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여름수양회 저녁2강 (김바나바)

성령을 따라 행하라.


말씀: 갈라디아서 5:16-26, 엡5:18-21

요절: 갈라디아서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저는 지금까지 많은 수양회에 참석하고 또 수양회 역사를 섬겨 봤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은 수양회 때는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는데 그 후가 문제입니다.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얼굴이 시컴해지고 옛 생활로 되돌아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이요,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악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어떤 죄와 싸워도 이길 만큼 강하거나, 또는 세상에 악이 존재하지 않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고 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넘어지고 자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에 연약한 우리 자신과 죄악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저와 여러분의 공동된 고민이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나름대로 연구하고 기도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에 떠오르게 하신 단어는 “성령” 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 더 깨닫고 제목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다같이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사도바울은 이 한 구절에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무슨 물리적인 힘을 키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수련을 쌓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영어성경에 ‘live by the Spirit’ 으로서 ‘성령으로 산다’ ‘성령에 의해서 살아간다’ 그런 뜻입니다.


 18절에서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산다”고 했습니다. “led by the Spirit” “성령에 인도함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 By the Spirit입니다. 다 수동태입니다. 우리를 인도하고 이끌어가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주체가 누구였습니까? 나였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내 안에는 죄, 육체의 소욕이 주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정과 욕심에 이끌려 살았습니다. 내 안에 펄펄 끓은 정욕 때문에 원치 않게 음란하고 지저분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나의 욕심이 사람들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열등감을 느끼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나의 정과 욕심이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했습니다. 과거의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과거에 쇠파이프 들고 설치던 혈기맨 유재호는 죽었습니다. 목자들이 안 보는 뒷골목에서 밤거리를 헤매던 인간 한충신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없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 안에 누가 사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20절에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을 믿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저는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내가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끔 지나간 날의 좋은 추억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것이 더 많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 허물과 실수들, 죄와 수치스러운 기억들, 지울 수 있다면 확실하게 지우고 싶은데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나의 옛 자아도 함께 죽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영으로 살고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와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이 내 인생의 주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지 객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앞서 행하시도록 내 인생의 운전석을 성령님께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사에 성령님께 물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사무엘상 3:9절에 보면 사무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는 주의 종, 성령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들려 주시는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앞장섰습니다. 내가 자고 싶으면 자고. 내가 놀고 싶으면 놀고, 나 하고 싶은대로 했습니다.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가고 싶은대로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살았습니다. 내 인생이 주인이 나이니까 내 맘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인생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앞장서십니다. 성령님은 독재자처럼 나를 이끄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가장 좋은 플랜을 가지고 내 인생을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으로 내 인생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본래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창조사역에 동참하셨던 분이십니다. 창세기 1:26절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했을 때에 그 우리 중에 한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내 인생의 게놈지도, 나의 모든 정보를 다 꿰뚫고 계십니다. 나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내 인생의 뜻과 섭리가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신 분이십니다(창1:31). 그 분은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떠나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요16:7)”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실 것이요,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요14:17)”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요16:13)”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우리는 이를 가르켜서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와 사신다. 이는 참으로 신비롭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부분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내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십니다. 용기를 주시고 삶의 희망과 비젼을 주십니다. 슬플 때에 위로를 주십니다. 내가 실패할 때에 내 마음 속에서 안타까워 하십니다. 또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속에서 근심하시고 탄식하십니다. 성령은 어떤 에너지가 아닙니다. 성령은 기계적인 분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래서 나와 친해지기 원하십니다. 나와 대화하기 원하십니다.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내 안에 들어와서 사시며 나와 깊은 사귐을 갖고 연합하기 원하십니다.

  

  우리 각자는 이 성령님께서 들어와 살고 계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고린도 전서 3: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거룩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안에 성령님을 존귀하게 모셔야 합니다. 성령을 환영하고 사모하고 성령님과 적극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이처럼 좋으신 성령님께서 나를 도우러 오셨습니다. 내 인생을 최상급으로 리모델링하기 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성령님께 자리를 내어 드려야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성령님께 겨우 방 한 칸만 내어 드리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쓰고자 합니다. 성령님을 주인이 아니라 사랑방 손님으로 생각하고 필요할 때만 찾아가서 도움을 구합니다. 일주일 동안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주일날 예배시간에만 잠깐 찾아 뵙고 문안인사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전혀 성령님과 교제가 없이 삽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참으로 섭섭해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령님을 자신의 도구처럼 자신의 필요에 따라 부릴려고 합니다. 필요할 때만 이용할려고 합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오스왈드 센더스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 방 한 두 칸만 내어 드리면 안 되고 아예 내 집 열쇠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 인생의 모든 주권을 그분에게 양도해야 합니다.


 요즘 여러나라에서 국가대표 축구팀을 보면 뛰어난 외국인 감독을 영입한 뒤에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잖습니까? 선수 선발권에서부터 시작해서 훈련방법, 작전과 모든 것을 다 맡깁니다. 코치진도 그 감독이 다 구성하도록 전권을 위임합니다. 그래야 그 감독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지, 감독으로 모셔다 놓고 주변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면 그 감독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령님은 허수아비로 만들면 안 됩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비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수영을 잘 할려면 물에다가 온전히 내 몸을 맡겨야 합니다. 파도타기하는 사람을 보면 파도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내어 맡깁니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파도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파도의 움직임에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이 신나게 파도타기를 잘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잔꾀를 내려놓고 성령께서 내 인생을 인도해 주시도록 성령께 의탁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의 인생을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축복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죄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유혹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저는 비행기를 볼 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비행기의 본체는 약 400톤이나 됩니다. 거기다가 또 수많은 사람들과 짐들을 싣습니다. 그런데 그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라 갑니다. 이는 비행기 속에 있는 엔진의 힘 때문입니다. 비행기의 몸체에 비하면 엔진은 정말 작습니다. 그러나 엔진의 파워로 말미암아 그 거대한 비행기가 태평양을 건너게 합니다. 대륙을 횡단하고, 지구를 몇바퀴 돌게 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소욕을 이기고 힘있고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이 어디 나옵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후에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또 그곳은 광야이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갑니다. 


 이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답고도 환상적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의 honeymoon, 40년 동안의 밀월여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랑이 되셔서 구름기둥, 불기둥의 큰 우산으로 그들을 덮으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백성들은 신부처럼 안심하고 그 하나님의 품에 안겨 따라갑니다. 그 40년 동안 그들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았습니다. 목마르지도 않았습니다. 사막의 모든 독충들의 위험과 적군들의 공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죄의 독충들이 우굴거리는 인생의 광야 길을 지나가고자 할 때에 얼마나 위험합니까? 얼마나 지치고 피곤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따라 갈 때에 안전하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어성경에 “keep in step with the Spirit”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과 스텝을 같이 하는 삶, 계속해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 안에 죄의 소욕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두 자아가 싸우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죄의 소욕과 거룩한 열망이 항상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지로 싸우고자 하면 백전백패합니다.


 그 의지력 강한 사도 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 인간적인 의지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16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이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이 감히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자전거를 탈 때도 계속해서 페달을 밟아 보십시오. 넘어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되면 죄에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내게 있지 않고 성령님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4:7).


 하루는 한 청년이 디 엘 무디를 찾아와서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 마음 속에 죄의 소욕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자꾸 유혹에 빠집니다. 도대체 죄의 소욕을 내 안에서 빼낼 수 없을까요?” 그때 무디가 앞에 놓인 컵을 들고 물었습니다. “젊은이, 이 컵에서 어떻게 하면 공기를 빼낼 수 있을까?”  “이 컵에 물을 가득 붓으면 되지 않겠나. 공기를 빼낼 생각을 하지 말고 물을 가득 채우게. 그러면 자동적으로 공기가 빠지지. 마찬가지로 자네 마음에 죄의 소욕을 빼낼려고 하지 말고 자네 마음에 성령으로 가득 채우게. 그러면 자동적으로 죄의 소욕이 사라지게 되는 법일세.” 그러면서 에베소서 5:18절을 주었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때에 죄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R.A Torrey는 성령충만에 대해 말하기를 “성령충만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임재가 여러분의 속마음 구석구석까지 채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목적, 모든 이념, 모든 사상, 모든 언어, 모든 행동, 모든 상상까지도 성령이 지배하고 성령이 소유한다는 뜻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즉. 나의 일부분이 아니라 나의 총체적인 모든 것을 성령께서 완전히 사로잡고 지배한다는 뜻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18절에 보면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술취하면 술이 충만해서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합니다. 술이 이끄는대로 삽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하면 성령에 이끌려서 살게 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북극에 가면 거대한 빙산들과 작은 얼음 조각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거대한 빙산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작은 얼음 조각들은 계속해서 팔랑팔랑 움직인답니다. 또 빙산과 얼음조각이 움직이는 방향이 다르답니다. 그것은 빙산은 거대한 얼음산이 있기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일때도 바다 속의 조류의 영향을 받아 움직인답니다.그러나 물위에 떠다니는 작은 얼음조각은 물 표면에 있는 잔 바람에도 계속해서 이리저리 촐랑거리며 움직인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면 우리안에있는 거대한 성령의 힘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잘요동을 하지 않습니다. 움직일때도 세상의 잔 물결에 요동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도히, 보이지 않게, 그러나 일관성있는 방향을 가지고 움직입니다.우리가 작은 얼음조각처럼 세상 속에서 불어오는 크고 작은 시류의 바람에 흘러가는 인생의 파편같은 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바다의 저류와 같은 성령님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바람으로 가득한 공과 같습니다. 공이 바람으로 충만하게 되면 아무리 누가 누르고 치고 때려도 모양이 변치 않습니다. 공이 탄력성이 있어서 잘 뜁니다. 공이 굉장히 파워가 있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사람은 스피릿이 있고 파괴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충만한 성도, 성령충만한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18세기 말에 영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을 겪은 후 극도로 사회가 혼란해져서 정신적인 퇴폐, 향락주의가 팽배해서 감옥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국이 이제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인생의 가치관을 상실하고 망했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 성령 충만을 받게 하셔서 성령운동을 일으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이 변화받고, 정치와 제도가 달라지고, 다시 영국이 신사의 나라, 올바른 나라, 선진국가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최초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대동강변에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19세기, 미국도 남북 전쟁의 여파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경기침체와 불경기, 불신, 합리주의, 갈등과 싸움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서 떠났을 때 하나님은 무디(Dwight Lyman Moody ; 1837~1899)에게 성령 충만을 주셔서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 열매로 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꼬 배사라 선교사님도 그 중에 한 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충만하게 하시고 우리 개개인을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국내 캠퍼스는 물론이요, 세계의 캠퍼스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성령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까?


첫째로,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성령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성령의 모든 영양소가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열심히 먹어야 합니다. 맛있게 말씀을 먹읍시다. 그리고 말씀을 먹고 나서 묵상을 해야 합니다. 이미 배운 말씀, 한 번 들은 말씀이라고 덮어두면 안 되고, 자꾸 되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사이에 말씀 속에 담긴 성령의 기운이 내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묵상하게 될 때에 우리 안에 성령의 영양분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시편 1:2,3절에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많이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말씀공부 한번 한다고 즉시 성령충만해 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투자해야합니다. 그리고 인내해야 합니다. 초식동물들은 정확하게 55초 되새김질을 합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때에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냥 책으로 읽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는 성령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경외심을 갖되 또 친근감을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기대감을 가지고 설레이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은 내게 주님께서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려주기 원하시는가?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으세요. 머리로 읽지 말고 가슴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고 공부할 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해석할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해석해 주시도록 읽어야 합니다. 내가 본문을 지배하고자 하기보다도 본문이 나를 지배해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온전히 내어 맡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말씀이 주체가 되고 나는 객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주인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말씀의 원저자이신 성령은 내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공부할 때에 그 성령님께서 내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음성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여 합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고 나중에는 무릎까지 올라오고 나중에는 허리까지 차다가, 나중에는 목에까지 차고 흘러 넘쳐서 헤엄을 치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단방에 성령에 충만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이 점점 성령에 젖어 들어가서 나중에는 성령으로 흘러 넘치게 됩니다. 성령안에서 헤엄치게 됩니다. 


 누가복음 24:32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성경말씀을 풀어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있게 공부하고 주야로 묵상하게 되면 닫혔던 영의 눈이 열립니다. 차가웠던 심령이 뜨거워지게 됩니다. 뜨거워져서 나중에는 불 붙는 듯하게 됩니다. 그때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에베소서 6:17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고 힘써 묵상할 때에 성령의 검인 말씀을 갈고 닦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 우리는 날카로운 칼, 마광한 살이 되어서 어떤 죄의 소욕도 이기고 세상의 죄악된 문화도 이기고 사단의 세력도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힘써 기도 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6:18절에 보면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을 때에 성령께서 바람처럼 불처럼 임하셔서 그들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두려움 많고 연약하던 자들이 성령 충만케 되어서 불사조와 같은 믿음의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개인기도도 중요하지만 또 합심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요, 교제입니다. 우리가 기도로서 성령님께 속 마음을 털어놓고 깊이 대화할 될 때에 성령님과 친해지게 됩니다. 성령님과 깊은 교제의 사귐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기도하되 수시로 기도하고 성령님과 대화하십시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방향을 잡으려고 할 때에 성령님께 먼저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에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참고서를 아무리 많이 보고 머리를 써도 알 수 없는 말씀의 뜻을 기도하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 모든 것, 즉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과 깊은 사귐을 가지게 될 때에 성령에 이끌린 바 되는 삶,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삶, 성령님께 사로 잡힌 바 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기도는 바람이요, 말씀은 나침반과 같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바람과 같아서 우리의 인생의 배를 강력하게 밀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없이 뒤에 밀면 그 배가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실제로 말씀을 붙들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또 반대로 기도는 하지 않고 말씀만 보는 사람은 나침반으로 방향은 잡는데 앞으로 전진할 힘을 덧입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감격과 역동성이 없고 건조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말씀과 기도는 함께 가야 합니다. 말씀은 장작이요, 기도는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장작이 없이 불이 타지 않습니다. 바람이 없이 불길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장작과 기도의 바람이 함께 있을 때에 성령의 불길이 타오를 수 있습니다.  


   셋째로, 힘써 찬양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5:18, 19절에 보면 “술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하신 후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고 하였습니다. 술취했을 때와 성령에 충만했을 때에 공통점이 무엇이냐? 노래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술취하면 트로트를 부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면 찬송을 부르게 됩니다.


 기독교는 찬양의 종교입니다. 찬양은 말씀과 기도의 결정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찬양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찬양할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를 보면 성가와 찬송가가 항상 중요했습니다. 찬양은 설교만큼 중요합니다. 찬양으로 마음 문을 열어야 말씀이 들어갑니다.찬양은 우리의 헛된 자부심과 위선의 껍데기를 깨는 역할을 합니다. 찬양은 모든 헛생각을 날려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찬양하는 중에 성령님과 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찬양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틀림없는 사실은 찬양하는 교회에 은혜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찬양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가장 감동하는 순간은 예배 중에 모든 성도가 힘껏 부르는 찬양의 소리를 들을 때라고 합니다. 찬양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사 치유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찬양할 때에 어두움의 영이 물러가고 묶인 영이 해방되는 자유 를 체험하게 됩니다. 찬양할 때에 질병이 낫습니다. 슬퍼하는 자가 찬양할 때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낙심한 자가 찬양을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다운되어 있을 때에 찬양하면 기분이 업되고 소망과 비젼이 보이게 됩니다.


 다윗이 수금과 비파를 타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사울 왕에게 있던 악한 영이 떠나가고 그를 괴롭히던 아픔이 사라져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찬양하는 다윗이 왕이 되니 나라가 평화로워 졌습니다. 온 나라에 번영과 축복이 온 것은 영적인 찬양을 부르면서 영적인 회복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찬양대원만 288명을 다윗이 임명해서 찬양을 부르게 했습니다. 다윗 시대에 수많은 악기가 개발 됩니다. 십현금, 삼현금, 큰소리 나는 제금, 높은 소리나는, 퉁소와 현악과 비파와 수금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켄트 휴스라는 설교자는 "우리가 거듭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찬양할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의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냥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찬양할 것 밖에 없음을 알았다.


 루터는 말하기를 "나는 위기를 만날 때마다 기도하고 찬양을 했다. 그때마다 주께서는 내게 어려움을 이길 성령의 충만함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384장)"--루터가 작시,작곡한 찬송입니다. 칼빈도 상당히 찬양에 조애가 깊었습니다. 요한 웨슬레 형제도 수없이 많은 찬송을 남겼습니다. 찬송은 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찬송을 바쁜중에 남길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말씀을 읽은 후 찬양시로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찬송가에 가장 많은 실려있는 찬송시는 패니 크로스비라는 시각장애인의 찬송들입니다. 무려 8,000곡이상을 남길수 있었던 그녀는 "나의 기도가 나의 찬송'이라고 고백합니다. 찬송하면 성령충만하게 되고 성령충만하면 자연스러게 찬송이 나옵니다. 


 우리는 조창호분을 알고 있습니다. 6․25 때 포병장교로 참전했다가 가평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43년동안 포로생활하다가 몇 년 전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힘든 시절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돌아온 사자(死者)>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북한의 어디에도 신앙의 자유란 없다 그러나 교회에 나가거나 예배를 볼 수 없어도 항상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간구했다. 물론 찬송도 부를 수 없었지만 입 속으로 늘 불렀다. 나 혼자 이겨 내지 못할 괴로움을 주님께 간구하면 주님은 내게 늘 편안함과 새로운 의욕을 주셨다. 또 내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주님을 수없이 원망하더라도 종국에는 평안함을 가져다 주셨다.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면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이 못난 자식을 위해 얼마나 오래 시간을 기도하실까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그 순간만은 어머니와 나는 함께 있다고 믿어졌다. 늘 어머니께서 잘 부르시던 찬송을 생각했다. 그 찬송은 지금도 찬송가를 보지 않고도 혼자 부를 수 있다. 43년의 질곡도 내게서 신앙을 빼앗아가지는 못했다.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 주실 이 주 예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찬양했을 때에 그 발에서 착고가 풀렸습니다.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더라고 했습니다. 무디 목사의 유명한 찬송 인도자였던 생키가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생키 선생님, 남북전쟁 당시 북군으로 참전한 일이 있습니까?” “네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남군으로 참전했는데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북군의 파란 군복을 입고 있었죠. 하늘엔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고 당신은 제 사정거리 안에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막 당기려는 순간 당신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찬송은 저의 어머니께서 늘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었습니다.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저는 도저히 당신을 향해 총을 쏠 수 없었습니다.” 생키는 그를 꼭 껴안은 채 하나님의 돌보심을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불렀던 생키의 찬양이 결국 자신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한 삶은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에베소서 5:20절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5장18절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불평이 가득하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감사제목을 찾아서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힘써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성령은 그 자체가 역동성이 있기 때문에 내 안에만 가두어 두면 안 되고 흘려 보내야 합니다. 그때에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어제 한충신목자님도 자신이 요회 목자 직분을 감당하고 양들을 섬기게 되었을 때에 죄의 세력도 이기고 자신도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이 이론적이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족해도 열심히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말씀을 힘써 전하고 가르칠 때에 강력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시편 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성령께서 능력을 발휘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작은 죄라도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비행기 엔진을 점검하는 사람들은 비행기가 뜨고 내릴 때마다 철저하게 엔진을 점검합니다. 조금이라도 엔진 내부에 찌꺼기가 있으면 엔진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깨끗이 청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루를 출발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숨은 죄가 없는지. 죄의 찌꺼기가 없는지. 쓴뿌리들이 없는지 점검하고 겸손하게 회개하므로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30절에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9절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 즉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죄의 찌꺼기가 쌓이면 성령께서 근심하고 아파하십니다. 성령께서 자꾸 질식되는 것을 느끼십니다. 죄의 쓰레기 때문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진실되게 죄를 회개함으로 내 안에 쌓이기 쉬운 죄의 쓰레기들을 내다 버려야 합니다. 컴퓨터도 수시로 휴지통을 비우고 바이러스를 제거해야 하듯이, 우리도 수시로 죄를 회개함으로 우리 내면을 정결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습니다. 


  일곱째로, 서로 서로 사랑의 종노릇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보면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적인 것인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는 섬김의 종이 될 때에 육체의 기회, 즉 죄가 틈타지 못하게 됩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은 얼마나 서로 잘 싸우고 시기하고 인간갈등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서로 서로 나누고 섬기고자 했을 때에 인간갈등의 죄에 빠지지 않고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성령님은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입니다. 장작도 하나 보다는 여러 개가 서로 함께 모였을 때에 잘 탑니다. 성령의 역사도 수양회나 예배 등 성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잘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120문도가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예배나 파트모임등 하나님의 모임을 소중히 여기고 영적 환경을 이루고 서로서로 섬기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주일예배때 일찍 와야 합니다. 앞자리부터 앉아야 합니다. 일찍 와서 기도도 준비하고, 이 예배 가운데 성령께서 임재하실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처럼 성령의 그릇을 이루고 사랑으로 종노릇할 때에 영적 환경을 이루어야져서 그 모임에 성령이 충만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처럼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물었습니다. 그러자 데레사 수녀는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 손에 쥐어진 연필일 뿐입니다.” 그녀가 사랑의 종노릇 하기에 힘썼을 때에 가는 곳마다 성령의 공동체를 이루고 사랑과 화평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 충만한 자에게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22, 2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주장하고, 내 생각을 지배하고, 내 안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실 때에 내 삶이 점점 변화가 됩니다.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소원이 달라지고 꿈이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내면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깊이 사귀고 교제하고 친해질 때에 성령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6:17절에 “주와 연합하는 자는 주와 한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성령과의 신비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하셨습니다. 부부도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때에 그 연합됨의 열매로 사랑스런 자녀들이 태어납니다. 부부를 닮은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어 연합하게 될 때에 성령님을 닮은 아름다운 내적 열매가 맺게 됩니다. 자녀가 태어나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엄마 뱃속에 잉태가 되고 자라서 아이가 태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도 하루아침에 열리지 않습니다. 성령과 교제하며 연합해 나아갈 때에 5년이 가고 10년이 가고, 20년이 지나게 되면 그 내면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됩니다.


 23절을 보면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다니엘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구덩이에 던져 넣고 감옥에 집어놓고, 사자굴에 던져도, 성령께서 그들의 내면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들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더 빛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19절을 봅시다. 19-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고 육체를 좇아 행하면 육체의 일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육신의 소욕을 좇아, 육신이 원하는대로, 육신의 본성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 살게 되면 반드시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은밀히 죄악된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선한 열매를 맺고 싶어도 안됩니다.


  로마서 8:5-7절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 도 없음이라” 고 했습니다. 


 세상 죄와 짝하여 사는 세상 사람들은 세월이 갈수록 세상 죄 때문에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내면에서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행동하나 하나에 사랑이 묻어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습니다. 힘든 일을 만나도 별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시련이 닥쳐와도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잘 참고 견딥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어찌하든지 돕고자 합니다. 게으르고 혈기로 가득 찬 사람이 충성스럽고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에 유혹이 닥쳐와도 잘 이겨내는 절제의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점점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가리켜서 성화, sanc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서 육신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성령께 속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는 길을 떠날 때에 항상 기름을 확인합니다. 기름이 중간에 떨어지면 차가 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를 출발하면서 우리안에 성령의 기름을 체크합니까? 날마다 새벽이 양식먹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출발합시다. 그리할 때에 하루가 성령으로 충만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