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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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39강
하나님을 바로 알자
말씀: 마태복음 22:15-46
요절: 마태복음 22: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아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시고 광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담을 수가 없다” 유한한 인간이 감히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높은 버전에서 만들어진 파일을 낮은 버전의 프로그램에서 읽어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하고 작은 지식으로 감히 하나님을 재고 따지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삼차원, 사차원, 무차원의 고차원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겨우 일차원, 이차원의 세계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이해한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트집 잡기 위해서 아주 애매한 질문을 가지고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주 지혜로운 대답으로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의 세계가 어떤가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이 이 땅과 하나님 나라에 이중시민권을 가진 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15절을 봅시다. 가장 먼저 나아온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질문을 하기 전에 아주 교묘한 말로 예수님을 치켜 세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이다” 그들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예수님을 칭찬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당시에 유대사회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정부에 세금 바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또 세금을 내지 않았다가는 로마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로 이 애매한 사안을 가지고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양칠 생각은 안하고 항상 이런 것만 연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함을 아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이들의 이중적인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을 회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1절을 보십시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신자들에게는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두 왕국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세상나라만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는가? 이 세상의 문제만 가지고 예수님의 사상을 검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말해 주십니다. 우리신자들은 이 세상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의무도 다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사명도 다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이중 시민권자로서 균형 잡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적인 생활은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직장상사들이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별로 존경하지도 않고 마음을 다해서 직장생활을 하지도 않습니다. 퇴근시간만 되면 상사들이나 주변 동료들이 뭘 하든 말든 퇴근해 버립니다. 학교공부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학점이 시들시들 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나라에 발을 딛고 사는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각 직장의 일원으로서, 학생으로서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등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단지 이 세상 나라가 상식에 벗어날 정도로 불의한 정권일 때는 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칼빈은 그 나라가 극단적으로 잘못 나갔을 때는 백성들이 저항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중세시대나 히틀러정권과 같이 극단적으로 잘 못 나갈 때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우리가 사사건건 세상나라의 일에 목숨 걸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나라는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인간들이 모여 사는 모순덩어리요, 죄인들의 세상이 이 세상입니다. 우리 신자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8:3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 세상나라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나라 일에 매이지는 않으셨습니다. 때문에 세상 일에 목숨 걸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애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두 극단적인 그룹들이 존재했습니다. 오직 이 세상의 정의에 목숨을 거는 열혈당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테러도 불사하며 로마정권에 저항했습니다. 또 엣세네파라고 아예 현실세상을 부정하고 산으로 들어가서 은둔생활을 하는 그룹이 있었습니다.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처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보다 정의롭고 깨끗한 나라가 되도록 다방면에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좋은 행정가도 나오고 국회의원도 나오고 대통령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특히 요즘 우리는 여름수양회를 2주 앞두고 있습니다. 이 여름수양회는 생명의 복음을 통해서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고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참으로 귀한 말씀 잔치입니다.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참으로 귀한 역사입니다. 이 귀한 생명의 잔치에 한 사람이라도 더 초청해서 이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세상 나라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별 해괴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7형제가 있었는데 큰 형이 장가들었다가 아이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형수와 결혼했는데 그도 손이 없이 죽었습니다. 이번에는 셋째가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또 죽고 넷째가 형수와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일곱 형제가 다 한 형수와 결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집안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결혼만 하면 일찍 죽어버리는 이상한 집안입니다. 어쨌든 나중에 부활 시에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헷갈리겠습니까? 7형제가 한 여자를 놓고 서로 내 아내, 네 아내 싸우면 난리가 나는거죠. 그래서 부활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유치한 발상입니까? 예를 들어도 좀 고상한 예를 들어야지. 너무나 수준이하의 이야기잖습니까? 현실적으로 있을 수도 없습니다. 막내하고 어떻게 형수가 결혼을 합니까?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29, 30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들의 문제는 이 땅에서의 삶과 부활 후의 삶을 동일하게 보는 것입니다. 시간과 장소만 달라졌을 뿐이지, 그 삶의 형태는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의 말대로 만약에 이 땅에서의 삶과 부활 후의 삶이 똑 같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땅에서 학대를 당하고 얻어 맞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부활해서도 다시 그 사람과 만나서 영원토록 살아야 합니까? 그럴려면 차라리 부활 안하고 말죠. 또 이 땅에서 신체적인 결함이 있었던 사람은 부활 후에도 그 모습을 가져야 합니까? 그러면 누가 부활하고 싶겠습니까? 이 땅에서 죽은 그대로 부활한다면 젊어서 가장 아름다울 때 죽어야 합니다. 사진 찍어 봐서 가장 잘 나올 때에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우리가 부활하게 되면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는 우리가 욕되고 연약한 육체를 벗어 버리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이 됩니다. 계시록 7:16,17절에 보면 “그때는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됨도 상함도 없는 생명수 강가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본문에 여인이 그대로 부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여인은 일곱 남편들 앞에서 하구 한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일곱 남편 장례식 치루느라고 눈물로 보냈는데 하늘나라 가서도 계속해서 일곱 남자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다면 얼마나 슬프고 운명적인 일입니까?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나 꾸며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나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개척하고 도전하는 인생을 살고자 꿈을 꾸고 시도해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안될 것부터 생각합니다. 항상 부정적인 생각,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 수양회에 파트에서 양 30명을 초청합시다” 그러면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도전하면 됩니다. 그런데 저 구석지에 앉아서 “안될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등록역사가 이루어지면 “양들이 등록 했다고 믿을 수 있나. 당일 날 안 올 수도 있을텐데” 또 양이 수양회 오면 “양들이 수양회 왔다고 변화되나, 도중에 도망갈 수도 있어” 양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면 “잘 자라다가 가을에 도망가겠지” 항상 이렇게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현대판 사두개인들입니다. 결혼해서 죽고, 죽고. 죽고. 맨날 부정적인 생각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성경도 하나님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다 같이 32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지금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다 생전에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죽었지만 지금 다 부활하여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부활하게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시대에도 살아계셨고, 이삭의 시대에도 살아계셨고 야곱시대에도 살아계셨습니다. 아브라함시대에 살아계셔서 100세나 된 사라의 마른 태에 잉태케 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삭도 결혼한 지 20년 동안 자식이 없었지만 포기치 않고 기도했을 때에 마침내 쌍둥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맨손으로 집을 떠났지만 거부가 되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각 시대마다 살아계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운데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100년 전에도 살아계셔서 가난과 미신과 무지 어둠가운데 있던 이 민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50년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를 부흥케 하셨습니다. 21세기 들어 이 민족을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삼고 계십니다. 저는 지금까지 30년째 UBF역사를 섬기고 있지만 수양회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80년대 시골 초등학교 마당에 솥단지 걸어놓고 수양회 할 때나, 90년대 이단의 세력들이 캠퍼스를 휩쓸 때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물결이 휩쓸고 있는 2000년대에도 변함없이 은혜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하나님은 변치 않고 살아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똑같습니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책입니다. 어찌보면 얼마나 재미없고 고리타분한 책입니까? 세상의 책들은 아무리 베스트셀로도 한 두달만 지나면 사람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책, 새로운 사상, 새로운 철학들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경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수 많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바르게 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이 사람이 지은 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은 다른 책과 달리 그 단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신성한 그 어떤 것이 숨 쉬고 있는 신적인 권위가 있는 책이다” 때문에 성경은 다른 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역동적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어떤 죄인도 그 골수를 찔러 쪼개서 영혼을 수술하고 치료하는 놀라운 권능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어저께나 오늘이나 내일도 변함없이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동일하시고 하나님의 능력도 동일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이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도 성경의 능력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두개인들과 똑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박제로 만들어서 박물관에 모셔두는 것과 같습니다. 박제된 호랑이나 독수리를 보셨습니까? 분명히 호랑이는 호랑이입니다. 독수리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랑이나 독수리의 모습만 띠고 있지 생명력이 없습니다. 호랑이로서의 패기나 독수리의 기상이 없습니다. 우리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박제된 골동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을 케케묵은 고문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죄가 없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의 큰 죄입니다.
우리는 2009년이 내 생애에 최고의 해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2009년 여름수양회가 최고의 수양회가 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09년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 마냥 무슨 기발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올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사건입니다. 내가 성경을 읽다가 혹은 쓰다가 한 말씀이라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그래서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고 회개하고, 주님을 만난 감격을 체험하고 냉냉한 가슴에 불이 붙는다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양회가면 양들만 예수님 만나서 변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양들이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깊이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양들보다 더 회개가 필요하고 양들보다 더 많은 치료가 필요하고 양들보다 더 결단이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만 회개하면 요회원들이 다 변화됩니다. 나만 변화되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양들은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금방 눈물 흘리고 감격하고 예수님 믿고 변화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잘한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율법사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많이 안다는 그들이 가장 성경을 잘 믿지 않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죽은 자가 되지 말고 산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자의 하나님이 되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산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문화부장관을 지낸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새롭게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 것과 같지 아니하더라” 똑같은 것을 보더라도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보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 보니까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예배 드리니까, 맨날 수양회 가니까 그 예배가 그 예배, 그 수양회가 그 수양회라고 생각합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새로운 것이 없다고 타령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집에서 사모님이 아무리 맛있는 것을 해 줘도 맨날 그 반찬이 그 반찬이라고 투정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똑같은 반찬이라도 정말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 보십시오. 어제의 김치찌개가 다르고 오늘의 김치찌개가 다릅니다. 그 예배가 그 예배가 아닙니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똑같은 수양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2009년 여름수양회에서는 나를 찾아오신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의 구주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어제 메시지를 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습니다. 모르는 번호가 찍혔는데 콜렉트 콜로 왔습니다. 누굴까 혹시 보이스 피싱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군대에서 조신실 목동이 전화를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번도 조신실 목동에게서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모임이나 예배에 수시로 빠지기 때문에 제가 전화하면 항상 전화기가 꺼져있거나 잘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스스로 군대에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제 전화번호를 어떻게 기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가 군대가서 고생해보니까 센타 목자님들이 얼마나 귀한지, 센타에서 예배드리던 때가 얼마나 사모가 되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새롭게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 것과 같지 아니하더라” 그 말이 정말 딱 맞았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율법사가 머리가 나빠서 신앙생활 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성경을 잘 모르고 하나님을 잘 모르고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까 믿지 못해서 스스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세 번째로 나온 사람이 율법사인데 그의 질문이 무엇입니까?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는 아마도 지식적인 차원에서 율법을 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37-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이 무엇을 강조하십니까? 사랑입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이 없는데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정말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 갖고 왈가왈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로마도, 헤롯도, 빌라도도, 심지어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까지 다 품어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두개인처럼 세속적인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부활에 대한 산 소망 가운데 거룩한 나그네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여기 나오는 종교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머리를 돌리고 교묘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만 하면 마치 태평양 바다와 같이 자잘한 문제들과 모순되는 것들을 다 품어 버릴 수가 있습닏.
제자들은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이 하나님을 바로 알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까? 사랑하면 보입니다. 우리는 머리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사랑할 때에 하나님도 알고 예수님도 알게 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43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오시기 전 1000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알고 시편 110편에서 예언의 시를 읊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 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우리도 이번 수양회에 정말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서 말씀을 들으면 나의 주님을 새롭게 만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내가 한 양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 마음이 녹아서 수양회 참석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갇혀 계시는 고정적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수평적이거나 단편적인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나 넓고 광대무변하고 역동적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번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수양회를 통해서 나의 묵은 심령을 갈아엎고 고정관념을 깨고 하나님을 바로 만나서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는 산자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