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11~17

요절/ 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저는 얼마 전 스피릿파트 김종주형제가 도서관에서 힘없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밥을 먹었냐? 물으니 안 먹었다하여 맥도날드에 갔습니다. 빅맥을 시켜먹고 나와서 예배드리러 가는데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종주야! 난 봄이 너무 좋아, 그런데 왜 사람들은 봄은 타는지 몰라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종주형제가 목자님 저는 봄을 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래? 물으니 계절은 봄이 와서 꽃이 피고 화려하지만 저는 여전히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고 있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봄의 화려함 때문에 오히려 삶에 지친 자신의 모습이 더 초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망각의 눈에 덮여있던 겨울이 좋았고, 화려한 4월은 잔인하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4월만 잔인하겠습니까? 내 안에 움트는 생명력, 피어나는 꽃과 같은 희망이 없다면 모든 것이 내게 늘 잔인할 뿐입니다. 꽃은 태양으로부터 생명력을 덧입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생명과 희망을 덧입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으로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청년에게 청년아 일어나라말씀하심으로 청년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희가 청년아 일어나라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생명 충만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울지 말라(11~13)

 

1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친신후 나인이란 성으로 가셨습니다. 이때 제자와 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글쎄 들었어, 그 무기력하게 지내던 신실목자 있잖아 이제는 충성스러운 종으로 변화되어 선교사를 준비하고 있다네, 이는 기적이야 기적/ 또 들었어? 애리 목자님이 결혼 9년 만에 임신했데, 정말 예수님의 능력은 위대하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와 무리는 이처럼 기쁨과 감격이 충만하였습니다. 능력과 생명력이 가득하였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희망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행렬과 역행하는 한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 행렬은 나인성에서 나오는 죽음의 행렬이었습니다. ‘나인이란 뜻은 즐거움이었지만 그들은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청년이 죽었고, 그 청년은 과부의 독자였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거의 기절한 상태로 아이고 내 아들, 내 아들 살려내라 아들아, 나를 두고 어디 가냐애 간장이 끊어지듯 슬피 울었습니다. 독자를 잃은 어머니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여인에게도 한때 그녀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박보겸처럼 잘생기지는 않았지만 자상하고 그녀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이 있었기에 그녀는 행복하였습니다. 둘 사이에는 어느덧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 생겼고 꿈만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아들 장난감을 사오다가 그만 사륜마차에 치여 죽고 말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뿐인 아들에게 소망을 두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뒷바라지를 하였습니다. 독자도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았는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요, 집에서는 효자로 자라났습니다. 아들이 엄마 힘들지! 조금만 참아 내가 커서 꼭 효도할게할 때면 모든 고생과 서러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독자는 과부에게 있어서 소망이요, 기쁨이요, 생의 보람이었습니다. 마침내 아들이 장성하여 명문 예루살렘 대학에 들어갔을 때 여인은 이제 고생 끝 행복시작이구나 하였습니다. 아들이 취업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행복하게 살날을 생각하니 어깨춤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대학에 간 아들이 학교 MT에서 떡을 빨리 먹기 게임을 하다 그만 기도가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주검을 안고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 오열하였습니다. 여인이 아무리 일어나 보라고 소리를 질러도, 얼굴을 비벼도 죽은 아들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눈에는 하염없는 눈물만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죽음은 이 가정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렸습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과부의 소망도 죽고 말았습니다. 한참 꽃을 피우려던 청년의 무한한 가능성과 꿈도 사라졌고, 여인의 삶의 즐거움도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과부에게 있어 남은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인생은 수많은 희비극으로 점철되어있지만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나는 한편의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가장 잔혹한 폭군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이에 맞설 수 없습니다. 군대는 연기할 수 있지만 이 죽음의 영장은 연기하거나 거절할 수 없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도 유럽을 정복한 알렉산더도 결국 한 줌의 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청년들은 죽음이 자신과는 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올 때는 순서가 있을지 몰라도 죽을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생들은 모두 죽음의 행렬에 서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 누구도 죽음이 이끄는 장례행렬을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과부처럼 “I go I go" 슬피 울며 죽음의 행렬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이끄는 이 참혹한 죽음의 행렬을 당당히 막고서계시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행렬이 나타나자 죽음의 행렬이 딱 멈춰 섰습니다. 상여소리가 멈추고 관을 들쳐 멘 사람들의 발걸음도 멈췄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막고선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가가 말씀하셨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여인의 눈물을 보신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울고 있는 여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삶의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병들고 늙고, 결국 죽음 앞에 절망하고 슬피울고있는 우리 인생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아픔을 그냥 보고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깊이 이해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독자를 잃은 과부처럼 깊은 절망과 슬픔 속에 울고 있습니다. 쌍코피 터지도록 열심히 준비했던 시험과 취업에 번번이 떨어져 절망하여 우는 분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가는 것이 괜히 서러워 우는 분도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상황과 가정과 시대 그리고 내 자신이 너무나 안타깝고 희망이 안보여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분이 있습니다. 전공도 실패하고 사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 답답한 마음에 소리 내어 우는 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예기치 않는 질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날 때, 하염없이 눈물만 나옵니다. 이것저것 해놓은것은 없는데 나이만 먹고, 여기저기가 고장 나고, 결국 나도 죽는 것인가 인생이 벚꽃처럼 너무나 허무해서 우는 분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릴 더 서럽게하는것은 울고 있는 내 자신을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귀찮아하고 부담스럽다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고 있는 우리들의 인생을 찾아오셔서 관심을 갖고 이해하시며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울지 말라! Don't cry!"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울지 말라! 이는 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책임져주겠다는 말입니다. 권능목자님 아들 온유가 아끼던 변신로봇 카봇이 부서져 서럽게 울고있을때 아빠 권능목자가 말합니다. '울지 마~~' 무슨 말입니까? 내가 더 좋은 것으로 사줄 테니 그렇게 서럽게 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책임져주겠다는 말입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백성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백성들은 홍해 앞에 맞닥뜨렸을 때 추격하던 애굽 군대로 인해 두려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모세가 말했습니다. "울지 마!", "울 필요가 없어!",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앞에 길이 보이지 않던 홍해가 '!' 갈려져 길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셨습니다. 어떤 극단적인 상황가운데서도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에게는 길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예수님이 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간 인생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몰래 슬피 눈물을 흘리는 분이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Don't cry"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아픔과 슬픔, 모든 문제를 다 알고계십니다, 그러나 Best의 해결책도 가지고계십니다. 내가 기대하지 못한 것, 더 귀한 것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 앞에 울음을 그치고 하나님의 선물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청년아 일어나라 (14~17)

 

슬피 우는 과부에게 울지 말라말씀하신 예수님은 죽은 아들이 있는 관으로 가까이 가셨습니다. 그러면 관속에 있는 아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그는 죽어서 관속에 누워있습니다. 그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꿈도, 소망도 없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그저 누워있을 뿐입니다. 사각의 관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관속에 있는 아들은 자신만 비참한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슬픔과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청년이 아닙니다. 청년은 청년다운 스피릿이 있어야합니다. 마치 연어가 거센 물살을 헤치며 상류를 올라가듯 팔딱팔딱 살아있어야합니다.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고 피가 끓어 힘차게 약동해야합니다. 비전과 가능성과 폐기와 열정이 충만해야합니다. 이처럼 청년은 청년다워야 청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 관속에 누워있는 자를 청년이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관속에 누워있는 청년은 사람의 눈엔 생명도, 소망도 가능성도 없는 죽은 인생이요, 끝난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아직 죽은 자가 아니요, 청년이요 청년다운 사람이요, 청년다운 역할을 할 수 미래의 주역으로 보셨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소망이 있는 자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아들을 소망가운데 청년아부르시고 청년의 정체성을 심어 주셨습니다.

 

한 사냥꾼이 아프리카 초원에서 젖을먹이고있던 어미사자를 쏘아 죽였습니다. 사냥꾼은 새끼를 집에 데리고 와서 양의 젖을 먹여 키웠습니다. 그런데 사자는 자라면서 자신을 양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몸짓은 점점 커갔지만 애완견처럼 사람에게 먹이를 달라고 애교를 피우고 배부르면 잠만 자고 그래서 살만 쪘습니다. 그에게서는 어딜 보아도 사자다운 야성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 사자가 새끼사자에게 찾아와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하며 사자후를 발하였습니다. 새끼사자는 그때서야 자신이 양이 아니라 사자라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는 담을 힘차게 뛰어넘어 초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엄청난 소리로 으르렁~ 사자후를 발하며 사자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사자는 양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자답게 살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청년은 청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며 살아갑니다. 청년들은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어 자신을 낙오자, 실패자로 인식합니다. 가난하고 빽없다는 이유로 2, 3류인생이라 치부하고 스스로를 자학하며 살아갑니다. 결혼도 취업도, 아이도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엄마뱃속에만 보호받고자하는 캥거루족, 학점 어학 등 능력이 안 되어 아예 구직활동을 포기한 니트족이 되어 살아갑니다. 비록 나이는 청년이지만 청년다운 기상은 온데간데없고 노인과 같이 삽니다. PC, 노래방, 카페와 술집을 전전하며 순간의 쾌락을 좇고 물질과 시간을 허비합니다. 취업대란시대에 취업에 대한 두려움은 청년들을 더욱 위축들게합니다. 이런 것들이 청년스피릿과 비전과 가능성을 빼앗아갑니다. 많은 청년들이 자신의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모른 채 사각의 어두컴컴한 원룸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청년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쪼다요, 졸장부인생으로 살아가고 있고, 사회에서도 그런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우리 인생들도 소망가운데 불러주십니다. “청년아~, ~ 청년이여~, You 영맨청년다운 삶을 살도록 청년으로 부르시며 정체성을 심어주십니다. 주님은 미디안군대를 피해 몰래 밀 타작하던 기드온을 ~용사여!” “너는 큰~용사다!” 말씀하셨습니다. 75세 자식하나 없는 노인 아브람에게도 이 꼬부랑 늙은이야하시지 않았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12제자들을 부르실 때 지방대 촌놈들아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소망가운데 불러주시고 정체성을 심어주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은 청년답지 못한 우리를 위로하시고 소망가운데 불러 주십니다. “너 청년아~”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청년다운 삶을 살길 원하십니다. 한번 다같이 나는 청년이다, 청년 ○○야 일어나라해보겠습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들을 소망가운데 청년으로 부르시는 사랑의 주요, 소망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은 자를 어떻게 청년으로 회복시켜 주셨습니까? 우리 14절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예수님은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Young man get up!!!" 죽은 자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는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죽음의 벽을 뚫고 청년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러자 멎어버린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식어버린 혈관에 다시 뜨거운 피가 머리와 몸통, 팔 다리로 흘렀습니다. 정신이 돌아오더니, 청년이 아 잘 잤다~ 하며 일어났습니다. 앉아서 말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난 청년을 그 어머니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두 그룹의 식물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한 그룹에게는 나너 사랑한다, 좋아한다, 너는 할수 있어, 열매많이 맺어라는 등 긍정의 음성을 들려주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나 너 싫어해, 미워해, 너는 할수 없어, 열매맺지 마등 부정의 음성을 들려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긍정의 음성을 듣는 그룹은 성장도 잘되고 열매도 좋은 열매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정의 음성을 드는 그룹은 성장도 잘 안되고, 열매도 볼품이 없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긍정적인 말도 우리에게 좋은 에너지를 줍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은 한계가 있습니다. 능력이 없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못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능력과 생명을 줍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안에 생명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말씀이신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무에서 유를 창조셨습니다. 말씀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말씀은 빛처럼 살아서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다.

 

저는 병원에서 심장이 정지된 사람을 자주 봅니다. 그러나 의사가 제세동기로 전기충격을 주면 심장이 다시 뛰어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물어보니 우리 몸은 자체적으로 전기를 발생하는데 이 전기로 심장을 자극해서 계속 뛰게 한다고 합니다. 만약 불의의 사고로 심장이 멈추면 이때 강한 전기적 자극을 주어 심장에 흐르는 생체전기를 자극해서 다시 뛰게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끼까지하며.” 하나님 말씀은 마치 제세동기와 같습니다. 말씀은 나의 죽어버린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힘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그 혼과 영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빛처럼 심령에 들어오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죄와 연약함, 허물들이 찔러 쪼개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면 죽어버린 혼과 영이 다시 뛰고, 열정이 뛰고 점점 살아나게 됩니다. 겨울동안 움츠렸던 나무들에게 봄 햇살에 비추면 꽃이 피고 살아나듯, 말씀의 빛이 비추면 우리영혼이 꽃처럼 살아나게 됩니다. 말씀의 빛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방사선과를 전공한 사람입니다.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연쇄적인 핵분열을 일으켜 엄청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그 열과 빛으로 물을 대펴 터빈을 돌리고 그 힘으로 전기를 만드는 것이 원자력발전소입니다. 이처럼 말씀의 빛이 중성자처럼 내안에 들어오면 무한한 핵분열을 일으켜서 엄청난 힘이 생깁니다. 영화 아이언맨을 보셨습니까? 가슴에 소형 원자력발전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심이 품는자는 아이언맨처럼 열정과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저는 과거 운명주의와 죄의식, 패배주의에 눌려 죽은 청년처럼 살았습니다. 제가 태어나 난후 얼마뒤에 제 위로 2형이 죽었습니다. 큰형은 자살로 둘째형은 엄마의 부주의로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이 때문에 술에 취한 날이 많으셨고 그럴 때면 가족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어두운 가정에 태어났는지 하나님을 원망하며 울기를 잘하였습니다. 그래도 공부는 잘해 중학교 때 광주로 전학을 왔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너무나 외로워 게임과 정욕으로 외로움을 달래었습니다. 반면 성적은 점점 올랐고 내가 꿈꾸던 건축디자인어가 될 날이 성큼 다가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고2때 중간고사를 마치고 시골에 갔는데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있었습니다. 참다못해 아빠를 폭행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맞은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절망하여 농약을 드시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응급조치를 취해 살아나셨지만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몇 년 동안 입원치료를 받으셔야했습니다. 저는 살인자라는 죄의식에 시달려 가위눌리고, 악몽을 꾸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성적은 떨어졌고, 수능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전대 건축과에 떨어진 날 저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며 형처럼 자살하고자 맘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2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가슴에 또다시 비수를 꽂을 수 없었습니다. 맘을 추스르고 재수를 준비하였지만 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IMF가 터져 3수는 못하고 누나가 대신 써준 보건대학교 방사선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저는 해도 안 된다는 패배주의와, 내 인생은 2류도 아닌 3류라는 열등의식에 빠져 겉은 청년이었지만 패인처럼 늙은이처럼 살았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하며 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 그래서 즐기다 죽자 외치며 집에서 게임하고 술 먹고, 담배피고, 음란비디오를 보고 정욕을 채우고, 그러다 자고 그런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런 저를 보시고 대통령을 꿈꾸던 내 아들이 왜 이렇게 되었냐?, ‘이제 나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되냐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제게 예수님께서 찾아와 주셨습니다. 대학교 선배를 통해 UBF 성경공부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이 이 음성이 빛처럼 심령에 임하였습니다. 그동안 3류인생이라 치부하고 열등감에 시달렸는데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의 걸작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흑암과 공허와 혼동으로 가득한 내 삶의 한 줄기 빛이 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9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말씀은 운명주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점점 내 삶도 가능성이 있겠다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걸으라말씀은 패배주의에서 일어나고 싶다면 예수님이 도와주겠다는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는데 예수님이 회복하시면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수양회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강력하여 그동안 나를 그토록 무겁게 짓누르던 패륜의 죄의식과, 정욕의 수치심, 심판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저를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 아니요, 버림받은 인생이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인생이요, 선택받은 인생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방되었네, 해방되었네. 죄와 사망의 법에서(×2)” 저는 드디어 어두컴컴한 관에서 뛰쳐나왔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내게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기도하며 방사선학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그럴 때 X-ray를 통해 아픈 사람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싶은 비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장차 선교사를 가고자 열심히 전공과 영어를 공부할 때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수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취업이 어렵다던 전대병원에 취업을 하였습니다. 교수목자의 비전을 주시고 석사, 박사까지 되게 하셨습니다. 서먹서먹한 아버지와의 관계도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의 음성을 들을 때 용서할 수 있었고, 아버지와 화해를 하고 함께 예배를 드리는 축복도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런 저를 보고 어머니는 내 아들이 변했다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최근 가정에서 폭력남편이 되어 주님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십자가말씀도 전하고 회개하였지만 치료되지 않는 아내의 상처에 폭력남편이라는 주홍글씨로 교회에서서 집에서나 힘든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목자로서, 파트 장으로서 양들을 도울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럴 때 보건대를 7년 동안 개척하였지만 리더들과 양들이 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또다시 패배주의에 빠져 관속에 누워 지내길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이 말씀이 심령에 임했습니다. 오디오 성경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은헤받은 말씀을 수첩에 적고 그 말씀대로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조금씩 말씀이 내 안에서 빛처럼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울지 마 내가 책임져 주겠다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그러던 중 장인어르신이 심장판막이상이 생겼습니다. 기도하고 전도를 하였고 장인, 장모님이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장인 어르신이 소천 하였지만 처가식구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20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프레어사모님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싸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음성을 들을 때 그동안 캠퍼스에서 하나님께 드린 진심과 헌신이 결코 헛되지 않고 반드시 열매를 거두리라는 믿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건대 양들을 섬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아내는 제게 목자님 예수님이 목자님 용서해주셨데, 목자님이 귀한 종이라 하셨대!” 라는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동안 나를 억누르던 죄짐이 풀어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습니다. 무덤과 같던 가정에 가정예배가 회복되고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과거 영적으로 죽어 시체처럼 살던 이자를 찾아와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며 일어나 걷는 인생으로 축복하신 예수님을 할렐루야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소망과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청년답게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 빛 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5:25은 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하나님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언제 들어야합니까? 곧 이때라, 지금들어야한다. 자꾸 들어야한다. 매일 들어야한다. 들을 때 살아납니다. 봄이 되었습니다. 만물이 봄 햇살에 생명력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와 생명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