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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5백 선교사의 어머니, UBF 설립자 사라배리

나이 잊은 선교 열정… “연변·북한에 성경 가르치고 싶어” [2008-04-18 11:32]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 UBF를 설립한 사라 배리(한국명 배사라) 선교사와의 인터뷰를 잡고 UBF 관련 자료들을 찾아 읽었다. UBF와 사라 배리 선교사를 알면 알수록 만남이 더욱 기다려졌다. 그녀의 삶이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그녀는, 1961년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에 선교사로 자청해 들어온다. 그리고 그녀가 설립한 UBF(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는 우여곡절을 딛고 한국 최대 선교사 파송단체로 성장했다.

배리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16일 오후 종로 5가에 있는 UBF 본부를 찾았다. 기자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갈색 눈동자에 백발이 성성한 사라 배리 선교사가 소녀같은 미소를 지으며 들어왔다. “정말 반갑습니다.”

▲UBF 본부 이사무엘 목사 집무실에서 만난 사라 배리 선교사. 그녀는 한국이 자신의 영적 고향이라고 말했다. ⓒ고준호 기자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배리 선교사는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인자함과 따스함이 여유롭게 묻어나는 미소를 보며 설마했지만 정말 인터뷰 내내 ‘교과서 적’인 대답들만 돌아왔다. 그러나 그 교과서적인 대답에는 어떤 꾸밈이 없었고, 그의 삶 자체가 정말 교과서적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국에 방문하셨습니다.

“네,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오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때부터 저와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김모세(관옥) 목사님이 하늘나라로 가셨거든요. 발인예배를 드리고 그의 고향 담양에도 갔다왔습니다. UBF가 처음 시작했던 광주에도 갔었고, 한국 사역자들도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화장실이 예뻐서 사진 찍기도… “한국이 하나님 축복으로 발전”

-한국이 많이 변했지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처음에 왔을 때 광주에 집이 다 초가집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습니다. 길도 자갈밭에서 아스팔트로 다 바뀌었어요. 가장 놀랐던 건 한국 고속도로의 화장실이었어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쁜 꽃들도 있고……. 화장실이 정말 예뻐서 사진기로 찍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화장실은 미국에도 없어요.”

그녀는 화장실 이야기를 하며 젊은 기자가 초가집이나 재래식 화장실을 본 적 있냐고 물었다. 박물관에서 봤다고 대답하니 그것 보라고, 하나님이 한국을 크게 축복하셔서 한국이 크게 발전했다고 기뻐했다.

-처음 한국에 오셨을 때 외국사람이 많이 없었을텐데 동네에서 유명하셨겠어요.

“제가 처음에 광주 시골에 있었는데 그 때 외국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동네에 나가면 어린 아이들이 많이 좇아다녔어요. 어떤 애들은 제가 사는 집 창호지 문에 구멍을 내서 저를 보기도 했었어요.”

-부담스럽거나 힘들지 않으셨어요?

“재밌었습니다. 전 한국 시골이 재미있었어요. 시골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보고, 시골 결혼식도 보고, 시골 장례식도 보고. 도자기를 만드는 것도 보고 종이를 만드는 것도 봤어요. 저는 한국에 대해 잘 몰라 한국의 풍습을 배우려고 했기 때문에 다 재미있었습니다.”

사라 배리 선교사는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한국말로 대답했다.

-한국말을 잘하십니다. 얼마나 공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잘 못합니다. 혀가 막 꼬여요. 처음에 한국왔을 때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말을 공부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2년간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국말만 공부했습니다. 외우고 암송하고……. 그리고 교회 유치원에서도 좀 배웠습니다.”

“한국이 힘들 땐 대학생들이 배움을 좋아했는데…”

-처음 한국에 오셨을 당시의 대학생들과 지금의 대학생들은 많이 다르지요?

“많이 다릅니다. 그 때 한국은 전쟁 후였고 민주화 운동도 했던 때라 학생들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갈 바도 잘 몰랐고. 그 때 학생들은 새로운 비전을 갖기 위해 배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학생들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유하고 재미있는 것도 많고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UBF가 파송한 선교사가 1천5백명이 넘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많은 열매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지금까지 활발하게 말하던 선교사가 잠시 몇 초간 숨을 가다듬더니 조용하게 “사실 내가 한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제가 한 것은 성경과 영어를 가르친 것밖에 없습니다. 지금 UBF가 일궈놓은 역사들과 나와의 사이에서 무슨 관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UBF 공동설립자)이나 전요한 목사님(현 UBF 세계대표)과 같은 여러 초창기 멤버들이 기도하고 헌신한 결과입니다.”

▲UBF 개척기 시절 고 이사무엘 선교사와 함께 전도하며 ⓒUBF 제공
-초창기 멤버들도 대부분 선교사님께서 가르치셨는데, 겸손하십니다.

“저도 가르치긴 했지만 저 혼자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 함께 가르쳤습니다.”

배리 선교사가 너무 겸손해 그 공(功)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함께 있던 이사무엘 목사(UBF 한국대표)가 거들었다. “사라 배리 선교사님은 UBF 멤버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조상,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삶의 모델이고 스승이시지요.”

그 말이 끝나기도 채 전에 사라 배리 선교사는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부담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고 손을 내저었다.

-전 세계 UBF 사역자 중 몇 명 정도를 기억하십니까?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대표를 하면서 전세계 UBF 센터들을 순회했습니다. 그 때 만난 각 지역 사역자들은 다 압니다. 그런데 최근 세워진 사역자들은 잘 모릅니다.”

-1977년부터 미국에 계셨는데, 미국에서는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한국에서와 똑같이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대부분 성경 가르치는 것에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연변과 북한에 가서 성경을 가르치고 싶어

“적절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고, 또 너무 바빠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늦긴 했지만 말입니다.”

같이 있던 사람들과 배리 선교사가 함께 웃었다. 분위기가 좀 더 화기애애해졌다.

-연세가 올해로 77세이신데 여생동안 하고 싶으신 일은 있으신가요?

“중국 연변에 가서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거기 한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북한도 가고 싶은데 북한 문이 언제 열릴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을 걸고 하는 모든 사역이 한국인에게 맞춰져있는 듯합니다. 어떤 계기로 한국에 이렇게 애착을 갖게 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젊었을 때 여기 와서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 거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또 주셨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해 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힘든 점은요?

그녀는 힘들었던 순간을 기억해내기 위해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윽고 “UBF가 광주 외에 다른 지역을 개척하려 할 때 정치적인 이유로 부딪혔던 일이 있어는데 그 때 힘들었다”고 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을 물으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제가 처음에 저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지요?”라며 다시 한 번 웃었다.

“NAE 탈퇴 사건은 내 책임… UBF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모임 되길”

-NAE(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미국 복음주의자협회)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저 때문에 생긴 일이었습니다(UBF는 NAE에 1995년 가입했다가 2003년 탈퇴당한 일이 있었다). UBF를 떠난 한 멤버가 NAE에 좋지 않은 말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NAE에서 저에게 진위 여부를 확인하려 전화를 했는데, 제가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안했습니다. 제가 설명을 안해주니까 거기서 이상하게 생각해 UBF를 탈퇴시켰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그런데 최근 NAE 대표가 바뀌었고 새 대표가 미안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올해 다시 NAE에 정식등록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본인의 삶을 정의하신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저도 선교사로서 전도 대상자들과 함께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삶인 것 같습니다.”

-UBF가 궁극적으로 어떤 단체가 되길 바라시는지요.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모임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는 모임이 된다면 없어지길 원합니다.”

-본인의 삶을 책으로 내실 계획은 없으신지.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 삶이 심심한 삶이어서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생 선교 50년 경력을 가지신 분의 이야기라면 대학생선교에 비전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될 것 같다고 말하니 웃으며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선교사는 기자가 기독교인인지, 어떤 소명을 가지고 사는지 물어 봤다. 만약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대답했으면 그 자리에서 성경을 펴고 당장 복음을 전할 기세였다. 자신의 삶을 한국선교에 바친 선교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그 복음의 혜택을 함께 입은 한국인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사라 배리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선교사며 UBF 설립자다. 1955년 25세의 나이로 한국에 처음 왔고 1961년 고 이사무엘 선교사와 UBF를 설립했다. UBF는 광주에서 시작해 대전, 서울로 뻗어나가 전국 주요도시에 지부가 세워졌고, 세계 87개국에 1천5백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1977년 미국으로 돌아가 시카고에 UBF 본부를 세워 본부에서 사역했고, 2002년부터 2006년까지 UBF 세계대표를 역임했다. 현재는 본부에서 대학생들과 UBF 사역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이민애 기자 malee@ch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