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사랑 합니다

 

말씀 / 요한복음 21:1~25

요절 /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의 에필로그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이 자신의 기록 마지막에 꼭 덧붙여 강조하고 싶었던 사건이 바로 이 시간 함께 볼 디베랴 바닷가의 사랑의 향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꿈이 깨어진 아픔과 실의, 낙망과 실패의식 가운데 빠진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셔서 숯불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로써 제자들과의 관계성, 특히 수제자 베드로와의 깨어진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그들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부흥시켜주십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슨 이유에서든지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이 멀어지는 경우가 자주 생깁니다. 때로는 상황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항상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지 본문의 디베랴 바닷가에 그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이 시간 저희가 함께 사랑의 바닷가로 달려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두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의 다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지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하여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가 심방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감격하며 기뻐하였지만 정작 그 마음은 실패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 돌아오신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갔던 자신들의 과거까지 소급하여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을 본 도마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큰소리를 쳤던 자신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 좌우편에 세워 달라 요구하면서도 그 자리가 십자가인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속없는 자신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누구보다도 수제자 베드로는 바로 열흘 전 스스로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던 배신자요 실패자인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예수님을 마주 보기도 부담스러웠습니다. 이런 자의식 때문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실 때마다 매번 깜짝깜짝 놀랬고, 또 슬금슬금 피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부활을 믿는 믿음은 있었지만, 제자로서의 자신의 삶에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지만 제자들은 그 마음이 무너져 여전히 일어설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포기치 않으시고 오늘 “또” 한번 찾아가고 계십니다.

 

이 때 제자들은 그 바닷가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이때 갈릴리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였습니다. 마가복음 14장 28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천사를 통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기다리고 계심을 전해주셨습니다.(막16:7)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자들은 실패한 자신들을 예수님께서 왜 다시 부르시는지 부담스럽고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도 넷은 어디로 숨었는지 알 수 없고 열 한명 중 일곱 명이 마지못해 갈릴리로 향했습니다.(2)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호수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으로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불러주신 곳입니다. 가슴 설레는 첫 만남의 장소요,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제자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예수님을 좇기 시작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에 도착한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제1회 갈릴리 여름수양회에서 십자가 말씀을 눈물콧물 흘리며 듣고 “제가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대표소감 발표하던 것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해 장막생활을 시작했던 일,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첫 fishing을 나가던 때가 기억났습니다.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그 때의 추억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서, 현재의 실패자요 배신자인 자신의 모습이 더욱 더 저주스럽고 한탄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처음 예수님을 만난 그날이 생각났고, 예수님과 함께한 지난 3년 동안의 은혜와 감격이 주마등처럼 그의 머릿속에 펼쳐졌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님은 빈 그물을 들고 절망가운데 있던 그를 찾아와 실패를 만회시켜주셨고, 거룩한 사명인의 삶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의 은혜에 감동하여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자신의 빈 배를 고기로 가득 채워주셨던 예수님은 과연 그의 기대대로 대단하신 분이셨습니다. 여러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보리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기도 하셨습니다. 광풍을 잠잠케 하시기도 했으며, 바다 위를 육지처럼 걸어오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평소 베드로가 쳐다보지도 못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어르신들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헤롯왕에게까지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평범한 갈릴리 촌부에서 국가 핵심 인사들의 견제를 받는 요주의인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실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만 오면 예수님께서는 왕이 되시고 자신은 총리가 될 것이라 기대를 했습니다. 연말에 있는 대선이 남의 일처럼 생각되지 않았고,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누가 대표로 뽑혀 나올 것인가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그렇게 믿었던 예수님이 너무나도 무력하고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에게 큰 충격이요 절망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고 운명하셨던 모습을 생각하기만 하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힘 있게 장담하고도 세 번이나, 그것도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사실은 아무리 잊으려고 몸부림을 쳐도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매일 새벽녘이 되면 구슬픈 닭울음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배신자 베드로! 실패자 베드로!” 누군가 자신을 정죄하는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을 깨기를 잘했습니다.

3년 만에 디베랴 바닷가에 다시 선 베드로는 할 수만 있으면 처음 예수님을 만난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과 함께 마냥 즐거웠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해변에 둘러앉은 제자들은 누구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멀리 들리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가끔가다 누군가가 내뱉는 깊은 한숨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에이~ 이러고 앉어 있어서 머더겄냐!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갈란다!” 이에 다른 제자들도 머릿속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앞 다투어 따라 나섰습니다. “그래 그러자, 나도 같이 갈란다!” 그들은 3년 전 버려두었던 그물을 다시 집어 들고 녹슨 배에 올라 바다로 향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밤새도록 수고한 결과가 어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시몬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들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피라미 새끼 한 마리 잡을 수 없었습니다. 텅 빈 그물을 말아 쥔 베드로의 두 눈에는 왕방울만한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곁에 없을 때, 그는 3년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빈 그물을 들고 있습니다. 자신은 제자 생활도 실패하고, 자기의 전공인 고기잡이에서도 실패한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는 실패자요 배신자였습니다.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그날 밤이 처절하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처럼 예수님을 부를 때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이 빈 그물 위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절망의 밤이 다 지나가고 멀리 먼동이 터올 때,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빛과 함께 소망의 주님, 희망의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4) 어슴푸레 밝아오는 디베랴 바닷가에 서서 밤새도록 헛 그물질 하는 제자들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인자한 예수님의 음성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고요한 아침 바다에 울려 퍼졌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이 말은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그 사랑하는 아이들을 부르듯 따스한 음성으로 “얘들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요 실패자인 그들에게 조금의 정죄도 하지 않으시고 여전한 사랑으로 그들의 슬픔과 상실감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보다도 현재 눈물짓고 있는 제자들의 슬픔과 아픔 때문에 더 크게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고자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익숙함을 의아해하며 그물을 오른편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제자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자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3년 전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자들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셨습니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때보다도 물고기가 더 많아서 그물을 배 위로 들 수조차 없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오히려 더 많이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실패를 사랑으로 만회시켜주시는 예수님의 방법에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조금씩 떠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물고기를 보며 다른 제자들이 흥분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이거 분명 어디선가 본 광경인데..”하며 어리둥절해있었습니다. 그 때 눈치 빠른 요한이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깜짝 놀라 벗고 있던 겉옷을 황급히 입은 후 거침없이 물속으로 뛰어 들어 예수님을 향해 헤엄쳐갔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무의식가운데서 그가 얼마나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반복되는 사랑의 심방이 죄의식으로 인해 도망만 다니던 베드로로 하여금 복잡한 생각과 자의식을 걷어내고 다시 사랑의 바다에 몸을 던지게 만든 것입니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 보자 그곳에는 빨간 숯불이 따뜻하고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숯불 위에 맛있는 떡과 생선을 못자국난 손으로 친히 굽고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권능의 주, 만유의 주께서 배은망덕한 제자들을 위해 친히 아침밥을 짓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괜스레 먼저 달려온 베드로는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숯불보다 더 빨개진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온 제자들도 예수님의 시선을 피하며 서로 뒤에 서려고 보이지 않는 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듯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며 분위기를 바꾸셨습니다. 베드로는 민망한 김에 얼른 가서 그물을 끌어올려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기를 153마리까지 일일이 세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도마 위에 고기들을 올려놓고 "이 고기를 가져갈까, 저 고기를 가져갈까!" 뜸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마음껏 나아오지 못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넘치는 사랑과 용서의 음성으로 그들을 부르십니다.

다함께 12절 상반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와서 조반을 먹으라” 이 얼마나 풍성한 사랑과 용서의 음성입니까? 배신자인 제자들의 처지를 볼 때 “와서 징계를 받으라” 말씀하시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드넓은 모래사장을 오리걸음으로 돌게 하시거나, 한 명 한 명 불러 세워 ‘니가 그럴 수가 있냐’ 서운한 말이라도 한마디 표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마음으로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제자들을 향한 배신감과 서운한 마음도 함께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며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새롭게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허물을 언급조차하지 않으시고 오직 “와서 조반을 먹으라” ‘어서 와서 밥 먹자’ 처음과 동일한 사랑의 음성으로 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날 아침식사의 메뉴는 표면적으로는 떡과 생선이었지만 그 의미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내어놓으신 자신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못자국난 손으로 떼어주시는 떡과 생선은 바로 십자가에서 찢기시고 상하셨던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이기시며 이날 아침식사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떡과 생선을 받아 물고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메었습니다. 이로써 이 날의 아침식사는 이 땅에서 두번째 이루어진 성만찬식이 되었습니다.

디베랴 바다의 성만찬식은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 인간의 죄악됨과 연약함은 끝이 없어, 수 없이 사랑을 받고도 쉽게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라놓고,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유아시절로 돌아가 버리는지 그 한심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이해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한다 고백할 때이든, 하나님을 부인하며 모른다 할 때이든, 실패감에 빠져 도망을 다닐 때든, 아니면 아무생각이 없을 때든, 변함없이 우리를 향해 한결같고 영원하십니다. 디베랴 바다의 파도가 창세 이래 수천 년 동안 수없이 해변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듯,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굳은 마음에 때로는 잔잔한 파도로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해일로 부딪히고 부딪히고 또 부딪혀 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 한번, 두 번, 세 번 그들의 마음에 사랑으로 끝없이 부딪히셔서 결국 제자들의 굳은 마음이 무너져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날 디베랴 바다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숯불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여줍니다. 숯은 이미 한번 불에 완전히 연소된 적이 있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연료입니다. 그런데 한번 이 숯에 불이 붙으면 그전에 통나무였던 때보다 더 오랫동안 더 뜨겁게 타오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십자가에서 한번 뜨겁게 자신을 태워 그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사 숯불과 같은 사랑으로 더 뜨겁게 타올라 그 사랑으로 제자들의 완악한 마음을 녹아내리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내세울 수 없고, 내세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이 실패자이든, 배신자이든, 그보다 더한 어떤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 심령을 바로 세워주시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뜨겁게 부흥토록 하실 것입니다. 이 뜨겁고도 끝이 없는 예수님의 사랑의 음성이 이 시간 우리를 사랑의 만찬식으로 초청하십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Ⅱ. 주여 사랑합니다.(15~25)

 

예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떡과 생선을 눈물에 말아 식사를 마친 제자들의 얼굴에는 하나 둘씩 눈물자국이 말라가고 미소가 생겨났습니다. 요한은 어느새 습관대로 예수님의 품에 안겨있었고, 도마는 못자국난 예수님의 손을 꼭 잡고 놓을 줄을 몰랐습니다. 마지막 식번이었던 나다나엘이 설거지까지 마치고 났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죄사함의 은혜로 잔잔한 평안이 흘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끝없는 사랑을 베푸신 후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한 가지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고백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베드로와의 사랑의 관계성을 온전히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처음 그를 이 바다에서 만나 제자로 부르셨을 때나,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 그리고 지금 다시 만난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한결같이 그를 사랑하고 계셨고, 십자가와 사랑의 비치파티를 통해 그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는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너를 사랑했고,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묻고 계십니다.

사랑은 모든 관계성의 근본이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었다할지라도 사랑의 불씨만 남아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를 지탱해주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어져 끝장이 났을지라도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만 남아있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말씀에서 숯불에 비유되어 나타나있습니다. 보통의 불씨는 훅~불면 꺼지지만 숯불은 숨을 불어넣으면 오히려 빨갛게 살아납니다. 때문에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그것이 살아있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불을 지펴낼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심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작지만 살아있는 사랑의 불씨를 찾아내게 도우십니다. 그리고 이제 그 불씨에 사랑의 숨을 불어넣어 우리 마음에 큰 불을 내시려 하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말씀 앞에 식어진 우리의 사랑이 새롭게 부흥되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이 뜨겁게 타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은 베드로가 현재적으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 과거형으로 확인하지 않으셨고, “앞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겠느냐” 미래형으로 약속을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현재적으로 물으심으로 그에게 지금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 살아있는 사랑고백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항상 처음이 가장 뜨겁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식어지고 무뎌집니다. 때문에 가장 뜨거운 사랑은 지금 이 순간 시작하고 지금 이 순간 타오르는 현재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현재적인 사랑고백을 함으로 그가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새로 뜨겁게 시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21장 말씀은 매년 여름수양회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 말씀입니다. 때문에 여기 앉아계신 분들 중에는 이 말씀을 수차례 듣고 내용을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설레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사랑고백을 원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현재 내게 물으시는 물음이고, 현재 내가 드리는 사랑고백입니다. 2007년 7월 17일 현재 이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눈을 들여다보시며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이 물음을 들은 베드로의 대답이 어떠합니까? 15절하반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분명 베드로도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을 때 지체치 않고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나아온 것만 보아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러나 큰소리치고도 예수님을 배반했던 전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 한마디가 목에 걸려 쉽게 나오지가 않았습니다. 전처럼 연약함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쉽게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 같아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과거에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배반의 사람이었고, 장차도 제대로 사랑할 것이다 장담할 자신이 없는 연약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간접적으로 돌려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겸손하고도 진실된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과거 자신의 열심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의 근거를 예수님께 두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연약하여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함을 아시고, 또 연약하지만 주님의 뜨거운 사랑 앞에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제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나를 볼때 자신이 없지만, 나를 모두 아시고 끝까지 사랑하실 예수님의 사랑을 기초로 고백합니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진실하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의 내면에 있던 모든 절망과 슬픔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써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관계성이 온전히 회복 되고, 전보다 더 뜨겁게 타올라 실패자 베드로를 사도행전의 역사를 이룬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실의와 절망에 빠져 주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섬겼지만 떠나간 양들로 인해, 실패한 전공으로 인해, 갑자기 닥친 가정의 어려움이나 건강문제로 인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을 잊게 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외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우리 마음이 연약하고 죄에 넘어져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이 단절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실패의식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진심에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를 찾아내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초로 고백해야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가운데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진실 된 사랑을 고백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고백을 받으시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와 같은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숯불과 같은 사랑으로 우리의 상처 난 심령을 고쳐 주사 다시금 소망의 인생, 믿음의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연약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부흥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끝없는 사랑의 예수님은 이 죄인의 인생에도 찾아오셨습니다. 저는 위로 누나 다섯을 두고 막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을 완도에서 보내게 된 저는 끝없이 펼쳐진 다도해를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며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장난을 좋아하고 개구쟁이 기질이 다분했지만, 저는 힘들게 얻은 아들에게 거는 부모님의 기대를 알았기에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제법 착하고 성실하게 자랐습니다. 인생에 대한 문제의식이 많아서 유치원을 다니면서 다른 친구들이 요구르트를 가지고 싸울 때 저는 ‘사람은 왜 사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사람은 왜 사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나를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위해 사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광주로 유학을 온 후로 이 목표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외롭고 힘든 자취생활을 부모님 사진 한 장으로 견뎌냈습니다. 잘난 광주 아이들을 제치고 1등을 한 성적표를 들고 방학이 되어 집에 내려갈 때면, 환하게 웃으시는 부모님의 웃음 한 번에 그간의 모든 고생이 씻어졌습니다. 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 친구들 통해 알게 된 정욕은 저의 모든 의지를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부모님 사진액자를 엎어놓고 정욕행위를 하고나면 밀려드는 죄의식과 수치심에 견딜 수 없게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부모님을 생각해도 이러면 안되는데...’생각하면서도 음란물 브로커 친구와 친하게 지내려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깊은 절망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고3시절 겪게 된 IMF와 수능실패는 제게 큰 허무함을 안겨주었습니다. 나라를 살리는 금모으기 운동이 금방하던 우리집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너만은 날개를 활짝 펴게 해주고 싶었는데..’하시는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연약한 말씀에 저는 제가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드릴 능력도 없고 또 근본 부모님이 제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완도 앞바다 방파제에 앉아서 소주 3병을 마시고 허무와 절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그만 마치려했지만, 겨울바다가 너무 춥게 보여 죽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로 인생의 빈 그물을 들고 고통 하던 제게도 찾아와 그 사랑으로 제 그물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98년 여름 수양회를 통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을 눈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에 대표소감 발표하러 나와서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 외쳤습니다. 삶의 새로운, 그리고 진정한 목적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배우며 캠퍼스 시절을 기쁨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구름 너머로 예수님이 나를 향해 미소 지으시는 것 같아서 길을 가다가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 흘릴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양 때부터 피싱을 나가서 적극적으로 내가 만난 이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열심히 율동하고, 듀오드라마, 말씀을 섬겼습니다. 한 해 동안 말씀을 네 번 통독하고, 매주 팀 보고서에 양식 7번, 기도 7번, 1:1 7팀 쓰리쎄븐을 기록하며 동역자들에게 부담을 주었습니다. 나름대로의 열심을 드릴 때 유난히 많은 우리 팀 동역자들 중에서도 단연 내가 수제자다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신 군대생활을 통해 곧 죽을 것 같은 어려움 속에서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반드시 승리케 하심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함없이 죄악 되고 연약하지만 변함없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깊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역 후 센타에 돌아오려할 때, 파트동역자의 90%이상이 센타를 떠나버린 현실에 절망이 되었습니다. 사시준비를 위해 군대에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내게 역사를 섬겨주기를 기대를 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조용히 십자가를 내려놓고 나도 센터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강권하사 수양회 가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하시고 그렇게 참석한 그해 여름수양회에서 자기를 구원하지 않는 왕 예수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부담스럽다며 버려둔 그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묵묵히 매달려계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을 보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눈물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다시 불러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맡기신 양들을 섬기고 또 준비하는 사법시험에 열심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말씀을 섬기면서 제가 또 다른 모양으로 자신이 실패자임을 주장하며 예수님과의 사랑이 식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한번 센타를 떠난 기억은 깊은 실패의식과 자의식이 되어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를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끌려서 돌아오기는 왔지만, 목자로서 실패했다는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합격하여 영향력 있는 학사 목자가 되면 그때서야 다시 목자로 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앞에 나서 열심히 섬기는 것이 부담스러워 되도록 단상에 오르는 일을 피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사람들 눈치 보며 센터에서 버티는 것마저도 힘이 들 때면 “주님 왜 나를 다시 부르셨습니까?” 원망하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내 머리에 있었지만, 가슴으로 주님과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 것은 꽤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식어진 마음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그나마 열심을 내어 사법시험에 도전했는데, 이제 올해로 세 번의 빈 그물을 들어올리자 ‘이제 난 뭘 해도 안 되나보다’ 눈물만 흘렀습니다.

그러나 광주에 내려와 실패의식을 곱씹으며 힘들어 하던 제게 주님은 마가복음 말씀으로 힘을 주시고 기도의 자리마다 그 사랑의 파도로 끊임없이 부딪혀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말씀을 맡기심으로 내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를 찾아 불을 지르려 하십니다. 실패자임을 주장하며 자꾸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하던 제게 주님은 말씀으로 물으십니다. “경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 앞에 제 마음을 돌아봅니다. 사실 저는 예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제가 연약하고 어리석어서 혼자 떠났다 돌아오고 넘어지고 실패하며 난리를 쳤지만,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도 잘 알고, 또 그 주님을 저도 정말로 사랑합니다. 과거의 실패의 경험과 여전히 어리석은 자신을 생각할 때 섣불리 용기가 나지 않지만, 십자가에 죽기까지 저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이 사랑고백을 기초로 한 양을 사랑하고 먹이는 목자의 삶을 힘써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전에는 자기의가 높아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조금도 이해할 줄 몰랐는데, 이제는 내가 탕자가 되어보니 아무리 힘든 사람이라도 웬만큼 이해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는 8년된 창업이, 9년된 일권이를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섬길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저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초로 목자로서의 열심을 회복하여 맡기신 김일권, 백창업, 허완, 이상욱, 선종기 형제들을 끝까지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 반복하심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의 실패까지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의 사랑고백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깨달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무리를 맡기십니다.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 받은 끝없는 사랑을 기초로 이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양들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사랑을 전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었고 수 많은 사상과 이념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예수님의 이 사랑의 계승 역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끝없는 사랑을 깨닫고 사랑고백을 한 우리에게 그 바톤이 넘겨졌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양들에게 전하는 이 사랑의 역사의 계승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