는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나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이 말씀이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내가 온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목자가 된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스탭목자가 된 목적이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 사는 날 동안에 나의 정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각오로 살았습니다. “내 심장을 주께 드리나이다.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주의 제단위에 제물로 바치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생명을 바쳐 말씀을 연구하고 핍박자들에 의해서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지만 목숨을 내놓고 성경적인 목회를 감당하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54세의 길지 않는 인생을 살았지만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양화진에 가면 선교사 묘역이 있습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묘비가 있습니다. 존 헤론(John Heron:1858-1890) 선교사의 묘입니다. 그의 모교인 테네시 의과대학에서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학교 측에서는 그를 교수로 내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이라는 땅에 많은 병자들이 약이 없어서, 의사가 없어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선교사로 달려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 땅에 첫발을 내딛는 의료 선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 때문에 일본에서 먼저 조선말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 땅에 입국(1885년 4월 5일)한 뒤 두 달 후에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왔습니다(1885년 6월 21일). 사랑하는 약혼녀 해티 깁슨과 함께 왔습니다. 해티 깁슨도 병원장 딸이었는데 약혼자를 따라서 한국 땅에 온 것입니다.
그들이 교수와 의사로 본국에서 지냈다면 얼마든지 그의 앞길이 든든히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내려놓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전염병이 득실거리는 낯선 이국 땅에 찾아 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미개한 조선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심장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의료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알렌은 광혜원이라는 병원을 차려서 주로 왕족과 양반계급을 치료하였습니다. 그러나 존 헤론은 제중원이란 병원을 차려서 주로 천민에게 혜택을 주었습니다. 또한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문서선교를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그는 그 병원에서 5년간 사역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전해주었습니다. 여름에 선교사들이 모두 피서를 떠난 후에도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보왔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이질에 걸려서 조선땅에 온지 5년 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을 남기고 40대 초반에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의 아내 해티도 20년 뒤에 결핵으로 남편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삶에 고종황제도 감동을 받아서 그가 묻힐 수 있는 땅을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입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인을 사랑했던 주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자신의 신앙철학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그는 조선의 백성들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낮아져서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목숨조차도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서 내어 주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나라에서는 가장 성대한 천국입성잔치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정말 영웅이죠.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 한 분이 섬기는 종이 되시고 썩는 밀알이 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 받는 사람이 나온 것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은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존 헤론이나 그 가족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모든 가치를 두고 삶의 목표를 둔 사람들은 그런 인생 살 수 없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천국에 소망을 두고 천국의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기 보다 천국의 가치관을 가지고 삽시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영웅이 아니라 천국의 영웅으로 삽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잠깐이요 천국에서의 삶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