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성탄 1 강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말씀: 누가복음 1:5-25

요절: 누가복음 1: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요즘 우리나라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선을 앞두고 떠들썩합니다. 그만큼 지도자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뽑아야 민생문제를 해결해 줄 것인가? 거기에 사람들은 관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들의 근본적인 민생문제는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은 그 예수님의 선구자였던 세례요한의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있다면 오늘 말씀 16절일 것입니다. 16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우리가 양들을 도와봐서 알지만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세례요한은 한 두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이키는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의 기도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이었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은 아론의 자손이었습니다. 둘 다 영적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7절을 봅시다.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두 사람이 늙도록 자식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동료 제사장들은 자식들 뿐 아니라 손자들까지 있어서 스마트폰에 사진을 넣고 다니면서 자랑했습니다. “우리 은성이가 요즘 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 앵무새 같애?” “우리 예지는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우등생깜이라니까?” 그런데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에게는 손자, 손녀는 커녕 자식도 없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자세로 살았습니까?

 

6절에 보면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다”고 했습니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하나님 앞에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식이 있든 없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했습니다. 또한 8절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열매가 있건 없건 충성스럽게 제사장의 직무를 다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축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무, 그 자체가 목적이요, 존재의미였습니다.

 

제가 몇 년 전 뉴욕에 신사무엘, 신룻 선교사님 댁을 방문했을 때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날은 주일이었고, 저는 시차가 극복되지 않아서 예배 후에 바로 방에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한 두 시간 자고 나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보니 두 분이 탁자에 앉아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신사무엘 선교사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자가 아니요 이 말씀이 어디에 있지?” 하시자 신룻 선교사님이 바로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1절이요”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 말씀이 어디 있는지 바로 바로 아시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신사무엘 선교사님이 제게 질문하지 않으신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잘 못 했으면 창피 당했을텐데. 주일 예배가 끝나면 대개 오후에 좀 쉬면서 집에서 TV도 보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은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고 말씀을 읽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금방 아셨습니다. 두 분이 연세도 많으시고 컬럼비아 센타에 양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묵묵히 말씀을 붙들고 선교사명을 감당하시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우리도 어떤 형편에서나 요동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고, 주께서 맡겨주신 캠퍼스 목자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은 요한이라 하라” 사가랴가 제비 뽑혀 성전에 들어가서 분향할 때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그 기도가 천사에게 들렸다고 말하겠습니까? 사가랴, 엘리사벳이 드리는 기도는 그저 보통 부부들이 ‘아들 하나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수 십년 동안 기도하고 또 기도하여 그 간절함이 하늘에 사무치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가정의 아픔뿐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안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헤롯등 불의한 지도자들이 판을 치는 시대를 불쌍히 여겨주시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400년 동안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는 피패한 시대에 영적 지도자를 허락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식없는 그들의 수치를 제하여 주시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기도가 마침내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의 아픔과 가정의 아픔을 안고 사무치게 기도하는 가운데 엘리사벳의 태는 성령충만한 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내게 아픔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하나님께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애타는 심정으로, 사무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결혼하자마자 바로 아이를 낳았다면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그 모태가 그렇게 성령충만한 모태가 되었을까요? 힘든 가운데서 오랫동안 눈물로 기도했기 때문에 그 내면에 기도가 쌓인 것입니다. 영성이 쌓이고, 영력이 쌓인 것입니다. 그 기도를 먹고 자란 세례요한은 후에 성령충만한 가운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습니다. 똑같이 어려움을 당해도 그 내면이 저주와 원망의 터전이 될 수도 있고, 성령충만한 터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영접하고 기도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배운 로마서 8:28절 말씀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고 인내하며 기도해서 주의 은혜와 영광을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 시대를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간구함이 주께 들리기까지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실 줄 믿습니다(렘33:3).

 

둘째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됩니다. 17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엘리야는 아합왕 시대 바알 우상이 창궐한 시대에 살았습니다. 바알은 한마디로 물질과 쾌락의 신입니다.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온 나라를 바알천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 갈팡질팡하며 죄악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시대 분위기가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생각하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이때 분연히 일어나 그 시대에 도전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아합왕이 엘리야를 째래보며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호통쳤습니다(왕상18:17)”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항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왕이시어,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시오” 또한 백성들의 죄도 분명하게 책망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바알 선지자 85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아서 도전장을 냈습니다. “나무 위에 송아지를 각 떠서 올려놓고 누구에게 기도하면 응답하는지 대결을 해 보자” 850대 1로 기도대결을 했습니다. 마침내 850명의 바알선지자들을 꺾고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해서 제단에 불이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오지 않던 비가 소낙비로 쏟아지게 되었습니다(약5:17). 온 나라가 하나님을 떠나 바알에게로 가 버렸는데, 엘리야 한 사람이 특심한 열정과 심정을 가지고 도전해서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엘리야의 심령(spirit)과 능력(power)은 그 시대의 죄악상을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는 상한 심정이요, 생명을 걸고 도전하는 뜨거운 열정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바로 이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례요한은 엘리야처럼 백성들의 죄를 무섭게 책망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3:7-9)” 그는 또한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의 죄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옳지 않소, 회개하시오” 그렇게 말했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권면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이처럼 세례요한은 죄를 무섭게 질책하는데도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아왔습니다.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와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말과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적을 베푼다거나 병을 고치는 신비한 일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그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그에게로 몰려왔겠습니까? 이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사랑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세례요한의 공통점은 그 시대 백성들을 향한 뜨거운 목자의 심정과 저돌적인 도전 spirit입니다.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오직 자기 배만 불리고 양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깊이있게 연구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어떤 감화력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제사장 아들이지만 안정된 삶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황량한 광야로 뛰쳐나가서, 거기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기도생활에 힘썼습니다. 요즘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암송하듯, 그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암송하고, 묵상하며, 말씀 연구에 힘을 썼습니다. 또 그는 15절에 보면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는 세상에 죄악된 문화를 멀리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더러운 죄를 멀리하고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였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럽고 취한 죄의 문화에 취해 있습니까? 어제 신문에 보니까 폭탄주를 가장 많이 마시는 연령층이 20대라고 하였습니다. 술에만 취한 것이 아닙니다. 돈에 취해 있고, 명예에 취해있고, 쾌락에 취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영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쓰레기가 쌓이는 곳에 파리가 날라들고, 아름다운 꽃이 있는 곳에 나비가 날라듭니다. 더러운 죄를 가까이 하면 악한 영이 임하게 됩니다. 반면에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성령께서 임하시게 됩니다. 악한 영에 지배를 받으면 파리떼와 같이 지저분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나비와 같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더럽고 추한 세상문화를 할 수 있는대로 멀리하고 영적인 것을 가까이 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새벽기도, 일용할 양식, 소감쓰기와 말씀 암송이 최고로 좋습니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이 이제 죄를 탐하는 옛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을 추구하는 깨끗한 그릇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때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서 주님의 구원 역사에 세례요한처럼 귀하게 쓰임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례요한이 거룩한 삶을 살았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부터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강하고 뜨거웠습니다. 아합왕에게까지 도전한 엘리야의 메시지와 같이 강력했습니다. 갈멜산에 떨어진 불처럼 뜨거웠습니다. 불처럼 뜨겁고 강력한 메시지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통회자복하며 꼬꾸라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부모들이 무책임하여 자식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도 거스르는 반발심으로 인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요즘 시대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 3살박이 어린 아들을 때려 죽여서 저수지에 버린 비정한 여인의 뉴스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과 별거중인데 아들이 “아빠 보고 싶다”는 말을 할 때마다 심하게 때렸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아들을 죽여서 가방에 넣고는 아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차를 가져 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수지에 가서 ‘쓰레기 버리고 오겠다’며 차에서 나갔다가 아들의 시신이 담긴 가방을 저수지에 버리고 다시 그 차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비정한 엄마가 어디 있습니까? 본문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마음이 없는 시대를 지적했는데, 요즘은 어머니까지 자식을 죽이는 세상이니 얼마나 패역한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얼마나 거스르는 세대인지 모릅니다. 조여호수아 목자님은 중학교 2학년 담임인데 한번은 한 학생이 하도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했든지 “선생님, 왜 저에게 지랄하세요” 했다고 합니다. 수업시간에 갑자기 뒤로 가서 줄넘기 하는 학생이 없는가, 드라이기를 가지고 와서 수업시간에 머리를 만지작 거리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거스름의 정도를 지나 무법천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스텝 수양회때 서울대 역사를 섬기는 한 목자님이 메시지 전하면서 이런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한번은 전도를 하는데 학생이 인상을 쓰면서 “저리, 꺼져” 하더랍니다. 20살이나 어린 후배가 너무 기가 막힌 말을 해서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 물었더니, “한국 말 못 알아들어. 저리 꺼져” 그러더랍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악하고 음란하고 거스르고 무책임한 세상. 이런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냥 포기할까요? 소망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000년전 세례요한이 살던 시대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3000년전 엘리야 시대는 더 했습니다. 그 이전 노아시대, 소돔고모라 시대는 더 했겠죠. 문제는 시대가 아니고 그 시대를 감당하고 돌이키는 영적 지도자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거스르고 반발하고 무책임하고 음란하고 사악해도, 그들의 악한 영을 제압할 수 있는 영적인 파워를 지닌 영적 지도자가 있으면 얼마든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연약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성령이 그에게 임하시자 그는 두려움을 모르는 불사조와 같은 자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3:38)” 그가 담대하게 불타는 심령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자가 3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나 사도바울도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백성들 앞에 나아가서 사죄의 복음을 전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영적 거목들이 많이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2012년 성탄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무엇보다 우리 마음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사가랴 엘리사벳처럼 성령충만한 터전이 되도록 기도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각 파트와 요회가 세례요한같은 영적인 거목을 탄생시키는 터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기도하되 형식적으로 기도하고 끝내지 말고,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와 같이 하늘에 사무치기까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패역한 시대에 대해서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캠퍼스에 올라가 복음을 전해서 거스르고 반발하는 세대들을 주께로 돌이키는 복음의 전사가 됩시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말씀대로 살고 진리의 복음을 증거하며 불꽃처럼 살 때 이 세상이 변화되고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양들의 심령에 회개의 불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황량한 캠퍼스가 복음의 불길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룩의 열정이 회복될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10분의 형제자매들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덧입어서 장차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돌이키는 이 시대에 세례요한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