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2 (곽아브라함)

                                                                                   산 자의 하나님

 

말씀: 마가복음 12:18-27

요절: 마가복음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가끔 식당을 가 보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꽃이 꼭 살아 있는 생화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조화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실망하고 맙니다. 그 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이고 그럴싸해도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기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꽃은 이처럼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 우리 인생도 그럴싸하게 보여도, 그 내면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산 믿음이 없다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감동도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늘 한계적인 생각으로 죽은 자 같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름은 그럴싸하고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믿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도 점검해 봅시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죽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본문말씀을 통해 산자의 하나님을 온전히 영접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생기 나고, 싱싱하고, 아름다운 향기도 내는 생화와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불볕더위에도 오히려 더 뜨겁게 더 열정적으로 믿음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겉으로 볼 때는 산 자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은 죽은 자인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사두개인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인들이 세 부류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고수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습니다. 둘째는 엣세네 파로서 타락한 세상을 거부하고 자기들 공동체를 만들어 수도사같이 사는 은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셋째가 사두개인들로, 그들은 모세오경을 믿으면서도 세속 권력자들과 적당히 타협하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논리는 하나님을 믿으면 현실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정치권과 결탁해서 종교정치를 일삼았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이 대부분 사두개파였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지만 현실 권력과 야합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이권을 챙기는 등 많은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때문에 사후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담되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는 것이 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5,26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시며 실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또한 이 땅의 삶보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19,20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요한복음 5:29절에선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시며 심판도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러니 현실에만 만족하며 잘 살고자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서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부활을 부정하고 내세가 없어야 할 것인가?. 고민 끝에, 한 가지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다같이 20-23절을 보겠습니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 이까?”.

 

당시 이스라엘에는 계대결혼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결혼했는데 자식이 없이 죽으면 가문을 보존하고, 과부된 여자의 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사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이런 일이 한 가정에서 7형제 사이에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장남이 결혼했는데, 상속자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형수를 취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도 어느 날 고속도로 운전 중 차 화재로 죽고 말았습니다. 셋째가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이태리 신혼여행 중 다리붕괴로 죽고 말았습니다. 넷째가 형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암으로 죽었습니다. 다섯째가 형수와 또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여섯째는 심한 화병으로 죽었습니다. 일곱째도 형수와 살다가 어찌어찌해서 죽었습니다. 하여튼 이 여자와 결혼하면 이상하게 일찍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7형제가 죽고 여자만 남았는데, 나중에 부활하면 누가 이 여자의 남편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 할 때 한 여자를 두고 일곱 형제가 싸우게 되는 아내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차라리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 치고는 너무 수준이 낮고 유치합니다.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한 이야기입니다. 소위 성경박사들이 만들어낸 이 내용은 세계 여덟 번 째 에 해당하는 불가사의 급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해외토픽이나 나올법한 그들 이야기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둡고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비극적입니다. “부활이 없다라는 잘못된 생각 즉, 죽은 믿음에 기초하기 때문에 슬프고 희망이 없습니다. 허무합니다. 비참합니다. 이처럼 이 세상 어느 것, 부활이 없는 기초로 만들어진 책이나 영화를 보면 슬프고 어둡습니다. 이유 없이 비를 좋아하게 만들고, 희극보단 비극을 동경하게 합니다. 부활의 기초가 없는 삶도 그렇습니다. 죽은 자처럼 늘 생각이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잘 절망합니다. 우울하고 슬픈 음악을 주로 좋아합니다. 저도 과거에 그랬습니다. 부활이 없는 삶을 살 때 주로 저의 18번은 김창완의 청춘이었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는 축 쳐지고 허무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기초한 삶을 살 때 저의 18번은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찬송가 182장입니다. 듣기만 해도 절로 어깨춤이 나오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보면 사두개인처럼 부활과 영생, 심판을 아예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각가지 희귀한 논리를 늘어놓으며 영적세계를 부정합니다. 어떤 형제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후보다 불공평한 현 사회부터 뜯어 고치셔야 한다고며 삐딱하게 따집니다. 전도할 때 어떤 양은 공부하기도 바쁜데 부활이 밥 먹여 줍니까?” 하며 레이저를 쏩니다. 저희병원 진료원장 중에 한분은 부활과 영생을 얘기하면 농담으로 여깁니다. 이 세상에 즐길 것도 많고 바쁜데 내세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냐며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이 세상에서 원 없이 누릴 것이기에 심판의 때가 와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개똥철학논리를 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세상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합니다. 육신적인 삶에만 열중하는 일차원적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요즘 먹방이 유행합니다. “나 혼자 산다가 인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온갖 잘못된 것만 보고 불평, 불만이 가득한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살아갑니다. 나만 힘들다는 피해의식 속에 우울증으로 고통 합니다. 젊은이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논리로 위로해 보지만 청년실업 앞에 절망합니다. 잦은 실패의식, 해도 안 된다는 운명적 생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권을 꿈꾸던 자가 정욕을 이기지 못해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하기도 합니다. 스마트 폰에 시간을 뺏겨 귀한하루를 얼빠져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참 기쁨이 없고 살 의욕을 못 느낍니다. 늘 소극적입니다. 부정적입니다. 그런데 이러는 것은 그들 마음이 그만큼 어둡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들처럼 죽은 자로서 부활믿음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은 하지만 부활, 하나님 나라의 상급, 마지막에 있을 심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 그저 자녀들 공부 잘하고, 남편 승진 잘 되고, 가족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아멘!” 합니다. 기도제목이 자기와 현실문제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장차 부활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상급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삶에 게으릅니다. 정말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양성하는 삶에 인색합니다. 태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믿음으로 한 캠퍼스를 개척하고, 척박한 오지라도 주님이 나가라 하시면 세계 어디든 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다면 하나님을 현실의 상자 속에 가두고 사는 현대판 사두개인은 아닌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이는데 이를 어둡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치 않고 또 도전하며 활기차게 살아갑니다. 더 꿋꿋하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며 자신감 백배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히려 나보다 남을 더 챙기며 돌아봅니다. 주니어사모님들처럼 목자로 살지 아줌마로 살지 않습니다. 끝엔 승리할 그날을 소망하며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사명을 놓지 않습니다. 현대판 사두개인의 삶을 과감하게 거부합니다. 이는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고 부활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급을 보는 산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본과 1학년 때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저는 약리학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수업도 이해가 잘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약리학 첫 시험을 며칠 앞두고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공부가 전혀 안되었습니다. 의대공부에 자신감이 사라지고 포기하고자 하였습니다. 일 년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자 했습니다.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이를 아신 이 여호수아 목자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9;23) 는 말씀을 주시고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인턴목자님을 제게 붙이시고 휴학계를 내는지 철저히 감시 시키셨습니다. 전 맘대로 휴학도 못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시험포기를 포기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빈 머리로 약리학 시험장엔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거의 백지를 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입니까?. 며칠 후 196명중에 8명만이 통과하고 나머지 모두 재시험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때 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느꼈습니다. 저를 눈동자처럼 보고 계셨던 부활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순간 온몸이 감전되듯이 전율을 경험 하였습니다. 이후부터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만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다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무조건 달달 외우도록 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 공부하였는데 재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구사일생 이었습니다. 상급되신 하나님이 믿음도 주시고 약리학 시험도 통과하는 보너스도 주셨습니다. 물론 그 후 4년 동안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말씀만을 붙들고 아무리 힘들어도 믿음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고 나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9880, 의사면허를 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섬세히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두개인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다같이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우리가 성경을 보면 부활에 대한 말씀을 분명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는 죽은 과부의 아들들을 살렸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마른 뼈 환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을 봅시다. 그는 백세가 되어 죽은 자와 방불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 보면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19)”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믿는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로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17). 이처럼 아브라함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또 히브리서 11:19절에 보면 아들이삭을 바칠 때 그는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했습니다. 다니엘 3,6장에서도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가고, 다니엘의 세 친구가 기꺼이 풀무 불에 들어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에게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부활신앙을 체험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두개인들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그들은 철저히 오해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천사들과 같이 된다고 하십니다.

 

다 같이 26, 27절을 읽겠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에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은 사두개인들처럼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그런 자들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입니다. 박제된 하나님입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호랑이를 박제해서 유리관속에 넣어 놓습니다. 호랑이가 입을 짝 벌리고 있어서 얼른 보면 무섭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분명히 호랑이는 호랑이인데 죽은 호랑이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만 호랑이기에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마치 그들의 신앙이 이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박제된 신앙이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믿음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피도 흐르지 않고 심장도 뛰지 않는 죽은 신앙입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무슨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실로 하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이 죽은 것이요, 그들의 사상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두개인처럼 부정적인 생각이나 하고 부활이 없다고 하는 불신적인 자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처럼 믿음이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기 3:6절 말씀을 보면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두 현재형을 사용하셨습니다. “I am the God of your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라 하셨습니다. ‘I am’ 모두 현재형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400년이나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소개하신 것은 하나님이 현재,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도 지금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I am’ 입니다. 지금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이삭시대에도 야곱시대에도 살아계십니다. 모세시대에도 변함없이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에도 항상 ‘I am’ 입니다.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항상 살아 계시고, 항상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항상 살아 있습니다. 또한 장차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부활하게하사 영원히 산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나 영원토록 산자의 하나님 이십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의 하나님 이십니다.

 

요한 웨슬레가 어느 사역 초년병시절 미국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옥스퍼드를 나와서 나름대로 많은 학식과 성경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큰 역사를 이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완전히 실패하고 실의에 젖어 영국에 배를 타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뜻밖에 풍랑이 일어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웨슬레는 두려움에 떨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주여 제가 목회활동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는 것 입니까?” 그런데 어디선가 힘찬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 우리는 가네, 이 풍랑 때문에 주님 앞에 빨리 가네, 주께서 주시는 평화의 가슴을 품은 채 우리 주님께 나아가네, 그 땅에는 평화가 있네, 기쁨이 있네. 오 하나님 감사 합니다그들은 모라비안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웨슬레는 옥스퍼드를 나온 엘리트 목회자였습니다. 성경지식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반면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아무 타이틀이 없었습니다. 성경지식도 웨슬레 보다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었습니다. 실제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현재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웨슬레 에게는 부활신앙이 없었습니다. 이론적인 믿음은 있지만 실제적인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똑같은 상황 앞에서도 떨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그가 얼마나 실제적인 믿음이 없는 죽은 자인가 발견하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론적인 신앙을 회개하고 현재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파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이로서 영국 가운데 큰 부흥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부터 살아계신 하나님, 산자의 하나님을 믿을 때 능력 있는 인생, 역동적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두개인 들처럼 반쪽짜리 신앙, 오해하는 신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으 려면 제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죽은 자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항상 스피릿이 충만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사조 같은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야말로 그는 산 자였습니다. 그가 그처럼 산 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부활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당하기 직전에 쓴 디모데후서 4:6-8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 그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의의 면류관을 쓰고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생각할 때 조금도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청년의 스피릿으로 복음역사를 진두지휘하며, 이 곳 저 곳에 흩어져 있는 복음의 동역자 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정말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부활이요 상급되신 하나님은 또한 저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저는 과거 허무주의 세력에 빠져 죽어 있던 자였습니다. 7살 때 의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동 허무주의가 일찍 찾아왔습니다. “무엇을 하든 죽으면 끝이거늘하는 염세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음권세 앞에 맥없이 슬프고 절망적인 생각에 잘 빠졌습니다. 이런 인생을 하나님은 대학 2학년 때 말씀공부를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제 인생을 살리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저의 허무한 인생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천사도 흠모하는 캠퍼스목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을 통해 살맛나는 인생으로 제 2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이요 상급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의대 4년 동안 전공공부하고 양과 일대일하고 요회역사도 섬기는 팔방미인이 되었습니다. 시험기간일지라도 똑 같이 생활 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과생들은 제주도다 해외다 여행갈 때 저는 어김없이 수양회말씀강사로 훈련받고 양과 복음역사를 섬겼습니다. 졸업 후엔 병원 채려 준다는 건설회사장 딸과 선자리가 있었지만 목자로 살고자 거절하고 믿음의 결혼을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용광로와 같은 수련생활 중에도 의대복음역사를 지속적으로 섬겼습니다. 전문의가 되어 5년 동안 강진에서 외지학사로 살 때는 다른 과장들처럼 그곳에서 지내며 생활인으로 살고 싶었지만 주말이면 광주에 올라와 주니어학사팀 과 양들을 말씀으로 섬기는 사명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14년 동안 정읍에 매일 출퇴근하며 뭇별파트와 캠퍼스복음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2년 전에는 뇌경색으로 쓰러져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 하였지만 이것이 사명인의 삶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살려주신 은혜에 더 감사하여 캠퍼스 양들과 일대일하고 의대후배들을 영적으로 돕는 것이 가장 행복하며 감사하다 살고 있습니다. 병원에서 영적서원 있는 자를 찾아 말씀공부하고 복음전하는 것이 가장 값지다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허무의 세력에서 구원해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현재 제 하나님이 되셔서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도 이 살아계시고 상급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사도바울과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2, 3세들을 목자들로 키우고 양들을 제자양성 하는 캠퍼스목자가 되고 싶습니다. 얼마 전 아들 아브라함이 현숙한 믿음의 여인 건화 목자와 캠퍼스 가정교회를 이루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뻤습니다. 지금 영남 센타에서 3주에 한 번씩 주일 점심식사를 섬기면 헌신하고 있다고 해서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 기쁨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 저를 통해 기필코 12가정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씀묵상을 게을리 하고 새벽기도를 쉬고 있었는데, 이를 회개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붙들고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상급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날마다 사두개인적인 삶을 살피고 물리치겠습니다. 제가 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제 가을학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아무런 열매도 없이 한해를 보낸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벌써 절망할 수 있습니다. 난공불락 같은 전공 앞에서, 취업 문제를 놓고, 건강 때문에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문제로, 직장일 때문에 힘들다 할 수 있습니다. 제자양성 실패로 어두운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 이니라하나님은 항상 살아계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아브라함이 100세 되었을 때 아들을 주셨다면 지금 나에게도 소원 있는 양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근 가운데서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라면 왜 내 인생과 장래를 책임지시지 않겠습니까? 사기꾼 같은 야곱도 이스라엘 12지파 아버지로 변화시키고 키우신 하나님이라면 왜 나를 변화시키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 주님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놀랍게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