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로마서 11 강
넉넉히 이기느니라
말씀: 로마서 8:18-39
요절: 로마서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목적을 예수 믿고 출세하는 것, 복 받고 성공하는 것에 둡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 받고, 출세도 성공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최종목표는 좀 더 차원 높은 곳에 있습니다. 다같이 30절 말씀을 함께 읽어 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 원하십니다. glorification, 영화로움, 예수님의 형상을 덧입는 것. 그것이 구원의 최종목표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시련도 주시고, 고난도 겪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고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보통 고난을 당할 때 고난 자체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고난이 영원할 것 같고 이대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란 것입니다.
아마 신자들 가운데 바울만큼 고난을 많이 겪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러분, 바울이 당한 고난이 상상이나 됩니까? 그런데 그가 말년에 로마 감옥에서 유언적으로 쓴 디모데후서에 보면 “고난을 받으라”는 권면을 여러 번 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2:3)” 우리가 생각할 때는 너무 고난을 받아서 이력이 났을 것 같은데 오히려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디모데후서 4: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고난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의의 면류관을 생각할 때 기쁨으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라톤의 황영조 선수는 너무나 훈련 받을 때 힘들어서 어떤 때는 마주오는 차에 뛰어 들어서 죽고 싶을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영광을 바라하며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의의 면류관, 천국의 금면류관은 올림픽 금메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4절에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24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가슴에 꽃을 달고 목동선서하는 것만도 영광스러운데 천국에서 금면류관을 쓰는 것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느날 제자들을 변화산에 데리고 올라 가셔서 영광스러운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용모가 변화되고 옷이 광채가 나는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고 했습니다(막9:3). 예수님이 이처럼 놀라운 영광을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복음역사를 섬기면서 고난을 받겠지만 장차 덧입게 될 부활 영광에 비하면 그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가 캠퍼스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얼마나 고난이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장차 우리에게 상상할 수 없는 영광으로 옷 입혀 주실 것입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연희센타에 한 학사님은 고등학교 과학 교사인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고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새벽에 시간이 없으면 출근 시간에 전철 안에서 양식을 꼭 먹었다고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번뜩이는 지혜를 주셔서 학생들 과학발명품 지도를 잘 하여 여러 번 지식경제부 장관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김요나단 목자님이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계속해서 금식하면서까지 전도의 고난을 감당했을 때 신실하고 순수한 조용준 형제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눈물로 씨를 뿌리며 고난을 감당할 때 반드시 영광의 기쁨을 주실 줄 믿습니다.
또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나만이 겪는 것이 아닙니다. 22절을 봅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자연세계,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지구 온난화 때문에 북극에 얼음이 녹아서 해수면이 높아져 해일과 쓰나미등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합니다. 중국과 몽골은 공해 때문에 내륙지방이 점점 사막화 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해마다 봄만 되면 황사바람이 우리나라로 불어와서 숨 쉬기도 힘이 듭니다. 수시로 유조선 사고가 발생해서 기름이 유출되어 바다 생물이 몸살을 겪고 있습니다. 자연세계가 얼른 보면 멋있어 보이지만 속에 들어가 보면 치열한 약육강식의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이 다 탄식하며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제발 인간들이 회개하고, 욕심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영적질서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제발 인간들이여 회개하시오.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몸살을 앓고 있소이다. 우르릉 쾅” 천둥번개 칠 때마다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언제 이런 고난에서 해방됩니까? 23절에 보면 우리 몸의 속량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 몸이 신령하게 변화 되는 날, 그때 세상이 새롭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서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게 됩니다(계22:4).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는 날이 옵니다(사11:6-9). 그때까지는 우리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24, 2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으로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일제시대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극한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참고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참을 수 있었을까요? 언젠가는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믿음과 천국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옥중에서 아내 정양순 여사와 아들 동인이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대복은 없는 법이외다.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도 욥의 고난이 더욱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도 욥의 인내가 더욱 아름다워 보입니다. 솔로몬의 부와 지혜는 나중에 타락의 매개가 되었으나 욥의 고난과 인내는 최후에 영화가 된 까닭이외다. 영화는 최후를 보아서 알 것이외다.” 또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인생의 앞 길에 기쁠 때, 슬플 때, 웃을 때, 울 때가 없을 수 없는 것이 필연의 사실이요 진리이오니 구름끼고 비 내릴 때는 광명의 날이 있을 것을 생각할 것이며, 깜깜한 밤중에는 광명한 아침을 바라며 기다림이 마땅하겠나이다. 무엇보다 귀하고 필요한 것은 인내이외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고난 중이오니 우리만 빠져서 백일몽의 향락을 꿈꾸리이까. 아버님과 가족들은 부디 모든 것 주께 맡기시고 안심하사이다” 아무리 현재의 고난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소망가운데 참고 인내하면 반드시 광명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는 날이 왔습니다. 언젠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고 영원한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현재 힘들고 어려운 고난 때문에 눈물짓고 계십니까? 참고 기다립시다. 소망 가운데 인내하사이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21:19절에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5:3,4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했습니다.
특별히 성령께서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참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26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가 고난 때문에 너무나 힘들고 지쳐 괴로워할 때 하나님은 그냥 방관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십니다.
“믿음아 힘내라” “도전아 일어나라” “새벽에 일어나기 힘들지, 내가 등 뒤에서 밀어줄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고 싶을 때 나를 밀어 주시네 믿음아 일어나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으라 내 너를 도우리♬ 주님은 우리를 고난 속에 내팽개쳐 버리시거나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내가 고민하고 고통하고 눈물짓고 탄식하는 것보다 더 큰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가끔 힘든 문제로 기도실에 들어가지만 너무 힘들어서 기도도 나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주여, 주여” 주님만 부르다가 나옵니다.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는 극한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제 방 밑이 바로 기도실이라 가끔 울면서 기도하는 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도 모르게 짠한 생각이 들고,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마음을 살피시는 성령님이 중보하며 기도하시는데 왜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며 기도할 때 반드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고난이 변하여 영광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고난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2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전체를 통해서 선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그 선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 하나님은 고난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바울이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며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죄수의 몸으로 배에 몸을 싣고 로마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어닥쳐서 배가 파선하고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고 풍랑에 빠져 죽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풍랑이 그치고 보니 배가 멜리데라는 섬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풍랑이 불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예상보다 더 빨리 로마 근처에 와 있었습니다. 로마선교가 너무나 급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등뒤에서 광풍을 불어 빨리 로마 가까이로 날려 보낸 것입니다.
또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려 사람들은 다 바울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독사를 털어버리자 독사가 불 위에서 뱀구이가 되었습니다. 그곳 추장 아버지의 열병과 이질까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뜻하지도 않게 그 가정이 다 예수 믿고 섬 전체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사도바울 기념교회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자체만을 바라보지 말고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믿고 참고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놀라운 뜻을 두고 계십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29,3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영화로운 존재로 키우기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단계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미리 아시고(예지), 미리 정하시고(예정), 부르시고(소명), 의롭다 하시고(칭의), 영화롭게(영화) 하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키울 때도 어떻습니까? 부부가 서로 계획을 하고 낳습니다. 갓난 아이 때는 기저귀 채워서 키우고, 유치원 보내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을 거쳐, 직장생활하도록 돕고, 결혼하기까지 뒷바라지 합니다. 그 과정을 자식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는 단계별로 필요한 음식을 먹이고,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시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 영화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고 돌보고 계십니다. 그 과정에는 따뜻한 사랑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혹독한 훈련도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 키우실 때 사랑도 많이 해 주셨지만 얼마나 강하게 훈련하셨습니까? 한번은 ‘강 저편으로 건너가자’ 해 놓고는 무서운 광풍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사색이 되어 죽어가는데 예수님은 모른체 하고 누워 잠만 자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흔들어 깨우자,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는 “너희들은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위험에 몰아 넣고는 믿음 없다고 책망하십니다. 한번은 길 가다가 “너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정답을 말했는데도, 그 뒤에 “십자가 지시지 말라”고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강한 믿음의 용사들로 키우기 위해서 복음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훈련하고 연단하십니다.
저는 오늘 목동선서하는 8분의 형제 자매들이 이런 예수님의 훈련과 고난을 많이 받고, 예수님을 닮은 좋은 제자들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양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날마다 해만 비치면 그 땅은 곧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세찬 비도 내리고, 눈보라도 치고, 꽁꽁 언 겨울도 있어야 땅이 기름지고, 병충해도 죽고, 수분이 풍부한 토양이 됩니다. 음식도 단 것만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고 몸에 칼슘이 빠져 나가서 나중에 골다공증 걸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때로 쓴 것도 먹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도 먹어야 합니다. 기뻐 웃을 때도 있어야 하지만, 통곡하며 울 때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이 깊이가 있고 성화를 지나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훈련이나 고난을 힘들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감사함으로 받아서 정금같이 빛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37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힘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탄이 우리 마음 가운데 불신을 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고난이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시련이 온 단 말인가? 계속해서 사탄이 불신과 의심, 회의의 화살을 쏘아 댑니다. “너의 하나님은 힘이 없어” 사단이 우리를 대적합니다. “네가 죄가 많아서 실패하는 거야?” 사단이 우리를 고발하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33,3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를 변호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능히 사탄의 공격을 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 실수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좀 허물과 죄에 넘어질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이 사랑을 확신할 때 우리가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32절을 봅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최고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이 어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하여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필요한 것을 주실 것입니다.
홀어머니에게 한 말썽꾸러기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름대로 열심히 아들 뒷바라지를 하며 잘 키워 보고자 했지만 아들은 자꾸 말썽을 피우고 어머니의 마음을 몰라 줍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사고로 두 눈을 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생을 비관하여 맹인으로 사느니 자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자네를 위해 눈 하나를 기증해 준 사람이 있으니 수술을 하자고 달랬습니다. 마침내 수술을 마치고 붕대를 푸는날 눈을 떠 보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한쪽 눈을 붕대로 감고.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한 쪽 눈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그일이 있은 후로 청년은 어머니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열심히 자신의 인생길을 개척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눈까지 내어주는 분이 바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이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때가 되면 주십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 원하시는 것은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영적인 승리이기 때문에, 출세가 아니라 영화로움이기 때문에 고난도 당하게 하십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을사오적 중에 한 사람인 이완용의 일대기에 대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부잣집 친척의 아들로 입양되어, 24살 때 과거급제를 합니다. 29살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37세에 학무대신, 즉 문교부장관이 됩니다. 처음에는 친러, 친미노선을 걷다가 러일전쟁때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로 돌아서서 한일합방의 주역이 됩니다. 고종황제가 주저하자 왕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협박하여 도장을 찍도록 합니다. 그는 마침내 총리대신, 국무총리로서 온갖 특혜를 누립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출세한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가 69세때 이재명 의사의 칼에 맞아 두 시간 만에 죽고 맙니다. 세상의 출세가, 인간적인 성공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이름은 두고두고 역사속에서 수치를 당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 등은 믿음의 중심을 지키다가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감옥에서 순교하거나, 엄청난 옥고를 치루었습니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 성도들도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비록 많은 고난을 받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고난의 길을, 심지어는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분들은 지금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마음 속에,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 주기철, 손양원, 최권능, 이기풍 목사님 같은 분들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믿음의 선배로 새겨져 있습니까? 그들은 실패자가 아닙니다. 승리자입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승리자입니까? 그들은 유혹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겼습니다. 두려움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절망과 싸워 승리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히브리서 11:37절에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빛나고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사랑. 이 주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옥중서신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집을 떠나 옥중에 들어오니 밤도 깊고 옥도 깊고 마음에 가득 찬 수심도 깊도다. 그러나 주와 함께 동거하니 항상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 고생 4년은 아주 많은 날이나 주와 함께 동락하니 하루 같도다. 과거 4년 동안 평안히 보호하여 주셨기에 미래에도 그 같으실 주님이심을 확신하노라” 그 춥고 깊은 감옥 속에서도 함께 하신 주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에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사는 자는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무엇도, 그 어떤 고난도, 그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35-39)”
결국 우리를 승리케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천 년이 두 번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천년이 두 번 지나도 바꿀 수 없는 것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세상은 변합니다. 유행도 변합니다. 대통령도 5년마다 변합니다. 그러나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를 가슴 뭉클하게 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힘있게 합니다. 승리케 합니다. 우리인생에 어떤 고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가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 어떤 고난도 이겨내고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