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7

                                                                                영적 지도자의 길

말씀: 누가복음 9:46-62

요절: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최근에 여러 나라의 대선을 보면서 우리는 참된 지도자란 어떤 자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할 영적 지도자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시대를 이끌어나갈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무리와 지도자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무리는 별 무리 없이 리더를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항상 공동체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투철한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음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들이 영적 지도자의 내면성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첫째, 소자 한 사람을 감당하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46절을 봅시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예수님 일행이 점점 예루살렘에 가까워 오자 제자들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헤롯정권을 무너뜨리시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왕이 되실텐데, 누가 제 2인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누가 큰가?” Who is the greatest? 오늘날 사람들도 누가 큰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언론에서는 누가 큰가?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인가? 끊임없이 여론조사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 지위, 집안배경, 재산정도, 연설능력, 외모등등. 여러 가지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누가 큰가? 도토리 키재기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심부름을 제일 많이 시키시는가? 예수님이 질문하실 때 누가 가장 대답을 잘 했는가? 등등. 이런 저런 기준으로 토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47,4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예수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이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약하고 유치합니다. 어린 아이는 실수가 많고 잘 삐칩니다. 어린아이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오랜 인내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맡아서 돕는 것을 아주 힘들어 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손주 손녀들도 영접하고 보살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손주들이 오면 반갑지만, 돌아가면 더 고맙다고 말합니다. 양들도 어린아이같이 문제 많은 소자 한 사람을 감당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양들의 푸념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수시로 약속을 어기지만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학과공부 문제, 건강문제, 장래문제, 결혼문제까지 도와 주어야합니다. 어떤 양은 도움을 받아 놓고도 일이 잘 안 풀리면 괜히 목자 탓을 합니다. “목자님이 괜히 날 핏싱해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다고 말합니다. 이런 소자 한 사람을 소망 두고 키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수없이 애간장이 녹고, 속이 탑니다. 그래서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일을 잘 안 할려고 합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수많은 무리들을 한순간에 사로잡는 영웅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귀히 여기고 끝까지 감당하는 자가 정말 위대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박드보라 사모님은 군대간 뒤 소식이 끊어졌던 김지환 형제를 다시 만나서 일대일 관계성을 맺었습니다. 소원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던 양입니다. 사모님은 2년 뒤면 70세입니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철없는 양을 데리고 밥 사주고, 일대일을 합니다. 그 양이 변화되리란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무지 가운데 있는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끝없이 섬깁니다. 우리 UBF목자님들은 다 이런 자세로 소자 한 사람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 목자님들이 가장 위대한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또 예수님은 48b절에서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자, 자기를 자랑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사람, 말없이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자. 그런 사람이 큰 자입니다. 며칠 전 개봉되었던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191232세에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미국에서 간호학공부를 하고 MBA까지 취득한 엘리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한국에 와서 소외된 자들을 말없이 섬겼습니다. 애 못 낳는다고 버려진 여인들, 무식하다고 쫓겨난 여인들, 고아들을 데려다가 성경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11명의 여자아이들을 양녀로 삼고 친딸처럼 섬겼습니다. 나환자, 거지들, 각종 병자들을 친자식처럼 씻기고, 먹이고, 입혔습니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한복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섬기다가, 54세에 영양실조로 천국에 갔습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소천했을 때 온 광주시민이 몰려와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어머니, 우리는 어떻게 살아요?” 이 분은 우리 배사라 선교사님의 롤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책상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란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성공을 위해 몸부림칩니까? 큰 자가 되어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영광과 특권을 누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말 위대한 자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자이십니다. 왜 크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가장 낮고 천한 마굿간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이 이처럼 섬기는 삶만 사시다가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에 비참하게 끝났습니까? 아닙니다. 빌립보서 2:9-11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낮은 자가 되셨을 때 하나님이 가장 높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진정 위대한 자는 소자 한 사람을 감당하는 자요, 낮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섬김을 배우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을 포용하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49절을 봅시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사실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수님 이름이 드러나고, 귀신들린 자가 자유케 되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나 요한은 그 사람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을 금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편협했습니다. 귀신 쫓아내는 일이 자기들만의 전매특허인 것처럼 텃세를 부렸습니다. 요한은 우월감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사용할려면 로열티를 내든지, 자신들에게 신고를 해야지, 버릇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5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예수님은 그들을 제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비방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역사를 방해하는 자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귀신 쫓아내는 것이 제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마음을 넓혀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아이어도 하나님 역사가 이루어지면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임, 여러 사람을 사용하셔서 복음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만 주의 역사 하는 것처럼 특권의식을 가지면 안 됩니다. 다른 모임도 존중하고, 동역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년에 복음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자 어떤 빌립교 교회 성도들이 투기와 분쟁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갇혔으니 이 기회에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의 주도권을 잡자이때 바울은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5,18)”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서 어떤 사람도 영접했습니다.

 

51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고자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거부감을 나타냈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 사이에 지역감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야고보와 요한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그들은 감히 우리를 몰라보고 홀대해하면서 사마리아 땅을 불바다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죠. 사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럴 능력도 없습니다. 불 아니라 비 한방울도 내리게 할 수 없습니다. 괜히 예수님 옆에서 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등에 업고 자기들을 과시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서운한 일을 당해도 혈기나 감정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자도 참고, 용납하며, 인내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사랑장>에 보면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때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뚜껑이 열릴 것 같아도, 참아야 합니다. 진정 위대한 자는 혈기와 감정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잠언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상처를 많이 입으셨습니다. “당신은 유대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 좀 달라 하나이까?”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자존심을 팍팍 긁었습니다. 이때 만약에 예수님이 감정적이 되셔서 당신, 전 남편 5명의 이름을 공개하겠어이렇게 하셨다면 여인은 마음을 닫고 도망가 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참고 인내하셨기 때문에 여인이 영생수되신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이 사마리아 땅에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겸손과 인내가 승리의 길입니다.

 

셋째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진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57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얼마나 귀하고 소망스런 제자 후보감입니까? 제자 한 사람 세우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스스로 제자의 길을 가겠다고 소원하니 크게 칭찬해 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5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예수님은 이 사람이 소원있는 것은 좋지만 너무 환상적인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 따라 다니면 자기도 유명인사가 되고, 출세할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그렇게 환상적이거나 탄탄대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험한 십자가를 지셔야만 합니다. 양들을 돌보다 보면 자기 생활이 없습니다. 때로는 끼니도 걸러야 하고, 잠자리도 불편합니다. 인기스타들처럼 돈을 많이 벌고 안정되게 살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아픔의 길이요, 희생의 길입니다. 이런 희생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나그네 철학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많은 것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가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했습니다. 장망성(장차 망할 성). 예수님의 제자는 이 땅에 대한 환상적인 기대를 갖기보다 하님 나라에 대한 순수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59절을 봅시다. 또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저하며 말했습니다.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61절에서도 비슷한 사람이 나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이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소원은 있지만 먼저 할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먼저 가족을 작별하게 하소서아버지 장례식을 치루는 일, 가족과 작별하는 일. 다 중요한 일이죠.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야지. 먼저 장례식 치르고 오세요” “먼저 가족과 작별하고 오세요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먼저 장례식 치르고, 먼저 가족 작별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일들이 계속해서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공부하자고 하면 먼저 리포트부터 쓰구요합니다. 리포트 끝나고 나면 먼저 기말고사 보구요기말고사 끝나면 먼저 방학때 전국일주 여행하구요여행 끝나고 나면 동아리 엠티 갔다 와서요” “졸업하고 나서요” “취직하고 나서요” “결혼하고 나서요계속해서 이런 핑게, 저런 핑계로 미룹니다. 나중에는 영적인 소원이 아예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6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장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전파가 그만큼 시급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 전파는 가장 먼저 감당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우리가 사명인으로 살고자 할 때 이런 저런 걸리는 문제, 아픔들이 있습니다. 이때 가족의 일을 앞세우면 하나님 나라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주말부부 하면서 사명을 감당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김다니엘-사라 목자님 가정. 구바나바-안나 목자님 가정. 기대연-이숙 목자님 가정. 신스데바나-선미 목자님 가정, 김권능-준경목자님 가정, 스터드 갈렙 김- 에스더 목자님 가정.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모님들이 남편 따라 외지에 가서 살면 편하고 좋습니다. 거기에 UBF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주말부부생활하면서 헌신하고 있습니다. 김준경 목자님은 결혼해서 2년 동안 같이 살고 그후 3년 동안은 주말부부하면서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온유가 미숙아로 태어나고, 하준이가 혈소판 감소증으로 입원할 때 동역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면서 김민서 형제를 영적인 아들로 키우고, 헌신적으로 복음역사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먼저 가족만을 앞세우지 않고 사명중심의 삶을 살기 때문에 생명구원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명을 앞세우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주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또 예수님은 6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62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농부가 일단 손에 쟁기를 잡았으면 밭 가는 일에 집중해야만 합니다. 앞에서 소가 쟁기를 끄는데 뒤에서 농부가 자꾸 뒤 돌아보고, 이 곳 저 곳 쳐다보면 똑바로 쟁기질을 할 수 없습니다. 밭이 삐뚤삐뚤 갈아지고 엉망이 됩니다.

 

저는 몇 년 전, 경부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데 차가 너무 막혔습니다. 계속해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습니다. 너무 지루해서 여기저기 옆에 풍경을 구경하는데 갑자기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제가 앞 차를 들이 받은 것입니다. 앞차의 범퍼를 들이 받아서 25만원을 물어 주었습니다. 앞차 운전사인 할아버지가 내리더니 제게 호통을 쳤습니다. “젊은 사람이 어딜 보고 운전하는거야. 한 눈 팔지 말고 집중해야지꼭 성경말씀 듣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쟁기를 잡은 사람입니다. 지나온 날을 그리워하며 뒤돌아보면 안 됩니다. 이전 일들에 대해서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13,1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소돔과 고모라 심판때 하나님께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가 집에 두고 온 물방울 다이어가 아까워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19:26). 사명인의 삶을 출발한 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복음성가에서도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했습니다. 저희가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그날까지 오직 눈을 예수님께 고정시키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어떤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인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인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 소자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섬기는 자가 진정 위대한 자입니다. 나와 스타일이 다른 사람도 영접하고 품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자기 일에 얽매이지 않고, 사명 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사명인의 길을 끝까지 가서 천국에 입성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