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회 메세지
2008년 여름수양회 주제 3강(이다윗)
가서 제자 삼으라
말씀 : 마태복음 28:1-20
요절 :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아쉬운 수양회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한 여러분들의 얼굴이 천사처럼 밝게 빛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진 마리아와 제자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나 첫 사랑을 회복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과의 첫 사랑의 감동이 더 뜨거워지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감당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1. 그가 살아나셨느니라(1-15)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안식 후 첫날 새벽 먼동이 틀 때였습니다. 이른 새벽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들려 고통 받는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보이면 ‘미친년’ 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다가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부모님도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길 잘했습니다.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부담스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내 쫓아 주시고 온전케 해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더럽고 추한 자신에게 다가와 귀신을 쫓아내주고 온전케 하신 사랑의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곁에서 평생 섬기고자 따라 다녔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그녀의 삶은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군병들에게 체포를 당하시더니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혀버렸습니다. 십자가에 벌거벗긴 채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너무나 슬펐습니다.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애통하며 통곡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리아는 불쌍한 예수님께 마지막으로 향유라도 부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이른 새벽에 향유를 들고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우르릉 쾅쾅’땅이 갈라지며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허무한데 굴복하던 피조물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비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큰 지진이 일어난 후 하늘로부터 번개 같은 형상을 하고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천사가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굴려 냈습니다. 그리고 돌 위에 딱 걸터앉았습니다. 졸며 무덤을 지키던 군사들은 이 모습을 보고 두려워 죽은 자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돌 위에서 천사는 마리아 자매님을 앞에 놓고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다같이 5절,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아멘, 아멘. 태양이 떠오는 광명한 아침에 부활의 메시지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은 죽음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지구를 박차고 솟구치는 우주선처럼 예수님은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과 환희의 순간입니까? 그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을 때에 선은 악에게 패배를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빛이 어두움에게 삼키운 바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정의는 무덤에 장사되고 불의가 승전가를 부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단마귀의 권세아래 무릎을 꿇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He is not here, He has risen. 이는 통쾌한 역전의 소식이요, 승리의 소식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죽음이 인생들의 왕 노릇하였습니다. 우리를 사망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꼼짝 못하게 큰소리를 쳐 왔습니다. 너 죽인다 하면 아무소리도 못하고 시키는대로 해야 했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며 지배했던 징기스칸이나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들도 이 사망권세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죽음에 굴복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안전한 한우고기를 먹는다고 해도, 무공해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고 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의술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인간의 사망률은 여전히 100%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 인생들은 한계적이 되고 절망적이 됩니다. 무기력과 허무주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을 박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원수 사망을 박살내셨습니다. 더 이상 죽음 앞에 떨지 않아도 됩니다. 더 이상 죽음이 쏘는 독소인 허무주의, 운명주의, 패배주의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두려움과 절망과 무기력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망을 향해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외치며 죽음을 비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가 사망을 비웃기라도 한 듯 통통 뛰며 살아났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죽음 앞에서 부활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 앞에서 사망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대한 통쾌한 승리요 영원한 승리입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둘째,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증명해줍니다. 예수님은 자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마침내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께서 죽은 후에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자기 죄 때문에 죽은 것인지 우리 죄를 위해 죽은 것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모두 죽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죽으셨다면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 죄가 분명히 대속되었음을 증명해줍니다. 세상 누구도 우리 죄를 대속해 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를 사랑하는 부모님이라 할지라도, 동역자라 할지라도 우리 죄 문제만큼은 어떻게 대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사죄의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없습니다. 자의식과 정죄의식이 시달릴 때면 예수님이 정말 내 죄를 대속 하신 것이 맞을까?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온전히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셋째로 우리 인생들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영생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아담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부활하신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부활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다 첫 열매인 예수님을 따라 부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합니다. 부활해도 지금처럼 통통 부은 뱃살 몸매로 다시 부활한다면 별로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전공공부와 직장일로 피곤한 세상에 다시 부활한다면 큰 기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하는 부활은 그렇게 시시한 부활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고 강하고 썩지 않을 하늘 형체의 부활입니다. 각종 과일과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진 하나님나라의 부활입니다. 그곳에선 더 이상 몸매 걱정, 기름 값 걱정, 취업 걱정, 자녀교육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먼저 간 믿음의 선배들과 먹고 마시는 기다려지는 부활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부활의 메시지를 전한 뒤 천사는 마리아 자매님께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를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는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말합니다. 여인들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랑하는 예수님 때문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겨우 무덤에 찾아왔습니다. 이런 연약한 여인들에게 천사는 좀 쉬었다 가라 하지 않고 빨리 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인 방향 같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복음은 빨리 전해야 합니다. 이는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을병으로 고통 받는 가족을 치료할 신약을 발견했다면 느긋하게 양반걸음으로 갈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빨리 가야합니다. 빨리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천사의 방향에 여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부활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은 두려움과 기쁨이 가득한 모습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신발은 벗어 오른손으로 들고, 치마를 왼손으로 붙잡고 100m 달리기 선수보다 더 빨리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른 새벽에 제1회 겟세마네 우먼 부활 달리기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무덤에 올랐던 여인들이 어떻게 100m 스프린터가 된 것인가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백년 묶은 산삼이라도 하나 캐 먹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들은 사도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오뚜기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성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날마다 나는 죽노라 외치며 스피릿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의 복음을 들을 때 죽어가는 자가 살아나게 됩니다.
만성 활동성 간염으로 죽어가던 저도 부활의 복음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전남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교직발령을 받았지만 만성간염 때문에 친구들 교직으로 나갈 때 저는 고향에 내려가 요양을 해야 했습니다. 심한 불면증으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동네 죽어가는 어른들을 보면서 얼마 있으면 나도 저들처럼 되겠지 하며 슬픈 마리아처럼 살았습니다. 이런 제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내가 믿느냐” 하신 부활의 복음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죽어가던 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발을 들고 뛰어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한 마리아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부모님, 친구들, 전남대 보건소 관리 대상 학생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오토바이를 사서 전대병원 2층 내과병동 환자 대기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생나간 후배들과 교수 방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싶어 몸이 간질간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송장처럼 살던 저를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요즘은 다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여인들의 모습으로 살 때가 많았습니다. 토요일 오후 피싱을 위해서 기숙사를 오르는 길이 겟세마네 언덕처럼 힘들에 느껴졌습니다. 가끔은 비가 핑계되고 가지 않고자 비가 오길 기대할 때도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나이가 먹어서 오는 자연스런 증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리산 천왕봉도 가볍게 올라갈 정도로 건강은 좋아졌습니다. 문제는 부활의 복음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쉬는 토요일이 되면 긴장이 풀려 TV를 켜고 가족이 나와 노래하는 아침마당 프로그램부터 잘 먹고 잘 살자 까지 1~2시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세상 복음을 들을 때 힘 있게 기숙사에 오늘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죄인이 세상 복음을 들었던 것을 회개하고 부활의 복음을 듣길 기도합니다. 토요일 아침에 집에서 나와 센터로 가서 말씀을 묵상하기 기도합니다. 이럴때 마리야 자매님들처럼 부활의 복음을 들고 힘 있게 캠퍼스로 달려가 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전속력으로 뛰어가던 마리아자매님에게 나타나 ‘샬롬 평안하느뇨’하며 인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예수님을 붙들고 경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서워 말고 갈릴리로 가서 형제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
Ⅱ. 가서 제자를 삼으라
16절을 보십시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열한 제자들은 갈릴리 산으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을 모여 놓고 말씀하십니다.
18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사단에게 넘겨졌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시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엄청난 권세를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이른 아침 민방위 교육 나갈때면 출석 확인하는 통장의 권세가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는 얼마나 대단합니까? 광풍을 잔잔케 하고 귀신도 쫓아내는 권세입니다. 죽은자도 살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와 같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 벌벌 떨며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며 부인하던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을 때 3천명을 단번에 회개시켰습니다. 죽은 여선지 다비다도 일어나라 한마디로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엄청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럼 왜 이런 권세를 주신 것인가요? 풀이 죽어 있는 제자들의 어깨를 쫙 펴주고자 주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9-20절을 다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었으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 만 원짜리 하나만 주어도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가야 합니다. 모든 족속으로 나가야 합니다. 제자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지 못할때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갔습니다(마 10: 6).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갈릴리와 유다지역으로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갈릴리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복음전파는 경한 일이요, 전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 말씀하십니다. 환갑 나이가 되면 외국에 살다가도 고향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임이삭, 임리브가 선교사님은 환갑의 나이에 거꾸로 후진국 모슬렘 국가인 키르키스탄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송철수 목자님이 곧 영국으로 나갑니다. 말도 잘 못하고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그가 어떻게 영어를 정복하고 키 크고 콧대 높은 대영제국 양들을 섬길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나가기 때문에 염려할 것 없습니다. 영어정복은 경한 일이고 머지않아 똑똑하고 키 큰 영국 양을 섬긴다는 소식이 올 것입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의 토마스 목사는 대학을 갓 졸업한 24세 때 중국으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 그가 어떻게 위험하고 힘든 중국 선교사로 나갈 수 있을까 염려하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 비전에 불타 당당하게 중국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중국에서 1년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는 큰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슬픔에 빠져 절망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만난 뒤 조선으로 가라 하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27세 때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 선교사로 왔습니다. 그러나 배가 침몰되었습니다. 침몰된 배 위에서 그의 목을 칼로 내리치는 군인에게 성경책을 건네주며 순교하였습니다. 그 때 성경을 건네받은 군인이 후에 장대현 교회 최초의 교인이 된 박춘곤이었습니다. 어떻게 20대 어린 나이에, 아내를 잃은 슬픔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조선의 선교사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요? 목을 내리치는 군인에게 평안하게 성경책을 건네줄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덧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덧입을 때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며 당당하게 선교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목을 치는 군인에게 성경책을 건네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으로 가서 제자 삼으라 말씀하십니다. 다시한번 1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은 장사하거나 여행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민족에 가서 제자를 삼으라 명령하십니다. 본국 양 제자양성 하는 것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방 양을 제자 양성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 제자양성을 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제자는 스승 옆에서 배울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스승님께 스스럼없이 나가서 물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처럼 예수님께 들며 날며 말씀의 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곁에서 섬김과 사랑을 받고, 말씀과 기도를 배우길 원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세리 레위는 심히 이기적이고 부담스런 자였습니다. 이런 자는 옆에 있기만 해도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제자 삼았습니다. 한없는 사랑으로 그의 허물과 약점을 감당하시며 섬겼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세계적인 말씀의 종이 될 비전을 심어주셨습니다. 이럴 때 이기적인 세리 레위가 위대한 성 마태가 된 것 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마태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를 제자삼기 원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자가 되길 원하면서도 제자가 되는 것은 부담스러워합니다. 제자의 삶은 왠지 멍에를 맨 것처럼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이 축복입니다. 이름 있는 교수들은 아무나 자신의 제자로 삼지 않습니다. 광주과학기술원 교수들은 자신의 제자를 선발할 때 엄격한 자격 기준을 요구합니다. 최소한 4.1이상의 성적과 토익점수도 750점 이상, 유능한 프리젠테이션 능력을 요구합니다. 그것도 소수 몇 만 제한해서 받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제자는 아무런 자격기준이 필요 없습니다. 인원 제한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여름 수양회에 참석한 양님들을 모두 제자 삼고자 합니다. 유명한 교수의 제자가 되는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특권이요 은혜입니다. 그것도 시험하나 보지 않고 될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는 말씀 한번 듣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배 한번 나오는 것으로 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도와야 제자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저희가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고 지킴으로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셨으면 최종 결론에서 명령조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 삼을 수 있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도 주십니다. 이뿐 아닙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고 약속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모든 족속을 제자 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을 보면, 그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제자 삼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저희들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일을 먼저 감당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 권세를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모든 권세를 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시는 것입니까?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 삼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제자양성의 사명은 예수님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명입니다. 저희가 이 사명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먼저 감당하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