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신년수양회 주제2강 이희철

눈물로 한 사람을...

□ 말씀 : 사도행전 20:15-38

□ 요절 :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오늘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고별 메시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처음 이곳에 온 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양들을 돌보고 섬겼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은 떠나지만 남은 장로들과 양들을 주의 말씀에 맡기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때까지 바울을 지켜보고 동역해온 장로들은 바울이 했던 것처럼 양들을 돌보고 아껴주므로 역사를 이어나가야 합니다. 이는 현재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어떻게 돕고 섬겨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올 한해 어떻게 양들을 돕고 섬길 것인가 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밀레도에 모인 장로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우리는 몇 년 동안 같이 지내게 되면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나 같은 장막생활을 하게 된다면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가 2부에 있는 김인덕 목자님이나 기대연 목자님에 대한 것은 알만큼 다 압니다. 기대연 목자가 언제 무엇 때문에 힘들어지고 짐을 싸고 집으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다. 뭐하다가 주일예배에 안 나왔었는지, 무슨 일 때문에 유치장에 갇혀야 했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거짓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에베소의 장로들도 당연히 같이 동고동락한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로들 앞에서 바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다같이 19, 20절을 읽어 보시겠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은 양들을 돌보고 복음역사를 섬긴 것이 바로 모든 겸손과 눈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람들을 잘 리드하고 관리하는 능력을 배우고자 합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4강에 들었을 때는 히딩크의 리더십과 탁월한 사람 보는 눈이 급 유행을 탔습니다. WORLD BASEBALL CLASSIC에서 일본을 이기고 미국을 누르는 선전을 거듭할 때는 김인식 감독의 리더십이 급 물살을 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복음역사를 섬기는 데 있어서 목자에게 필요한 능력과 조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일단은 목자생활을 하는 데는 지치지 않는 체력이 참 중요합니다. 전공과 직장 일을 감당하면서 양들을 심방하고 도울 수 있는 체력이 필요합니다. 몸이 아프고, 금방 지치게 되면 양들을 돕고 섬기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말씀도 잘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이것저것 많이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양들과 대화하고 공감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양들이 하는 것,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다양하게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유머감각도 있어야 합니다. 일단은 공부도 잘해야 되고, 각종 수양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연극이면 연극, 율동, 댄싱, 찬양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어야 편합니다. 또 축구도 잘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직장도 좀 좋아야 체면이 설 것도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되면 1년에 한번 하는 보배합 이라도 좀 잘하든지 정 아니면 삽질이라도 잘 해야지 뭔가 자격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목자생활을 하였습니까?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첫째로 바울은 에베소 역사를 섬길 때에 모든 겸손으로 양떼들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겸손’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요즘 시대에는 얼굴이 못생겼거나, 키가 작거나, 다리가 짧을 때, 또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그런 말들을 겸손하다는 말로 예의를 갖춰 표현하기도 합니다. “넌 참 얼굴이 겸손 하구나” “난 보다시피 다리가 겸손해서 ...” 그러면 우리가 겸손하려면 얼굴도 못생기고, 키도 작고, 다리가 짧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 호선 목자님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됩니다. 남들보다 키가 조금 작은 승리 목자님은 겸손이 바닥에 쫙 깔린 사람 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이 겸손한 행동을 한다고 겸손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낮은 자리에 앉는 일, 검소한 옷차림, 고분고분한 말투 이런 것은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참된 겸손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죄로 인해 얼마나 엄청나게 타락한 죄인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를 깨달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러 갈 때 까지만 해도 자신의 의와 행실을 철저히 행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율법적이고 지식적인 행동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찬란한 빛 앞에서 눈이 멀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타락하고 죄악 된 자인지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바울은 겸손해 졌습니다. 사람들의 조롱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며,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겸손은 결코 지식적이고 도덕적이고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내가 추악한 죄인임을 인정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역사에서 필요하고 요구되는 목자로서의 자세입니다. 바울은 목자생활의 첫 번째가 바로 이 겸손이고, 이 겸손으로 항상 주를 섬기고 양들을 돌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겸손하셨습니다. 공인된 죄인으로 낙인찍힌 천하디 천한 사마리아 여인의 무시를 참고 겸손히 다가갔습니다. 말씀으로 그녀의 내면에 참 기쁨의 영생수를 선물로 허락하셨습니다. 세상 지식과 권위로 똘똘 뭉친 니고데모의 교만한 모습을 겸손히 받아 주셨습니다. 무식하고 감정적인 제자들을 인자한 웃음으로 섬기시고, 한사람 한사람의 더러운 발도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먹고, 배반하고 도망쳤지만 인내하시고 겸손히 찾아가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겸손이 사마리아 여인을 위대한 복음 전파자로 변화 시켰습니다. 제자들을 위대한 복음의 사도들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복음역사에 이 겸손이 필요합니다. 양들이 센타에 와서 복음을 영접하고 회개하고 변화되는 것은 목자들의 외적인 타이틀이나 지식이나 말솜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식적이고, 인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 하나님을 강요한다면 변화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회개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에 센타에 와서 소감을 들었을 때 그 목자님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 목자가 과거에 얼마나 정욕적이고 음란하고 추했는가를 드러낼 때, 그 추악한 죄악이 꼭 나의 모습인 것만 같은 모습에 내 마음에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타락함을 깨달았다는 것에서 큰 감동과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소감을 쓸 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의 모습이 진전이 없고,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이 크고 위대하고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타락한 죄인인지 잘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양들도 이런 나에게서 은혜를 받고, 변화와 회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쉬지 않고 매일 같이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는 힘은 바로 이 겸손이었습니다. 이 겸손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겸손히 참고 인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겸손히 참으시고 섬기셨는가 생각할 때 양들을 겸손히 섬길 수 있었습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져 섬기고 또 겸손하게 권면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겸손을 통해서 에베소의 그 교만하고 똑똑한 지식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양들은 얼마나 교만하고 자기 중심적 입니까? 또한 우리 자신은 얼마나 변화되기 어렵고 섬기기 어려운 존재들 입니까? 현재 모스크바에 계시는 최 안드레 선교사님은 저희 팀이 2학년인 1997년에 군대에서 막 전역하였습니다. 전역하자마자 저희 팀장으로 장막생활을 같이 하며 딱 1년간 섬기고 모스크바로 가셨습니다. 저희 팀은 모두 심성은 착하고 곱지만 말을 잘 안 들었습니다. 틈만 나면 치고 박고 싸우고, 고등어 한 마리 때문에 밥상을 엎어버리는 통제하기 만만치 않은 팀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새벽기도 때마다 우리를 부드러운 목소리로 깨우셨습니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막 전역한 사람이 나이도 새까맣게 어린 놈들을 발로 툭툭 차면서 강압적으로 깨우지 않았습니다. 항상 부드러운 목소리로 깨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누가 일어나겠습니까? 깨워서 안 일어나면 마음에 성질이 차고도 넘쳤을 것인데 목자님은 일어날 때까지 우리 팀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시원하게 주물러 주었습니다. 우리는 목자님의 섬김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라도 일어나 나가는 척 하였습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숨었다가 목자님 나가면 다시 들어가 자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모목동은 10분 15분 동안 주물러도 안 일어나고 좀 더 주물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는 제가 다 성질이 나서 밟아버리고 싶었지만 목자님은 여전히 주무르고 깨워서 갔습니다. 그리고는 심야기도 때마다 간절하고 절실하게 변화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겸손히 섬기시는 목자님은 저희에게 큰 사랑이요 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교만한 양들을 만나면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교만은 결코 실력이나 완력으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교만은 오직 겸손으로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해와 바람이 대결하는 우화에서도 나오듯이 바람은 아무리 세게 불어도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는 조용하고 은은하게 따뜻한 기운으로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많은 능력과 의욕으로 양들을 변화시키고자 애쓰기보다 겸손함이 묻어나오는 목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도바울처럼 모든 겸손으로 양들을 참고 감당하여서 이 시대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깝깝한 양 무리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눈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3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이전에 별로 눈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연약한 마가를 데려가는 문제로 바나바와 심히 다툰 것을 보면 초기의 바울은 아주 냉정하고 철저한 원칙론자 였던 느낌이 듭니다. 아주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매일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왜 눈물을 흘리게 됩니까? 보통 사람들은 슬프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눈물을 흘립니다. 누군가가 애타게 보고 싶으면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가끔씩은 눈에 먼지가 들어가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어이없게도 하품을 늘어지게 하다가도 눈물을 흘립니다. 저는 훈련을 받을 때 유격장에서 눈물이 났습니다. PT 8번 온몸 비틀기를 한 참 하는 중에 나의 머리와 다리를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보다 1년전에 김활영 목자님이 이 훈련을 받고 통과했다는 생각에 악을 지르며 오기로 이겨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흘린 눈물이 이런 눈물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흘린 눈물은 장로들과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사랑의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자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연민을 담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시는 자의 질병과 고통, 죽음과 상실로 인한 아픈 마음에 예수님은 고스란히 공감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19:41) 다가오는 심판과 멸망의 비극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한없는 눈물을 흘리시며 소리내어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유대민족을 먼저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동족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겟세마네에서 그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흐르는 기도 중에 흘렸을 눈물은 그 얼마이겠습니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며 우셨습니다.(마 27:46). 겟세마네에서 시작된 눈물은 골고다의 십자가 위에서 남김없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 예수님은 그 눈물샘 모두를 인류를 위해 비워버리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예수님의 눈물은 하나님의 심장에 흐르는 깊은 사랑의 증거가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린 예수님의 눈물에는 자기 백성을 비롯한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슬픔에 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고통까지가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그 눈물이 없다면 인류는 영원히 이를 갈며 통곡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흘린 눈물로 우리의 죄악을 씻으시고, 우리가 흘려야 할 영원한 고통의 눈물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나훈아의 노래 중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바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바울은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변화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술취함과 정욕에 빠져있는 한 사람이 안타까웠습니다. 자신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는 바로 뒤의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한 사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한 순간의 죄에 넘어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절망하고 있는 또 한사람 때문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주위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얽매여 내면에 기쁨이 없이 살아가는 한사람을 생각할 때 눈물이 났습니다. 물질의 어려움, 시험의 실패에 눈이 가리워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원망할 때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책망과 훈계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그냥 냅두고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었습니다. 속도 편하고 몸도 편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 중에 있는데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알고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하며 뛰며 찬양하며 섬겼었는데 그런 그들을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떠날지라도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던 한 사람이 아파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바울은 도저히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눈물을 흘리더라도 그 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믿을 수 있도록 돕고 섬겼습니다. 그럴 때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최정한 목자가 돌아왔습니다. 김동규, 조은량 목자가 돌아왔습니다. 전두영 목자, 문정현 목동이 돌아왔습니다. 저희가 이 눈물을 흘림으로 한사람 한사람을 살리고 새 양들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해 사도바울의 눈물의 심정이 저희 모임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바울에게는 투철한 사명의식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23, 24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는 어떤 화를 당할지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어떻게든 잡아 죽이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가기만 하면 돌로 쳐 죽이고자 벼르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주위의 제자들은 한사코 이런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고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결박과 환난이 뻔히 기다리고 있는 줄을 알면서도 어찌하든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어찌하든지 끝마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이방 땅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복음역사를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기도지원도 받고 후속선교사도 많이 파송하도록 보고를 하고 권면을 해야만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아무리 열심히 개척역사를 이루어서 많은 지역을 선교했다 할지라도 본부교회와 연결을 시켜주지 못하면 선교역사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루살렘에 가서 이 역사를 보고하고 새로운 선교전략을 짜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동안 선교지에서 모은 구제헌금도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위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에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기 생명보다 사명을 더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처럼 목숨보다 사명을 앞세우는 사명 중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24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요,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죄인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직 은혜로 당신의 목숨을 버려 자신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자신도 목숨을 아까와 하지 않고 은혜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몸이 찢겨지고 물과 피를 다 흘리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이 바울을 죽음까지 불사하는 사명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생명을 바쳐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한 스데반과 같은 신자들의 눈빛이 가슴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죽어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는 소망이 충만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무엇보다도 오직 복음만이 어떤 자도 살리고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어떻게든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골고다 언덕을 끝까지 걸어 가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나를 살리고자 애를 썼습니다. 바울의 사명감이 예수님을 본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넷째로, 바울은 도덕적으로도 모본을 보였습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바울은 사사로이 욕심을 부리지 않고 베풀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떠나 보내는 에베소 장로들의 마음은 헤어지기 아쉽고 슬프기만 하였습니다. 바울의 목자의 삶에 깊은 감명과 존경이 그들 마음속에 얼마나 가득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생활은 그들의 마음에 큰 도전이요 본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저희들 가운데도 나타나는 2008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처음 센타에 왔을 때는 다들 무등산에 놀러가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놀았습니다. 두 번째 온 날은 주일 오후, 축구하러 오라고 해서 왔지만 축구를 안했습니다. 실망했습니다. 세 번째 온 날은 수요일 새벽에 축구를 하러 왔는데 다들 새벽기도만 하고 축구는 안했습니다. 목자님들은 새벽기도도 안하고 장막에서 잠만 잤습니다.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신입생 예배를 하면서 듣는 소감이 제게 충격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발표하는 목자님의 소감은 제 자신의 소감인 듯 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니 말씀공부와 말씀을 통해서 나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솟아 넘치고 있었습니다. 축구도 안 해주고 몇 번이나 나를 실망시켰지만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자신의 죄 문제를 깊이 인정하는 목자님들의 소감과 섬김은 제가 하나님을 알고 변화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진실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양들의 마음을 녹이고 하나님을 알게 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사람을 변화시키고 돕는데 얼마나 많은 헌신과 눈물이 필요했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제가 대연 목자를 말했지만 저도 대연목자보다 하나도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대연목동을 깨우는 목자님이 센타로 갈때까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숨어있었습니다. 목자님이 가면 다시 들어가 잠을 자곤 하였습니다. 다른 동역자와 장막에서 가요를 직접 부르며 녹음하고 떠들어 댔습니다. 여름수양회 후 장막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을 본 목자님은 소리 없이 나가셨습니다. 저를 데려온 친구와 몇 년간이나 싸우고 관계성을 파괴하면서 버티고 지냈습니다.

이런저런 모습들을 다 지켜보면서도 말씀으로 돕고 섬겨주셨던 목자님들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다 내어 쫓아 버리지 않고 우리도 모르게 눈물로 기도하며, 말씀을 주셨습니다. 때로는 훈련도 주시고, 책망도 하셨습니다. 장막에서 술마시다 들킨 저희를 아무말 없이 목욕탕에서 등만 밀어 주셨습니다. 차라리 때리고, 굴리고, 성질을 냈으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눈물어린 기도와 사랑으로 저희를 섬기셨습니다. 아무 보잘 것 없는 저를 겸손히 섬기시고, 눈물어린 기도와 책망과 훈련이 있었기에 이나마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저를 데려온 친구 민철 목자는 한사람을 눈물을 흘리며 같이 아파하고 사랑하며 양들을 섬겼습니다. 인호 목자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자신의 고통과 아픔처럼 동참하며 도왔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목자의 눈물과 자세를 보았습니다. 그럴 때 소망 없던 인호 목자님이 변화되고 성장하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과 눈물이 변화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임 가운데 이런 목자의 심정과 눈물이 가득하였을 때 저와 같은 수많은 양들이 변화되고 부흥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 생명구원 역사에 다시금 동참하고 싶습니다. 목자생활에는 감동과 기쁨이 있어야 살 맛이 납니다. 저는 이제 졸업도 했고, 결혼도 했고, 직장도 다녀야 하니 저 뒤에서 구경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 말씀 한번 하는 것이 귀찮았습니다. 주보에 이름이 올라가면 전도 목자를 찾아가 이게 뭐냐고 하며 괴롭게 하였습니다. 양들은 오건말건 제껴 두고 목자들끼리 모여 배 깔고 이야기하며 놀기만 좋아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를 많이 낳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많이 부럽습니다. 저희 가정에는 아직 아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고민도 많이 하고, 걱정도 많이 하였습니다. 지금쯤은 아이가 있어서 좀 시끄럽게 키우고 해야 될 듯 합니다. 아이가 없으니 집이 조용합니다. 요새는 제가 어울리지 않게도 십자수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센타가 건물은 큰데 양들이 없고 변화된 새 생명이 없어져 다들 저같이 십자수나 하는 모임이 될까 걱정이 듭니다. 나 한 사람이 목자의 겸손과 눈물로 역사를 섬기지 않으면 복음의 능력과 상관없는 모임이 되어 버립니다. 부족한 제가 내면에 감춰진 심정과 눈물을 드러내어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해에 한 양에 도전하고 감당해야 겠습니다. 겸손과 눈물로 양들을 감당하여 차고 넘치는 생명역사가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에게는 모두 양들을 사랑하는 눈물과 겸손함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눈물을 한없이 표출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 사랑을 받을 양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올 한해 적극적으로 양들에게 사랑과 겸손과 눈물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기를 기도합니다. 올 한해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미 충만한 은혜가 넘칩니다. 변화되어 기뻐하는 양들도 넘쳐날 것입니다. 2008년에는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