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

                                                         어느 것이 옳으냐?

말씀: 마가복음 2:18-3:6

요절: 마가복음 3: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핵심가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있지만 최고로 중요한 것이 바로 핵심가치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핵심가치는 잃어버리고 관례적으로 해 온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핵심가치를 추구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제목처럼 어느 것이 옳은가?”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질문을 해봐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리새인들은 안식일과 금식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트집 잡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의 근본정신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는 명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는 과연 옳은 선택과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가?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예수님의 심정을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금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18절을 봅시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틈만 나면 잔치를 벌이고 양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눈에는 이것이 불경건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꼬투리를 삼았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19,2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신앙생활을 혼인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가서 저는 금식중이니 식사 못하겠습니다. 사진만 찍을랍니다그렇게 말하면 신랑에 대한 결례입니다. 즐겁게 음식도 먹고, 기쁘게 축가도 불러주고, 흥을 돋구어 주어야죠. 시커먼 옷 입고 가서 심각하게 앉아 장례식 분위기 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과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 오셨습니다. 첫 번째 기적도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2). 이런 구원의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면 적극적으로 잔치에 참여하고 즐거워해야죠.

 

그러나 또 금식할 때가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말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실 때 금식해야 합니다. 내게 심각한 죄 문제가 있을 때 심령을 찢고 애통하며 금식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금식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 무용론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금식할 때가 있고, 즐거워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금식 보다 내용있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근본 마인드가 문제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21,2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생베는 신축성이 좋아서 다른 베를 잡아당깁니다. 낡은 옷은 늘어질대로 늘어져서 더 이상 늘어날 수 없습니다. 칙 늘어진 낡은 옷에다 생베 조각을 붙이면 낡은 옷을 잡아 당겨 해어지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력이 왕성해서 가스가 나와 부풀게 합니다. 그런데 낡은 가죽부대는 늘어질대로 늘어져서 더 이상 팽창하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터져서 쏟아집니다. 김장김치 비닐에 담아 베란다에 놔두면 나중에 폭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들의 낡은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생베,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생명력이 충만한 복음을 상징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낡은 전통에 사로잡혀 유연성이 없었습니다.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으니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 “옛것이 좋은 것이여그것만 외쳤습니다. “그것을 왜 해야만 하는가?” “왜 그것이 좋은가?”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집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조금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면 비난하고 정죄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새 옷,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사역은 얼마나 신선하고 감동이 있습니까? 역동적이고 힘이 있습니다. dynamic and powerful. 당시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긴 나병환자도 다가가서 손을 대며 치료해 주셨습니다(1:41,42).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지붕을 뜯고 나아온 중풍병자를 소자야, my son” 아들로 영접해 주시고 그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5)” 다른 사람은 다 배척하는 세리 레위를 영접하시고 제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식사교제를 나누셨습니다(2:15). 예수님의 메시지는 바리새인들의 교훈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너무나 깊이가 있고 감동적이며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는 어찜이냐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1:27)”예배 때마다 졸던 자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더러운 귀신들도 소리를 지르며 쫓겨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역사는 생베처럼 신선하고 역동적이었습니다. 새 포도주처럼 맛있고, 감동이 있고, 파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변화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부글부글 끓는 새 포도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가슴 벅차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을 부분적으로 수선하거나 짜깁기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예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위해 오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포도주처럼 붉은 피를 쏟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로서 진홍같이 붉은 죄를 눈같이 희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는 어떤 흉악한 죄인도 변화시키는 핵폭탄과도 같은 능력이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입양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정말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적인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 역사를 감당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하고 터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4:22-24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옛 사람을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고정관념,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도전하고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주니어 사모님들이 새 부대가 되어서 열정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기고 있어서 제가 따라가기 버겁습니다. 김준경 사모님은 전대로, 동신대로, 과기원으로, 보건대로, 치전원까지 가서 양들을 전도합니다. 그냥 몸만 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샌드위치를 준비하고, 포스트 잍에 마음이 담긴 문구를 적어 주니 양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동신대 염도관 형제가 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전옥합 목자님은 과기원에 김건우 형제를 섬기기 위해 전날부터 빵을 사서 편지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아침에 퇴근한 전순기 목자님이 빵을 먹으려 하자 안 된다고 못 먹게 했습니다. 순기 목자님은 또 여기에 순종해서 자기는 아침을 대강 먹고, 양과 일대일 하라고 동역자를 과기원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보건대 사모님들은 100명의 신입생들에게 설문지를 받아서 목자들이 나누어 일일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지난 주 점심모임에 신입생들이 11명이나 왔습니다. 주를 향한 파트는 파트모임에 학생양들이 참석하도록 파트모임 시간을 과감하게 7시로 당겼습니다. 이번 봄 MT 수양회때 각 파트들이 감동적인 장기자랑을 선보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어떤 파트는 파트 티셔츠를 맞춘다고 합니다. 작년에도 큰 은혜가 되었는데 올해도 기대가 됩니다. 우리가 이처럼 새 부대가 되고자 몸부림칠 때 새 포도주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를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지극히 교만하고, 완고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겸손하고 열정적인 복음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9:19절과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그는 자신의 율법적인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고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기꺼이 양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중국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양들을 얻고자 머리도 변발을 하고 중국 사람의 옷을 입었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도 불편한 온돌방에서 자며 김치를 먹으며 한국 학생들과 동거 동락하셨습니다. 지난 주 인도에서 온 장디모데 선교사님은 유명한 IIIT 대학 교수입니다. 그러나 양들을 얻기 위해서 토요일마다 양들을 초청해서 직접 요리해서 먹였습니다. 그 시간에 양들은 소감을 써서 발표하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양들을 섬기자 20명이던 인도 역사가 40명대로 성장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역사는 이처럼 항상 새 포도주와 같이 신선하고 역동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구원역사를 감당하기 위해 끊임없이 심령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양들을 살릴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고민하고 기도하고 시도해 봐야 하겠습니다. 새부대가 됩시다.

 

둘째로, 안식일 문제입니다. 23절을 봅시다.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다보니 배가 고팠던 모양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또 꼬투리를 잡았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서 추수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일로 보기 힘든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제자들이 밉기 때문에 일로 몰아 붙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 말씀을 근거로 제자들을 변호하십니다. 다윗과 추종자들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아달 제사장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일행에게 주었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보면 이것은 큰 죄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고, 사울에게 부당하게 쫓기고 있기 때문에 아비아달은 이를 허용한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십니다(12:37).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일군들입니다. 그러므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안식일의 본래 의미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27,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안식일은 본래 무리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쉼을 주기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복잡한 안식일 규례를 만들어 사람들을 오히려 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악용하는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죄 때문에 안식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3:1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 거기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손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중요한 일은 대부분 손으로 합니다. 그것도 두 손을 다 사용해야 효과적으로 일 할 수 있습니다. 한 손을 다쳐서 한 손으로 세수할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운동 할 때도 한 손을 다치면 동작이 나오지 않습니다. 행진할 때도 보무도 당당하게 두 손을 휘저어야 보기에 좋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 손이 말라 버렸으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도 자의식이 들었습니다. 직장에 지원을 해도 서류에서는 통과하지만 면접에서 떨어졌습니다. 장가도 가기 힘들었습니다. 그는 마른 손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주로 구석지에 자신의 몸을 숨겼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한 손 마른 친구가 있었습니다. 여름에도 짧은 팔 옷을 입지 못했습니다. 체육시간에도 혼자 교실을 지켰습니다. 달릴 때도 성한 손으로 마른 손을 가리고 달리는 모습이 정말 안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2절을 봅시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그들은 오직 이 사람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하고자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한 손 마른 자는 오직 예수님을 책잡는 미끼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속셈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과감하게 도전하셨습니다.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예수님은 이 사람을 공개적으로 치료해 주고자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공개적으로 질문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조건 가만있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예수님을 제거할 모의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선입니까? 이것이 옳습니까? 몸을 움직여 일하지 않았으니 안식일 법을 잘 지킨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큰 악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한 손이 말라서 안식이 없는 한 불쌍한 영혼에게 참 안식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의 생명을 살리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선이요, 안식일의 본래정신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잠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듣고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과연 내가 옳은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결코 자신들이 옳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속셈이 드러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어느 것이 옳으냐?”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시는 주님의 동일한 질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무엇이 기준입니까?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 그것이 기준입니다. 이것이 핵심가치입니다. 자기편에서 유리하게 해석하지 말고, 하나님편에서 볼 때 무엇이 선인가? 어떻게 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가? 이것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장발장이 신부님 집에서 은쟁반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에 잡혀왔습니다. 신부님은 장발장을 절도범으로 신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 왜 은촛대는 가져가지 않았나?”하면서 은촛대까지 주었습니다. 법대로 하면 그를 고발하는 것이 옳지만 신부님은 오히려 은촛대까지 주었습니다. 장발장이 풀려나서 나중에 물었습니다. “왜 제게 이렇게 하십니까?” 신부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사기 원한다네. 자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릴 수만 있다면 이 은쟁반 은촛대가 아깝지 않네결국 신부님의 법을 뛰어넘는 사랑이 장발장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무엇이 옳은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예수님은 그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손 마른 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봅시다. “네 손을 내밀라” stretch your hand. 그러자 그 사람이 자기 손을 내어 밀었습니다. 그때 그의 손이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말라버린 손에 신경이 살아나고 피가 돌았습니다. 어린아이 손처럼 조막손이던 그의 한 손이 다른 손과 똑 같아졌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그 사람은 너무나 기뻤을 것입니다. 손이 말랐을 때 그의 기쁨도 말랐습니다. 그의 꿈도, 미래도 말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손이 회복되었으니 모든 것이 회복되었습니다. 기쁨이 회복되었습니다. 희망찬 미래도 회복되었습니다. 직장에도 취직하고, 장가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랑스럽게 두 손을 쳐들고 박수도 힘있게 칠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순종한 것 뿐입니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하시자 일어섰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하시자 손을 내밀었습니다. 창피하다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마른 손은 내밀지 못하겠다고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어섰습니다. 믿음으로 병든 손을 내 밀었습니다. 그때 손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회복되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음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능력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손 마른 요소가 있습니다. broken family의 아픔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열등감, 미움, 시기심, 숨은 죄 문제 등등. 여러 가지 한 손 마른 요소가 있습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명랑한 척 떠들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픈 상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수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내어밀면 주님께서 능히 치료해 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1888년 일본 고베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관리였지만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본 부인의 자녀들에게 많은 수모를 당했습니다. 거기다 자기를 사랑해 주시던 어머니가 4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도 5살 때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는 조실부모한 고아요, 기생의 아들이라는 운명이 한 손 마른 요소가 되었습니다. 수치스런 가족사 때문에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12살 때 구세군들이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그 아이는 용기를 내어 다가가서 물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기생의 아들도 사랑하십니까?” 그는 자신이 기생의 아들이라는 한 손 마른 요소를 용감하게 주님께 내어 밀었습니다. 그때 구세군 전도자가 말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죄수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도 용서하셨습니다이때 그 아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그의 병든 마음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마음의 운명과 슬픔이 치유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그는 자기보다 불우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돕고자 하는 불타는 목자의 심정이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결핵환자들, 빈민촌 사람들, 각종 소외된 자들을 섬기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일본의 성자라 불리우는 가가와 도요히코(1888-1960)목사입니다. 예수님께는 어떤 부끄러운 과거도, 수치스런 죄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 손을 있는 모습 그대로 내어 밀면 주님께서 온전히 회복시켜 주십니다. 십자가 보혈로 씻으시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해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율법의 본래 정신을 실천하시는 선한 목자요,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리의 어떤 병든 요소도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어느 것이 옳으냐?” 우리는 수시로 자문해 보아야 하겠습니까? “어느 것이 옳은가?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살리는 것과 생명을 죽이는 것.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겠는가?” 나의 스타일과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내려놓고 진정으로 선한 것, 정말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봄학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와 일대일 역사에 힘을 써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힘써 이루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