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 강

                        하늘의 복을 받을 자

말씀: 마태복음 5:1-10

요절: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은 누구나 복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다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추구하는 복의 성격이 다 다릅니다. 저마다의 행복론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어제 김전도, 승리목자님이 다윗팀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함인근 목자님의 아들 모세가 와서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사진도 찍고 하면서 ‘아 행복해’ 했습니다. 그것은 3살 먹은 모세의 행복론입니다. 우리가 지난 4장에서 살펴본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단의 유혹은 ‘사단의 행복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는 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의 행복론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행복론은 굉장히 수준이 높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이 세상의 행복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행복론을 가리켜서 ‘천국의 행복론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 원하십니다. 복을 주셔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복, 찰라적인 복, 천박한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 그 사람의 영혼을 윤택하게 하는 복, 그 내면에서 천국을 맛보게 하는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 복을 받기 위해서는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자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십니까?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의 복이 임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은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내면이 낮아지고 겸손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 자의 마음에 천국이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 많고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심령이 부요합니다. 자기 의와 자부심,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자의 마음은 그 내면이 자고하고 교만합니다. 자기 만족, 자아 도취, 자기 성취감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으니 포만감으로 충만합니다. 이런 자의 마음에는 천국이 뚫고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구태여 천국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세상에 좋은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말씀이 필요치 않습니다. 천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 안에 세상의 왕국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영적인 열망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이런 사람이 신간 편하고 가장 복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세상에 근심 걱정 하나 없고, 전화 한 통화면 모든 문제가 다 척척 해결되고, 은행에만 가면 필요한 돈을 얼마든지 뽑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실상은 그런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이 세상 보화에 눈이 멀어서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영원하고,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다 뜬구름처럼 사라지게 됩니다. 이 땅의 물질과 명예, 쾌락,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언젠가는 아침안개와 같이 다 흩어지게 됩니다. 더구나 그런 것들이 사람의 영혼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잠시 잠깐 세상연락에 취해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천국은 어떤 사람에게 임합니까? 자신의 무지와 부족함을 깊이 느끼는 자, 인생의 한계와 내면에 곤고함을 솔직히 고백하는 자, 인생의 좌절과 실패를 만나서 자신의 무력함을 깊이 인정하는 자, 그래서 그 심령이 낮아질대로 낮아진 자, 겸손한 자. 이런 자에게 천국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뭔가 어려움을 느끼고 심령이 가난해 질 때에 너무 비관적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때가 오히려 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야곱은 ‘자식을 많이 낳고 짐승들을 많이 소유하고 거부가 되었을 때에 정말 행복했노라’고 말 하지 않았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깨졌을 때에,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깊이 절감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을 때에 오히려 천국을 소유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절뚝절뚝 다리는 절었지만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더라고 했습니다(창32:31). 사기꾼 야곱이 자아가 완전히 부서지고 그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으로 가득차게 되는 참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평소에 아쉬운 것이 없었기 때문에 콧대가 높고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녀에게 문제가 없었을 때는 심령이 부요해서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요,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이 귀신들려 고통하게 되자 심령이 가난해지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으로부터 개 취급을 당했을 때에 그녀의 마음은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이때 만약에 그녀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살아 있었다면 예수님께 대들고 천국의 축복을 발로 차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개처럼 비천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 마음이 땅끝까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개와 같은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사 부수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그녀가 이처럼 심령이 가난해질대로 가난해졌을때에 비로서 천국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러자 그 시로 딸이 나았다고 했습니다(마15:28).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하늘의 복을 내려주십니다.


  정근모 박사는 고등학교를 4개월만 다니고 월반을 하고 최연소로 서울대에 들어갔습니다.  20대 초반에 미국 유학가서, 26살에 박사학위를 따서 꼬마 박사가 되었습니다. 미국 시민권이 주어지고 여기저기서 교수로 오라고 초빙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자고했겠습니까? 주변에서 아무리 전도를 해도 쳐다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서 죽어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장을 하나 떼어 주어도 낫지를 않았습니다. 정근모박사는 비로소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마음이 겸손해지고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에 말씀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기도가 나오고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 마음에 천국이 그 마음에 임하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우리도 천국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나의 무지와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재빨리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 헛된 자부심을 과감하게 버려야 하겠습니다. 뭔가 안다는 영적 포만감을 회개하고 겸손히 낮아질 때에 그때 비로소 하늘의 축복이 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조그만 죄 앞에서도 가슴 아파하며 슬퍼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 문제 뿐만 아니라 양들의 문제로 인해 애끓은 심정으로 기도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시대의 죄문제로 인해 강물같이 눈물을 흘리며 중보기도를 감당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보고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서 고생한다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주목하시고 하늘의 위로를 베풀어 주십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무뎌져가는 시대입니다. 심각한 죄 문제가 있어도 좀처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별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심각한 지경인데도 별로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타락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I am OK. You’re OK” 괜찮아 괜찮아. 그러나 내가 괜찮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결코 괜찮지 않습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나의 영적인 상태가 심각합니다. 양들의 상태가 굉장히 시급합니다. 이 시대의 도덕적 영적인 상태가 죽어가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슬퍼할 줄을 모르고 아파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병이 있으면 아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슬퍼하고 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문둥병자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늘로 찔러도 아픈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아픔점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아픔점이 있기 때문에 병이 나면 약을 먹습니다.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포가 죽으면 아파하지 않습니다. 슬퍼하질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우는 것 봤습니까? 시체가 아파하는 것 봤습니까? 그 사람이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서양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자는 그 영혼에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아름답고 영롱한 무지개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마른 하늘에는 절대로 뜨지 않습니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진 후에 무지개가 뜨듯이 하나님의 위로의 무지개는 심령을 찢고 애통한 자의 영혼에만 떠오르게 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자신의 죄로 인해 안타까워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하고 탄식하며 애통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탄식하며 애통하는 그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위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한나가 나옵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 문제로 애통했습니다. 한나는 브닌나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엘가나를 찾아가서 바가지를 긁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한나를 위로하사 사무엘이라는 열 아들 부럽지 않는 무지개가 떠오르게 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수일동안 울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벽이 중건되게 하시고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재건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비참한 자가 아닙니다. 애통하는 자는 보배로운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편에서 볼 때에 보석처럼 귀한 존재입니다. 자기 문제든, 양들의 문제든, 민족의 문제든 그 문제를 끌어 안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대충대충 적당히 신앙생활 한다고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침몰해가는 이 시대를 부여잡고 애통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51:17절에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정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심령의 애통함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와 나 자신의 영적 무감각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는 머리는 갈수록 커져 가는데 가슴이 점점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눈물이 말라갑니다. 분노의 눈물, 억울함의 눈물은 있는데 애통함의 눈물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위기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균형감각을 잃어버리면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16,1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는 지금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고 기도할 때입니다. 우리 자신의 영적 각성과 이 시대의 변화와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애통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하늘의 위로가 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셋째로,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열심히 투쟁해서 쟁취하는 사람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중에 보면 그런 사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평소에 온유함을 가지고 베풀고 양보하고 주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나옵니다. 두 사람의 양떼가 많아져서 목자들이 서로 싸웁니다. 이때 롯이 조카니까 당연히 양보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롯은 손해 보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 많은 삼촌 아브라함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양보를 합니다. “우리가 한 친족이니 서로 싸우지 말자.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이때 롯은 한마디 감사하다는 말도 없이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취해서 소돔으로 얼른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온유하게 양보했기 때문에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실제로 나중에 세월이 지난 뒤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실리를 챙겨 떠난 롯은 유황심판 때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빈손으로 뛰쳐 나옵니다. 반면에 땅을 양보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사람을 얻은 아브라함은 거부가 되고 자손만대에 복을 받는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은 어찌하든지 왕권을 놓지 않고자 다윗을 경계하고 죽이고자 안달을 합니다. 반면에 다윗은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절대로 사울을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참고 또 참습니다. 그를 붙들고 눈물로 하소연할지언정 그의 목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대신 죽여주겠다고 해도 극구 말렸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욕심을 부린 사울은 왕의 자리만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식들도 잃고 백성들도 잃고 마침내는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맙니다. 그러나 온유함으로 일관한 다윗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이스라엘 나라까지 얻게 됩니다. 강하고 탐욕스러움이 이길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양보하고 베푸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짐승들도 호전적이고 다른 짐승들을 공격하고 육식을 즐겨하는 맹수들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온순하고 느긋한 초식동물들이 오래 삽니다. 드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숫자도 훨씬 많습니다. 국가들도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못살게 굴었던 나라들은 이상하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애굽,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는 한때 천하를 호령했지만 지금은 전혀 영향력이 없습니다. 무력투쟁을 주장했던 공산주의 국가들도 곧 세계를 정복할 것 같았지만 7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했습니다. 결국에는 온유함의 법칙이 승리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온유하신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10:28,29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욕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끝까지 품고 온유하게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뜨거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패배한 것 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 예수님의 온유한 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망했지만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속에 왕으로 자리하고 계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넷째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쾌락, 인간적인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더 갈증에 시달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사랑에 목말랐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목말랐습니다. 그래서 그 대상을 찾고자 5번이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배부르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남편을 만나면 만날수록 더 목이 말랐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에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복 있는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 목마른 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서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나옵니다. 그는 이방인이요, 여왕의 국고를 맡은 관리인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래서 에디오피아에서 저 멀리 예루살렘까지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면서도 인터넷 영화를 다운받아서 보지 않고 성경을 꺼내서 읽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말씀을 읽으면서 이 뜻이 과연 무엇일까 갈급한 심정으로 묵상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이를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원격조정으로 사마리아 땅에 있던 빌립집사를 사막으로 급파하여 마차 1:1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말씀에 나오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내시는 그 자리에서 내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늘의 단비를 내리시듯이 그 영혼을 배부르게,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말씀공부를 할 때도 어떤 사람은 주리고 목마른 심정으로 열심히 배웁니다. 메시지를 들을 때도 맨 앞자리에 앉아서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듣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고자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어린아이가 엄마 젖을 빨듯이 정말 맛있게 간절하게 ‘아멘 아멘’ 하면서 기쁨으로 영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인 살이 통통하게 쪄서 얼굴이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의 내면에는 천국의 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 일도 바쁜데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써야 하고 물질과 시간을 드려서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고자 합니다. 니 떡 너 먹고 내 떡 나 먹자 하는 심리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정작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보면 주변에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후회하게 됩니다.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돌아 보아야 나도 긍휼함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자신의 관점에서 쉽게 정죄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의 내면에는 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덕이 되지 않고 자기의 마음에도 찬바람만 쌩쌩 붑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를 정죄판단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사자를 보내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고 피 흘리게 하사 우리 죄를 대신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요한복음 3:16절 말씀이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이 복음 때문에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기보다 용서하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권면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긍휼이 한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여인만 살린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살렸습니다. 긍휼은 사람을 살립니다.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립니다. 미움과 정죄는 나도 죽이고 상대방도 죽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까?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정말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조금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함께 있어 주고, 놀아 주고, 대화해 주고, 관심 가져 주고, 기도해 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 그런 삶이 복된 삶입니다. 내 마음에 좀 안 들고 화가 나도 그 사람 입장에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런 자에게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에 있었던 김 모세 목자님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분은 큰 역사를 이룬 것도 아니고 그렇게 탁월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다니면서 뒤치다꺼리해 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사람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많은 손님들이 와서 함께 가슴 아파 하고 진심으로 애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까지 손님들이 오시고 마지막 장지까지도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아마도 그분은 하늘에서 상급이 클 것입니다.


 여섯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그 내면이 순수하고 깨끗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맑고 깨끗한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 또렷하게 얼굴이 보입니다. 그러나 더러운 물, 흔들리는 물에 얼굴을 비추어 보면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내면이 죄로 오염되어 있으면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욕심으로 요동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죄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루에 약 2만 번 정도 눈을 깜박거린다고 합니다. 그 깜박거림을 통해서 안구에 끼인 이물질을 자동적으로 닦아주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와이퍼가 앞 유리를 닦아주듯이 눈꺼플이 우리의 안구를 닦아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도 자꾸 회개의 와아퍼로 닦아야 청결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를 회개하고 그 내면이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례미야 17: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가만 놔두면 금방 시궁창이 되어서 더러워지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봐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오지 않습니다. 다 마음이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51: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에베소서 1:1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회개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성령께서 임재하사 계시의 영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에 어떤 자에게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됩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타인에 대해서 간절함이 있는 자, 안타까움이 있고, 눈물이 있는 자에게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 봅시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애끓는 심정이 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다면 하늘의 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여! 저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타오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대와 양들로 인해 끊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이처럼 간절한 열망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신령한 복으로 채워주실 줄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