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말씀 : 누가복음 1322-25

요절 : 누가복음 1324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세상은 점점 쉽고 편하고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어려운것보다는 쉬운 것을 힘든것보다는 편한 것을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떻게든 쉽게 돈을 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로또는 아직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비트코인이라는 가상화폐로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터치 한번으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고 돈까지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편리해진 대신에 스마트폰 중독으로 대화가 단절되고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쉽게 음란물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확천금을 바라고 비트코인에 투자하여 패가망신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좁은문이 나옵니다. 좁은문의 반대는 넓은문입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편하고 빠르고 재밌고 자극적인 넓은문 만을 만들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더 넓은 문에 들어가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좁은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힘들게 좁은문에 들어가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좁은문에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사람들이 가고자하는 넓은문은 멸망과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좁은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고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각 성 각 마을로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예루살렘을 여행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 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 사람은 왜 갑자기 이렇게 쌩뚱맞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에게 거룩한 율법도 주셨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할례도 주셨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저 이방인들은 지옥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자꾸만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 못마땅하였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그 때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시며 그들도 죄를 범하면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다 구원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구원받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궁금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는 2015년 통계에 의하면 약 967만명으로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 통계에는 선데이크리스천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일요일에 교회만 다니지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아갑니다. 세상사람들과 생각하는 것 좋아하는 것 소망하는 것 모두 똑같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일요일에 교회만 나갑니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사람도 기독교인으로 인정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정하는 기독교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합니다. 그래서 방금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은 구원 받는 사람이 많다 적다 몇 명이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24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여기서 좁은문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9절에 따르면 에수님은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내가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한복음 14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들어가려고 하는데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몸을 웅크려야하고 머리가 부딪히기도하고 매우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러나 넒은 문은 편하게 서서 걸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좁은문을 싫어합니다. 본능적으로 넓은문을 좋아합니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요즘은 비트코인이 열풍입니다. 얼마전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비트코인에 관해서 방영한적이 있습니다. 방송의 목적은 당연히 비트코인의 위험성을 알리고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것을 막고자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비트코인으로 대박난 사람을 몇 명 소개했습니다. 그 중 한명은 비트코인을 5년전에 단돈 14만원을 주고 샀는데 현재는 무려 280억 무려 2만배나 올랐습니다. 방송중 10분만에 또 30억이 올랐습니다. 방송피디도 혀를 내두르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듯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렇게 대박난 사람은 극히 일부이지만 이 사람때문에 비트코인을 막고자한 방송이 오히려 비트코인을 부추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쉽게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눈에는 절대 좁은문이 보이지 않습니다.

25절을 읽겠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좁은문 구원의 문은 항상 열려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리고 우리의 생이 끝나면 닫혀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때 닫힌 구원의 문을 두드리느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그는 다른 건 몰라도 구원의 문이 여기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차갑습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문 두드리는 사람은 분명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모른다고 하십니다. 길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반갑다고 아는척을 합니다. 그런데 그사람은 누구세요?” 라고 했을 때 참 난감합니다. 나는 그사람을 알지만 그사람은 나를 모를 때 너무나 비참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잘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구원의 기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까지 모두 드려다 보십니다.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하셨습니다. 행동 하나하나 다 보십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행동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똑같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모른다고 하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였어도 음란에 넘어지고 돈에 넘어진다면 하나님은 그를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잘 알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24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우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힘쓰라는 말은 영어성경에서 make every efforts입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전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좁은문은 예수님이십니다. 항상 예수님을 내 안에 두고자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는 것이 곧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하고 양식을 먹고 파트모임을 이루고 캠퍼스에 나가 전도하는 것 모두 좁은문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장과 육아등 세상의 짐을 지고 십자가의 짐까지 지며 좁은문을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말씀보다 스마트폰, 드라마 보는게 더 좋습니다. 센터에 오는것보다 집에서 쉬는게 더 좋습니다. 캠퍼스에 나가 양들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보다 스타벅스에서 카페라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는게 더 좋습니다. 마태복음 713,1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넓은 문으로 가는자는 결국 자기 하고싶은대로 본능대로 죄지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멸망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면 좁은문은 이 땅에서는 비록 힘들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손해 볼 수 있습니다. 즐기는 생활을 못하고 사명을 위해 희생해야합니다. 나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에게 상처를 받아야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나의 죄악된 자아가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예수님의 성품으로 은혜와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결국 좁은문으로 가는게 죽을것같이 힘들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꼭 가야할 생명의 길 영생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마지막날에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기쁨으로 구원에 문에 들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저는 매년 늘 했던 것처럼 올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고자 다짐하였습니다. 올해 제가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것 중 하나는 요리하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라면과 후라이 말고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습니다. 물론 하나목자도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 사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주부터 제가 계속 퇴근하고 저녁에 와서 요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아직은 계란볶음밥만 4일째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뻐해주고 맛있게 먹어주는 동역자를 볼 때 저 또한 뿌듯했습니다. 사실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요리를 한다는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요리가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로 인해 동역자가 기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뭘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아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아시는지가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하나님이 너 누구니?” 하고 문을 닫아버리면 너무나 절망적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잘 알게하기 위해서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함을 깨닫습니다. 좁은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디있느냐에 따라서 좁은문에 들어가야하는지 넓은문에 들어가야 하는지 결정됩니다. 저는 내 상황이 힘들다는 이유로 좁은문을 들어가지 못하고 되도록 넓은문을 찾았습니다. 되도록 십자가 지는 것을 피했습니다. 지더라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십자가만 지고자 하였습니다. 그 십자가도 형식적으로 질 때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하나님이 나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뒤늣게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다른 목자님들은 다 천국에 있는데 나만 버림받고 심판받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동역자의 기쁨만 생각할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좁은문을 들어가기에 힘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제가 가장 힘들어하는 좁은문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새벽기도와 전도, 양식 365일 먹기입니다. 올해는 이 세가지의 좁은문을 들어가기에 힘쓰고 승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올해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며 칭찬받는 한해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