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병동에서 신생아가 태어났다. 그런데 그 부모는 너무나 가난했고 신생아는 병약하여 그냥 내버려졌다. 병원에서도 인공호흡기를 꽂아놓았지만 신생아를 방치해 두었다. 그런데 은퇴한 어떤 노간호사가 그 죽어가는 신생아를 품에 안고 키우기 시작했다. 찬송가를 불러주고 기도해 주고 목욕시켜 주고 사랑으로 보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입속에서 찬송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간호사는 너무나 기뻐 아이를 손녀처럼 키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소녀가 자라 설리번 선생이 되었다.

  그 설리번 선생은 나중에 또 앞 못보고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삼중고의 한 소녀를 돌보기 시작했다. 이 소녀가 자란 후에 세계적인 석학이 된 헬렌켈러다. 설리번이나 헬렌켈러나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어려움과 고통 속에 성장했다. 그러나 한 노간호사가 포기치 않고 말씀과 사랑으로 키웠을 때에 나중에 역사 속에 우뚝 선 거목이 되었다. 작은 겨자씨에 생명이 있고 고난 속에 생명력은 더욱 강한 법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잘나고 똑똑한 사람보다 훈련을 사랑하고 부족하다 자인하고 겸손한 사람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바울 등 위대한 종이 되고자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믿음의 종이 되기까지 그냥 된 것인가. 독자 이삭을 드려야 하는 아픔이 있었고, 애굽의 왕자 자리를 버리고 광야 40년 훈련을 받아야 했거나,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겨야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살이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요셉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창세기 45장 이하를 보면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형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뜨겁게 영접한다. 그런 내면성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바로 믿음이다. 5절을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고 했다. 7절은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다고 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다. 요셉은 자신의 삶이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섭리가운데 인도되었음을 증거한다.

  형들은 시기심 때문에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사 요셉을 연단하사 애굽총리로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이렇게 연단하신 것은 그를 구원역사에 쓰기 위해 준비시키신 것이다. 그가 운명적이고 고통스런 생애 가운데서도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섭리 편에서 자신의 삶을 보았기에 역경의 때에도 좌절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보았다면 그의 생애는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그는 어머니가 서로 다른 야곱의 12아들 중 11번째로 태어나 형들과 함께 자라야 했다.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늙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자라서 어린 시절부터 이유없이 형들의 미움과 구박을 받아야했다. 어쩌다 꿈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 되어 17세 젊은 나이에 노예로 팔려가 낯선 이방 땅에서 종노릇하고 누명을 쓰며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소설 같은 인생이다. 요셉은 슬픔과 분노를 견딜 수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할 수 있다. 운명을 저주하며 복수심에 불탈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사건이라도 하나님 없이 운명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 인생은 슬프고 어둡고 허무하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십자가는 장차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길임을 믿어야 한다. 이렇게 요셉의 생애를 아름답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린 시절 요셉에게 꿈을 주시고 그를 이룰만한 지도자로 키우셨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애를 주관하시는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전 생애를 인도하신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고난없이 축복과 영광을 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시간 나를 돌아다보며 기도하며 요셉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