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요한복음 5 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말씀: 요한복음 5:1-29

요절: 요한복음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어떤 사람이 브라질의 커피농장에 견학을 갔답니다. 농부들이 커피 묘목을 심는데 한 그루씩 심는 것이 아니라 한 곳에 두 그루씩 함께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왜 나무를 한 그루씩 따로 심지 않고 한꺼번에 두 그루씩 심습니까?” 그랬더니 한꺼번에 두 그루씩 심어야 묘목이 서로 경쟁하며 잘 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경쟁을 시켜서 잘 큰 나무는 키우고 다른 묘목은 잘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커피의 세계에도 적용이 되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경쟁의 산물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경쟁입니다. 대학입시도, 취직도, 사업도, 심지어는 묘를 쓰는 것도 명당자리를 찾아 경쟁을 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배경이 되는 곳은 베데스다라는 곳입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곳은 가끔 온천수가 분출하는 간헐천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몸이 아픈 사람이 들어가면 그 분출하는 온천수의 효능으로 병이 치료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천사의 힘으로 병이 치료된다고 하여 베데스다를 ‘자비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베데스다도 자비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온천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전국방방곡곡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각종 불치병자들이 몰려와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못은 너무나 작아서 가장 먼저 뛰어 들어가는 그 한 사람만이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이름은 자비의 집이었지만 천사가 내려오는 날이면 무정무자비의 집으로 변했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국수에는 칼이 없고, 빈대떡에 빈대가 없듯이, 베데스다에도 자비가 없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절망의 집이요, 무한경쟁의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 예수님께서 심방 오셨습니다. 사마리아 땅에서 가장 무시 받고, 목마른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 가장 절망적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패배의식이 깊은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5절에 보면 서른 여덟해 된 병자였습니다. 우리는 통상 이 사람을 가리켜서 38병자라고 부릅니다. 서른 여덟살 먹은 병자가 아니고, 병력이 38년이나 된 환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의 몰골이 비참했겠습니까? 사람들은 베데스다에 최고참 병자인 이 사람을 심히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가족들조차 소망을 끊어 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찾아오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진정한 자비의 주가 되십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절망적인 사람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예수님 안에는 모든 사람이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 49:15,16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찾아와 주십니다. 연극을 보면, 주인공 한 사람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춥니다. 나머지 조연들은 다 어둠속에 묻혀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시고 찾아와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을 찾아와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 예수님은 이 38병자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첫째로,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을 아시고 이르시되”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몰골이 흉하다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피골이 상접한 그에게 눈길을 주기를 싫어했습니다. 눈이 마주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한 사람을 향해서 다가오셨습니다. 눈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부담스러워하는 눈길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병이 오랜 줄을 아셨습니다. 그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신 것입니다. 그의 실패와 좌절을 깊이 동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모두 남 모르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학, 내가 원하는 학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패배의식이 있습니다. 각종 시험에 떨어져서 생긴 실패의식,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환경과 별로 잘난 것 없는 자신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한이 되어 슬픔과 운명의 돗자리에 누워 신세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누구처럼 로또를 한번 사 볼까 하고 큰 맘 먹고 로또를 사보지만 원금만 날리고 꽝이 될 때에 슬픈 마음이 분노로 바뀝니다. 누가 이런 로또를 만들어서 내 가슴에 대못을 박는가? 절망감과 패배감, 실패감이 우리 마음을 짓누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 한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나 한 사람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나의 메시야가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6b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로서 예수님은 이 38병자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소망의 불씨를 심으셨습니다. 이 소망의 불씨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뭔가를 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정이 없으면 그 사람은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열악해도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으면 그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지난 주 신문에 보니까 양팔 없는 선천성 장애를 지닌 미국의 30대 여성이 태권도 검은띠를 획득한 감동적인 뉴스가 실렸습니다. 메사추세츠주 피바디에 사는 실라 래지위츠(32)는 팔이 없이 양손이 어깻죽지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태어났습니다. 무릎과 발목에도 장애가 있어서 며칠 밖에 살지 못할 것이란 판정을 받았습니다. 9살 때에는 한 해 동안에 9차례나 대수술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이 항상 ‘불가능이 없다’는 교훈을 심어 주었기 때문에 롤러스케이트, 승마, 축구 등 온갖 스포츠를 배우며 태권도 검은띠까지 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인간조건이 좋은가 나쁜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마음에 소원과 열정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도 절망적인 현실에 눌려 있지 말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의 고질병, 나의 내면문제가 치료함을 받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가 이번 주 목요일부터 여름수양회를 갖게 됩니다. 똑같이 수양회를 가도 자신의 문제를 고침 받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참석한 사람은 분명히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뒷짐 지고 구경꾼으로만 따라가는 사람은 큰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번 수양회에서 양들은 물론이요, 우리 리더들의 내면에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운데도 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지만 아직도 그 내면이 변화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들은 양이기 때문에 배울려고라도 하지만 리더들은 배울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이제는 낡은 가죽부대, 만성질환자가 되어 가지고 문제의식도 없습니다. 소원도 없고, 열정도 없고, 매사에 수동적이 되어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더 큰 문제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6,17)”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픕니다.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는 고침받을 요소가 없습니까? 우리는 병자가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 양들보다 우리가 더 큰 죄인입니다. 더 심각한 병자들입니다. 우리가 낫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의 10년 묵은 20년 묵은 뿌리 깊은 고질병을 치료함 받고 변화되고 성장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집시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 사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이 사람은 모든 문제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이 버릇없이 먼저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일 년이라도 나를 못에 넣어주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푸쉬맨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망과 불평이 입에 붙었습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은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셋째로 예수님은 이 사람을 말씀으로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걱정마라 내가 너를 못 속에 1등으로 넣어주마”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8,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이 사람을 향해서 명령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그의 운명과 절망에 도전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들쳐 매고 베데스다로 뛰어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향해서 명령을 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앞으로 걸어가라” Get up, pick up your mat, and walk. 예수님은 무기력한 가운데 있는 그를 향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38년이나 누워 있던 사람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걷고 뛰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이 사람을 즉시 일어나서 걷게 만들었습니다.

 

25,26절을 다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예수님 안에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말씀을 통해서 이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때 38년 동안이나 죽어있던 그의 다리의 신경과 세포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예수님은 2000년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경은 2000년 전에 쓰여진 문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믿고 영접하면 우리 안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성경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면 지금도 우리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살전1:13).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가 그렇지 않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짓는 참으로 엄청난 문제입니다. 그것도 지금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곧 이때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공부 합시다. 예배 갑시다. 수양회 갑시다” 그러면 자꾸 뒤로 미룹니다. “나중에 가죠 뭐. 나중에 기회가 있겠죠” 그러나 언제까지나 기회가 우리를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심방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서 목자님들을 통해서 나를 초청하셨을 때에, 지금 곧, 이때, 즉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6: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였습니다. 아직도 수양회 갈까 갈까 주저하시는 분 계십니까? 지금 등록하시고 절대적으로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여름 수양회는 여느 모임과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38년 동안 누워 있던 자가 일어나고 죽었던 자도 살아나는 생명의 잔치입니다.

 

베데스다 온천수와 예수님의 말씀의 차이가 어떠합니까? 베데스다의 온천수는 그동안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재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반면에 수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패배감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마치 로또사업이 인생대박을 줄 것처럼 시작했지만 극소수의 사람외에는 실망감을 안겨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로또처럼, 베데스다 연못처럼 천문학적인 경쟁률을 뚫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걷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안에서 인생역전, 대박 터지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에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베데스다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데스다가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막연히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베데스다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패배감 속에서 울고 있습니다. 38병자처럼 불평과 원망을 늘어 놓습니다. 나를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안은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내가 이처럼 하류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베데스다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베데스다가 인생의 모든 행불행을 좌우하는 곳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보다 더 능력 많고 더 권세가 충만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베데스다를 심방 오셨습니다. 38병자 바로 앞에 심방 오셨습니다. 우리 앞에 와 계십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베데스다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바다에 뛰어 듭시다. 그리하면 어떤 고질병도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인생의 패배의식과 절망도 극복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진정한 베데스다가 되십니다.

 

거지에서 실로암 안과 병원장이 되어 우리나라에 남자 헬렌 켈러로 불리는 김선태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뚝섬에서 놀다가 폭탄이 터져서 함께 놀던 친구 7명이 즉사하고 김 목사는 눈에 파편을 맞아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습니다. 얼마 후 폭격으로 부모님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엄동설한에 밖에서 잠을 자다 한쪽 다리가 동상에 걸려 썩기도 했고, 앞을 못 보니 상한 음식을 얻어먹고 식중독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습니다.

 

한번은 옻나무를 가득 쌓은 남의 집 창고에서 잠을 자다가 온몸에 옻이 올라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고아원에 살면서 독학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어느날 앞 못 보는 헬렌켈러가 박사학위를 3개난 딴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그런 인생을 살고자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맹인이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32번이나 문교부를 찾아가 매달렸지만 번번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어느날 무작정 문교부 장학과로 쳐들어가서 막대기를 휘두르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와 있던 신문기자들이 그를 보고 장관실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결국 문교부 장관은 그에게 대입시험을 볼 수 있는 특전을 주었고, 그는 시험을 거쳐 숭실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장로회 신학대학에서 목회학 석사를 하고 미국 맥코믹 대학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훗날 명예 철학박사 학위와 명예 신학박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헬렌 켈러 이후 처음으로 세 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시각장애인이 된 것입니다.

 

공부를 마친 그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고, 점자 성경과 점자 찬송가를 소개했습니다. 또 앞을 못 보는 젊은이 100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1986년에는 실로암 안과병원을 설립하여 지금까지 27,000명이 개안수술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또 실명 위기에 처한 35만 명에게 무료 안과 진료를 실시했습니다. 최근에는 46인승 리무진 버스에 안과 시설을 갖추고 돈이 없어 진료를 못 받는 시각장애인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면서도 시각장애인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사람입니다. 그는 2007년도에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김선태 목사의 가슴에 간직한 성경 구절은 고린도전서 15:10의 말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만약에 고아요, 거지요, 맹인인 현실을 탓하고 베데스다만 꿈꾸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자신을 베데스다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패배적인 인생 살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국전을 일으켜서 자신의 부모와 두 눈을 잃게 한 자들만 증오하고 저주하다가 슬픈 인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데스다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눈도 안 보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앙망하며 생명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랬을 때에 두 눈이 성한 사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9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안식이 없는 세상에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 안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끊임없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운명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죄의 자리에 눕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어라, 걸어가라” 특별히 새벽시간이 이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그것이 “일어나라” 고 주신 하나님의 경고음으로 듣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교회 와서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하루하루를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후에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를 볼 때에 병이 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후가 더 중요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질병이 나은 것을 가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투쟁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삽니다. 그러다가 과거의 죄로 돌아가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틈만 나면 과거의 죄의 자리에 누워서 불평하고 원망하고 헛생각하고 안일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이전보다 더 못쓰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면 세리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큰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사도바울도 로마서 6:11-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비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같이 바늘 구멍 같은 베데스다만 바라보고 한 숨 쉬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음성을 들으므로 운명의 돗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인생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