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6 강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말씀: 마태복음 21:1-22

요절: 마태복음 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시골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오시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굉장히 기대가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무엇을 하실까? 가장 먼저 어디로 들어가실까? 제자들은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드디어 세상이 뒤집히는 날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이 정권을 잡으시고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시지 않을까?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을까? 가슴이 뛰고 설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무리들도 기대가 컸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 분인가 봐 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헤롯궁으로 직행하셔서 악한 자들을 다 몰아내시고 이 땅에 이상적인 왕국을 건설하시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은 왕이시지만 세상에 그 어떤 왕과는 다른 왕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인생들을 멍에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입성할 때에 무엇을 탑니까? 윤기가 나고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나 적토마를 탑니다. 수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칼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합니다. 막강한 힘과 권세를 과시하는 거죠. 함부로 덤벼들 생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마도, 적토마도 조랑말도 아닌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는 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나귀는 짐이나 싣고 다니지 사람이 탈 만한 것이 못됩니다. 거기다 나귀 새끼를 탔으니 얼마나 작고 초라합니까? 이를 볼 때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위에서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낮아져서 섬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특히 5절에 보면 예수님은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타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메는 멍에가 얼마나 많습니까? 학사님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일생동안 직장생활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학생들은 어려운 학과공부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사모님들은 자녀양육과 가사일을 돌보는 멍에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멍에가 없습니까? 그애들은 그애들 나름대로의 멍에가 많습니다. 한창 놀고 싶은데 학원 다녀야죠, 악기 배워야죠, 얘들 방에 들어가 보면 학원 가방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인생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인생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는 멍에는 바로 죄의 멍에입니다.

  다윗은 이 죄의 멍에를 시편 38편에서 이렇게 토로하였습니다.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이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38:2-5)” 다윗은 비록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죄의 멍에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토로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0)” 죄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죽음의 고통으로 내 몹니다. 그 멍에를 감당하지 못해 어떤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이 멍에를 벗기 위해서 삼보일배를 하며 수백리 길을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인도의 수도사들은 자신의 몸에 송곳을 꽂기도 하고 깨진 유리 위를 맨발로 걷기도 합니다. 일부러 자갈을 뜨겁게 달궈서 그 위를 걸음으로서 자신의 죄를 태우고자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한다고 죄의 멍에가 벗겨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불교계의 큰 스승인 성철 스님은 젊어서 한 여인을 만나 어떻게 하다 보니까 딸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평생에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딸의 이름을 “불필(不必)”이라고 짓고 입산수도를 하였습니다. 십 수년을 면벽수도를 하고 잠을 잘 때도 등을 땅에 대지 않았습니다. 속세에 내려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죄업이 벗겨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죽을 때에 이런 법어를 남겼습니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지나치는구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어떻게 보면 아주 솔직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깨끗하게 정직하게 순결하게 살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의 멍에가 그렇게 무겁고 버겁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우리의 죄의 멍에를 대신 지고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데 우리의 멍에를 벗겨 주시기 위해서 우리 대신 멍에를 메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 스스로 범죄자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사형선고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무죄선포를 해 주셨습니다. 김영근 무죄, 정용현 무죄. 우리가 고속도로 운전하다가 속도위반으로 걸렸다가 무죄 선고만 받아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순간의 실수로 6만원 7만원 벌금 물려면 너무나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합니다. 또 동역자에게 온갖 핀잔과 조롱을 들으면서 그 돈을 타낼려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경찰이 경고장으로 바뀌어 주고 “다음부터 조심하십시오” 사면해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6만원, 7만원짜리 벌금형의 멍에만 벗겨줘도 그렇게 고마운데 하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의 멍에를 벗겨주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0:17,18절에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우리인생의 모든 멍에를 지고 가심으로 우리에게 참 자유와 평안을 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진정한 왕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정말 기다려온 왕이요, 흠모하는 왕이요,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들은 처음에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국민들을 섬기겠습니다” “백성들의 종이 되겠습니다.” “머슴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정권을 잡고 나면 마음이 돌변합니다. 자신들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과 멍에를 지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멍에는 자신이 짊어지고 우리에게는 참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해야 하겠습니까?

  7절을 봅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새끼 위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 위에 겉옷을 까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대한 경의와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기도 하고 흔들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만세,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 만세,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왕 만세’ ‘찬송하리로다’ ‘Praise the Lord’ 이런 뜻입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찬양과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뜨겁게 온 마음을 다해서 외쳤으면 온 성이 시끄러울 정도로 소동했겠습니까? 그들의 외침은 메시야를 찬양하는 예배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구원자를 환영하는 찬송이었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드릴 때에 이런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릴 때에 아무런 감사도 감격도 없습니다. 찬송가를 부를 때도 입만 뻥끗뻥끗, 어떤 사람은 찬송 부를 때에 아예 입을 벌리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죄의 멍에와 인생의 멍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멍에, 인생의 멍에를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멍에만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도 이번 주 기말고사 어떻게 볼까? 힘든 장래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문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찬송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내 마음에 오셨는데, 나의 멍에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서 내 마음에 왕으로 입성하시는데, 우리를 사단의 올무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우리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적극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합시다. 진심으로 마음의 겉옷을 벗어서 주님이 오시는 길에 깔아야 하겠습니다. “주여 오시옵소서! 내 마음에 들어오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우리의 가정에 제 마음에 왕으로 입성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의와 평강으로 다스려 주시옵소서!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기사 청년들을 살려 주시옵소서. 21세기 복음의 제사장 나라로 써 주시옵소서!” 뜨겁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목소리 높여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염려, 근심, 걱정, 헛생각, 절망, 슬픔, 허무 등의 사단의 세력이 놀라서 도망가고 우리 마음이 주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 내면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책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헤롯 궁으로 들어가서 헤롯궁을 뒤집어 엎어 주시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 시대의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에 그 시대의 더 큰 문제는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문제였습니다. 특히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세상에 다른 곳은 다 썩어도 성전만은 그 거룩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그 심령을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하게 채우고자 애를 써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전 어디에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도 없고, 1:1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돈 바꾸는 소리, 짐승 사고 팔고 흥정하는 소리로 시장바닥같이 되었습니다. 본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속죄제물을 오래전부터 정성껏 준비하고 집에서 가져 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그 제물을 성전에 와서 사도록 함으로 부당이득을 취했습니다. 백성들도 그게 편리하니까 성전에 와서 대강 사서 드리고 갔습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지극히 형식적이고 외식적이고 세속적인 종교의식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발칵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성전은 기도로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탈하는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소리가 끊기고, 기도소리가 들리지 않고, 맨날 잡담이나 하고 인간적인 소리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빠는 신문만 보고 있고, 엄마는 TV 연속극만 보고, 아이들은 게임에 빠져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House Church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다니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십니까? 말씀이 있습니까? 성령이 충만하십니까? 내 영혼에 기도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온갖 세상욕심과 근심, 걱정과 탐욕의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한 시장바닥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뒤집어 엎으시고 무섭게 책망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에 죄가 발견 될 때에 합리화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처럼 영적인 분노심을 가지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죄가 내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내면이 강도의 굴혈이 되지 못하도록 깨어서 투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영적인 경건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열심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기 때문에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력을 덧입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9:29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하지 않는 교회는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가 왜 영력을 상실했습니까?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부족하지만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의 열정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만가지가 부족해도 기도하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합니다. 반면에 아무리 똑똑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믿음의 용사로 키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이로서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마르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는 성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겉으로 보면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아무 내용도 없고 영성도 없고 성령의 열매도 없어서 쓸모없게 되어 버린 성전을 가리킵니다. 이런 곳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교만과 이기심, 음란과 탐심, 도덕적 부패의 뿌리가 깊었습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문제였습니다. 그 뿌리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갑니까? 인류의 조상인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간 내면에 죄의 뿌리는 너무나 깊고 깊어서 누구도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그 죄의 뿌리를 뽑고 새로운 역사에 창조해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안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은 사람은 사람들의 교만과 불신앙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면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예례미야 선지자는 자기백성을 훈계하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창녀와 결혼을 하면서까지 부패한 그 시대의 타락상을 고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피상적으로 잠시 회개하는듯 하다가 금방 다시 죄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만큼 죄의 뿌리가 깊습니다. 누가 감히 이처럼 뿌리 깊은 죄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마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그 어떤 뿌리 깊은 고질병도 능히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7)”

  제자들은 다음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처럼 울창한 무화과 나무가 뿌리채 마를 수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놀랐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 다같이 21,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차 무화과 나무 한그루 정도가 아니라 태산도 뽑아서 바다에 던질 정도의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한 사람의 죄문제에도 제대로 도전하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계집종 앞에서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사도들은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예수를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3,24)”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이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다 마음에 찔려 벌벌 떨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우리가 큰 죄를 지었구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꼬?” 그러자 베드로가 힘있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러자 그날 세례를 받은 사람이 몇 명이었다고 했습니까?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처럼 태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또 사도행전 4장에 보면 이제 한술 더 떠서 사도들이 아예 성전 앞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보는 앞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관리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감옥에 쳐 넣겠다고 사도들을 협박하였습니다. 이때 사도들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행4:19,20)” 그들은 더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때 복음을 영접한 사람이 남자만 오천명이었다고 했습니다(행5:4). 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마술하는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까지 살리는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는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이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이런 큰 일을 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을 믿은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들은 머리로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하게 따지지 않았습니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도전했습니다. 또 모이기를 힘쓰고 전혀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120명의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나란히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단순하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이번 여름수양회에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태산과 같이 요동부동한 양들이 있습니까? 남은 40일 동안 요회와 파트에서 합심하여 기도해 보십시오. 요즘 많은 분들이 아침금식을 하면 한 영혼을 초청하는 일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이사야 58:6절에 보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게 하는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며 기도했을 때 주의 능력을 체험한 경우가 많습니다. 최정한 목자님이 힘들어졌을 때에 많은 푸른초장 파트 목자님들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박현민 목자님이 완악해져서 어디론가 사라졌을 때에 그 요회에 사모님들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신기하게도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저도 재작년에 양이 없어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생각지도 못했던 박웅학사님이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말씀에 은혜를 받고 여름수양회에 참석하여 18년 만에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의 주로 우리 마음에 입성하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여기서 믿음과 기도는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불가능이 가능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패배적인 인생을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맨날 신세한탄이나 하며 운명적인 인생, 한계적인 인생을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생,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인생,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산에 눌려 기가 죽어서 무력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태산에 도전해서 산을 바다에 던져 버리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기 원하십니다. 우리 마음에 무슨 태산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 버립시다. 태산을 만드신 하나님께 왜 태산을 움직이지 못하시겠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믿음의 능력을 체험합시다. 태산같이 완악한 자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큰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