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7강

                      천국의 축복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말씀: 마태복음 21:23-46

요절: 마태복음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을 살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결케 하신 것 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성전이 만민의 기도하는 집, 말씀을 전하는 집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일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기초해서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권위를 부여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성전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들을 통해서 일하시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의가 강하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완악한 자들인가 가르쳐 주기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는 두 아들에 대한 비유, 세 번째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입니다.

  첫째,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세례요한은 예수님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도권에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홀로 말씀을 공부하며 기도하면서 스스로 영성을 키웠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면서 영적 투쟁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특별히 누구 뛰어난 학자로부터 사사를 받은 것도 아닌데 성경말씀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7-10)”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얼마나 권세가 있든지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나아와서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누구도 감히 이런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그 영력이 탁월하고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권세가 어디서부터 온 것이냐? 그들은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만약에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했다간 그들이 왜 믿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땅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했다가는 백성들이 다 세례요한의 권세를 하늘로부터 온 권세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까봐서 감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꺼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례요한의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처럼 예수님의 권세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세례요한은 자신의 인기가 한창 상한기를 달리고 있을 때에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베푸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마3:11)” 예수님은 바로 세례요한이 증거한 메시야였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지도자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입이 있으나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속에서는 시기심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무슨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에 나타난 종교지도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진실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사실대로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 사람 앞에서 살았습니다. 사람 앞에 살게 되면 자연히 위선적이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거룩한 척, 경건한 척 하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육신의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빌 하이빌스 목사님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 혼자 있을 때의 영성이 그 사람의 진짜 영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양들 앞에서는, 장막에서 동역자들과 같이 있을 때는 여러모로 조심도 하고 죄와 싸우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옆에 아무도 없을 때에, 원룸에서 혼자 있을 때에, 집에 가서 문을 닫고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에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짜 영성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 사람 앞에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삽시다. 골로새서 3: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죽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자 애를 쓰는 것이 경건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처럼 그냥 겉모양만 경건한 체 해 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살고자 애를 쓰는 것이 바로 거룩이요, 경건인 것입니다. 초대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한 그루 나무의 나뭇닢이 시들어 죽어가는 것은 그 뿌리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삶이 문란해지는 것은 분명히 그들을 지도하는 성직자들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성도들의 영성은 바로 그 뿌리가 되는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 타락해가는 이유도 바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거룩한 삶의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말을 대할 때에 참으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 목자님들이 진실되고 거룩해야 교회 전체의 잎사귀가 푸르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또 우리 양들과 2세들이 맑고 푸르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성과 거룩성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경건의 능력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두 아들에 대한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착실이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반발이였습니다. 먼저 큰 아들 착실이를 불러서 말하였습니다.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려무나” 그러자 큰 아들은 착실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둘째 아들 반발이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얘야,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할래?” “안 해요, 오늘 친구들하고 놀기로 했어요” 둘째아들 반발이는 예상했던 대로 반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과 놀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아버지께 잘못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후에 뉘우치고 나가서 일을 했습니다. 자! 이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첫째아들은 겉으로 볼때는 착실하고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순종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죄를 많이 지었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시겠습니까? 큰 아들처럼 겉으로는 순종 잘 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지만 뒤 돌아서면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 행하는 자들을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죄악된 삶을 살더라도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서 둘째아들처럼 무조건 처음에 “싫어요”하면서 불순종한 사람이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로 보면 처음에 반발한 사람이 다 나중에 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아버지 앞에서 “예 가겠나이다” 한 사람들이 나중에 가서 다 불순종하고 반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앞에서도 “예 가겠나이다”하고 뒤돌아 가서도 순종을 잘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경우가 최고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도 “싫어요” 해 놓고 끝까지 불순종하는 경우가 최악입니다.

우리도 그렇죠. “수양회 갑시다” 하면 “예 가겠나이다” 하면서 군말없이 등록하고 끝까지 변심하지 않고 수양회 참석해서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최상의 경우죠. 우리 양님들은 다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못할지라도 “수양회 안 가요” 해 놓고는 나중에라도 회개하면 주님이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간다고 해 놓고 막상 당일 날 어디로 숨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게 가장 나쁜 사람들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사모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메시야가 오시면 누구보다 자신들을 가장 많이 칭찬해주고 가장 높여주고 가장 많이 축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히여 가장 많이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시자 화가 나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도 그랬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고 집을 잘 지켰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자신에게만 유산을 물려주고 가출했다 돌아온 동생에게는 아무것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자기의와 우월감으로 굉장히 높아져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내면에는 천국의 축복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둘째아들도 잘 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께 반발하고 아버지 재산을 세상으로 나가서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얼마나 못된 짓을 했습니까? 그래도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자식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품군의 하나로 써 주십시오” 그는 마음이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처럼 낮은 마음에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에 임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처럼 “아버지, 저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거스른 적이 없거늘 저에게는 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이처럼 자기의와 교만으로 가득차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순종했으면 얼마나 순종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똑같은 죄인입니다. 집을 떠나서 탕자로 살아도 죄인이요 집에 있어도 그 속은 여러 가지 죄로 가득한 죄인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보면 주로 우등생출신들이 더 문제입니다. 반장 출신들, FM으로 자란 사람들, 어려서 부모님 속 안 썩이고 주로 칭찬만 받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상당히 교만합니다. 자기의가 강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공손하고 겸손한 것 같은데 그 속에 엄청난 바윗덩어리가 숨어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그랬습니다. 제 동생은 항상 부모님 속 썩이고 문제 일으켜서 야단만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 잘 하지, 웃 어른에게 공손하지 하니까 나무랄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자아가 형성됩니다. 나는 잘 하고 있다. 나는 선한 사람이다. 나는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의인심정이 싹틉니다. 그러니 누구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나의 허물과 죄문제가 있어도 솔직하게 오픈을 하지 못합니다. 회개하라는 소리, 책망의 음성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자기의와 속교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내면에 이 의인심정과 속교만의 바윗덩어리를 깨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아주 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1b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예수님은 무조건 세리와 창녀들이 훌륭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기서 세리와 창녀들을 언급하신 이유는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중요한 것은 큰 아들이냐 둘째 아들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상한 종교지도자냐 세리와 창녀와 같은 비천한 죄인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깊이 인정하고 회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어떤 옷을 걸치고 있느냐? 어떤 지위에 앉아 있느냐? 어떤 타이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64:6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의는 아무리 깨끗하고 정결한 것 같아도 다 더러운 옷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옷을 깨끗이 입고, 조심할려고 애를 써도 어떻습니까? 한 달만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녀 보십시오. 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거지같이 됩니다. 잎사귀를 보십시오. 아무리 싱싱한 잎사귀를 따다가 옷으로 만들어서 입고 다녀 보십시오. 하루만 지나면 시들고 말라서 바람에 날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패한 죄인인가? 추하고 악한 죄인인가? 겉으로는 아무리 순결하고 고상한 척 해 봐도 그 속은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세리와 같고 정욕으로 말미암아 창녀와 같은 자인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돌이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2: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우리가 항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된 자아를 진실되게 인정하고 회개의 심정으로 나아가므로 죄 사함의 은총이 충만히 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한 집 주인이 좋은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보통 주인은 땅만 빌려주고 농부들을 불러서 스스로 포도나무를 심고 울타리도 만들고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파서 포도농사를 지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주인은 너무나 인격적이고 좋은 분이었습니다. 이 주인은 하고 많은 포도 중에서도 가장 수확이 잘 나는 극상품의 포도나무, 최고로 값나가는 포도나무를 사다가 심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울타리도 만들고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모든 환경을 다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농부들을 불러서 세로 주었습니다. 세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딱 10의 1만 내도록, 십일조만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멀리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주인이 항상 옆에 있으면 농부들이 스트레스 받을까 봐서 자유롭게 포도농사를 짓도록 모든 것을 맡기고 자리를 비켜 준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저희는 예전에 주인집과 같이 위 아래층에서 살아봤는데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못 하나도 마음 놓고 박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이 울고 떠들면 주인이 올라올까 봐서 초긴장을 합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얼마나 좋습니까? 모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간섭도 하지 않고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인의 은혜에 감사해서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드리면 됩니다. 소출을 다 드릴 필요도 없고 10분의 9는 자기들이 쓰고 10분의 1만 주인에게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4, 35절을 보십시오. 수확 때가 되어서 주인이 세를 받으러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를 바치기는 커녕 몽둥이로 때려서 보냈습니다. 어떤 종은 돌로 쳐서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게 하였습니다. 또 다른 종은 아예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이때 분노하여 당장에 이들을 잡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아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주인은 인격적인 사람이라 또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겸손한 종들을 뽑아서 보냈습니다. 보내기 전에 배꼽인사에 미소훈련까지 시켜서 보냈습니다. 36절에 보면 종들을 더 많이 보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농부들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의 마음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에와 똑같이 종들을 때리고 돌로 치고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은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잘해 주었는데, 왜 그렇게 선을 악으로 갚을까?” 주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이번에는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냈습니다.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주인은 이렇게 해서라도 어찌하든지 농부들과 좋은 관계성을 맺기 원하였습니다. 주인은 소출이 목적이 아니라 관계성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부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38,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농부들은 처음에 10분의 1의 소출이 아까 와서 안 바치고자 종들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예 그 포도원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욕심이 커진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포도원을 자기것으로 만들고자 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이들도 처음에는 포도원에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열심히 일해서 소출을 드리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매일 일하다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조금 더, 조금 더 갖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소출만 다 갖고 싶은 욕심에서 나중에는 포도원 전체를 통째로 자기 것으로 삼키고 싶은 욕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감사의 마음에서 무관심으로, 이것이 점점 자라서 서운한 마음으로, 나중에는 미움과 적대감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시절 모른다고 자신들이 과거에 일자리도 없어서 빈둥거릴 때는 포도원에 불러 주신 것만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좀 컸다고 주인행세를 할려고 합니다. 주인과 맘 먹을려고 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주인을 몰아내고 자신이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이기심과 탐심을 제어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가지를 칩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십시오. 이 사이클의 반복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인간들은 그 욕심과 명예심 때문에 자꾸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합니다. 사단이 또 이를 부추킵니다. “하나님 같이 되라. 다 먹어라. 다 네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15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40,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하나님은 무골호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하시고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지만 언제까지나 참기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가차없이 심판의 칼을 드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십니다. 그리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서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로 넘어갑니까? 제 때에 열매를 바칠만한 사람! 즉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사람, 은혜가 은혜인줄 알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은혜를 감당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 분수를 아는 사람에게 축복이 넘어가 버립니다. 실제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축복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속히 회개하고 은혜를 감당해야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고 교만하게 행하면 하나님은 즉시 축복을 앗아가 버리십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이 시대에 어느 민족보다 많은 축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보다 영육간에 급성장한 나라가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센타도 보십시오. 제가 처음에 센타에 왔을 때에 화장실이 남녀를 통틀어서 딱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에어컨이나 식당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80년대 중반까지 센타에 차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차가 얼마나 많은지, 뭇 차를 셀 수 있나 보라! 화장실이 몇 개나 되는지, 때마다 시마다 얼마나 잘 먹는지 모릅니다. 무료로 영어공부까지 시켜줘요. 미국 뉴욕에서 원어민을 데려다가 영어를 가르쳐 줍니다. 거기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때마다 공급해 주십니다. 이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은혜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제 때에 소출도 주님께 드리고, 십일조 생활도 잘 해야 합니다. 소출 드리는 것을 아까와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또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출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에게서 물질을 빼앗아 가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적극적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영적 질서를 잘 지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적 질서만 잘 지키면 하나님은 또 계속해서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소출이 아까와서 욕심을 부리면 나중에는 다 빼앗기게 됩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있죠. 그런데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뺏기고 나서야 후회합니다. 그때 열심히 할 걸, 그때에 열심히 드릴 걸. 우리가 지금 주님께 진심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했습니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 소출을 드려야 합니다.

지난 주 금요기도회에서 최종호 목동이 오랜만에 소감발표를 했는데 엄청 은혜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종호 목동은 제가 광주과기원에 도전해서 사명인의 인생을 살도록 방향을 주었을때에 순종했어야 했는데 자기나름대로 했다가 인생이 꼬이고 완전히 폐인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고시원에서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인터넷이나 뒤지고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구바나바 목자님이 이름을 최순종, 최고로 순종하는 목자가 되도록 방향주고 훈련시켰을 때에 조금씩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회복이 되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그 뜻에 순종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지 내 뜻대로 살면 잘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우리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을 얼마든지 빼앗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건강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물질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라 44절을 보십시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구원의 머릿돌 되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결국 심판을 받아서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거부하고 버려도 하나님의 구속계획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듯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러운 구원의 표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오늘날 교회의 표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저주하여 매달아 죽인 십자가가 지금은 모든 신자들에게 구원과 희망을 주는 사인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그 십자가를 거부하고 자기 나름대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 인생이 깨지고 망가져서 가루가 되고 맙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43절 말씀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한번 축복 받았다고 영원히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택함 받았다고 영원히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역사 속에서 유대인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민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또 유대인만큼 시련을 많이 겪은 민족이 없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많이 베풀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교만하게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으니 그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가고 그들은 깨치고 터지고 만신창이가 되잖습니까? 우리도 이 교훈을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겸손한 자들에게 한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교만하여서 은혜가 은혜인줄 모르고 자기 멋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축복을 빼앗아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겨 버리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해서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해야 합니다. 진실되게 회개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주신 은혜에 적극적으로 감사하고 절대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만 거룩한 체 하지 말고 속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바로 지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로서 영원토록 하나님께 쓰임받고 축복받는 인생이 되기 바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