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7 강
세상의 소금과 빛
말씀: 마태복음 5:9-16
요절: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 신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죄악되고 어짜피 멸망 받을 것이기 때문에 아예 무관심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예 세상을 등지고, 도피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자라고 하지만 아예 세상과 짝하여 세속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 다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세상 가운데서 어떤 존재로 살아야 하는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빛으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팔 복 중에서 여섯 번째까지 살펴 보았습니다. 일곱 번째가 무엇입니까?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maker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peacemaker가 있고 troublemaker가 있습니다. 둘 사이에 차이가 무엇입니까? troublemaker들은 자기가 중심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하고 자기 주장이 강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내가 대화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내가 주목을 받아야 하고 내가 스타가 되고자 하기 때문에 자꾸 충돌을 일으킵니다. 반면에 peacemaker는 하나님 중심, 타인중심입니다.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먼저 앞세웁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깊이 인정해주고 그 사람의 훌륭한 점을 찾아서 칭찬해 줍니다. 기를 살려주고 encourage해 줍니다. 화가 나도 참고 인내합니다. 모임에 문제가 있어도 조용히 기도하므로 문제를 끌어안고 자신이 해결하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peacemaker들은 고생을 많이 합니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의 짐, 모임의 짐을 많이 지기 때문에 고생이 많습니다. 때로는 양쪽에서 다 오해를 받고 비난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복이 임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복이 임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요셉은 정말 화평케 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려서 형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애굽사람들에게, 보디발여사에게, 감옥의 간수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는 troublemaker 중에 troublemaker가 되었을 것입니다. 가슴에 칼을 품고 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을 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가는 곳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나, 감옥에서나, 바로의 궁에 들어가서나, 나중에 형들을 만났을 때나,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다 끌어안았습니다. 이런 요셉을 볼 때에 우리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와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요셉은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요셉을 존경하고 사모합니다. 그래서 Christian name을 줄 때도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장 선호합니다. 이러나 이 요셉이 이런 요셉이 되기까지는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마음고생하며 그 마음에 분과 상처를 참고 속으로 삭이며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쳤겠습니까? 오랜세월 동안 기도하고 내적으로 투쟁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애썼기 때문에 천하를 품는 큰 그릇이요 peacemaker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해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 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 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은 줄 아나이다” 이처럼 화평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리고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나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내 자신을 구부려서 화평의 다리가 될 때에 그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평화의 꽃이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화평케 되는 좋은 모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평화의 도구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와 질고와 상처와 아픔을 다 자신이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형제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혈기와 감정, 욕심과 자기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 중심이 되고 타인중심이 되므로 어디를 가든지 모임을 살리고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화평케 되는 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칭찬하시고 복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덟째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다같이 10-12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팔 복 중에서 가장 마지막 복을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도 가장 길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복은 한 절로 끝났는데 박해받는 복은 세 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에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이 가장 어렵고도 수준 높은 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신앙생활하면서도 앞에 나온 일곱 가지 복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고,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화평케 하는 것은 사모가 되고 그렇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욕을 먹고, 거짓말로 중상모략을 하는 악한 말을 듣는 것은 정말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12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고 악한 말을 들을 때에 참는 것도 힘든데 예수님은 그 이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의를 위해서 살고자 하면 칭찬받고 환영받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의로운 제사를 드리다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노아는 구원의 방주를 짓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비롯해서 모세, 다윗, 엘리야, 이사야, 예례미야,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등등. 의를 위해서 살고자 애 쓴 사람들은 다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롯과 같이 잔머리 굴리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산 사람들은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직하게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반드시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핍박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핍박 후에는 신기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느부갓네살왕의 금신상앞에 절하지 않으므로 불같은 박해을 받습니다. 그들은 모두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니엘서 3:24절에 보면 분명히 풀무불 속에 던져진 자는 세 명이었는데 불 속에서 네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세 명은 다니엘의 친구들이고, 다른 한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들은 불같은 시련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큰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청교도 설교가인 토마스 왓슨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가짜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까지는 갈 수 있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갈 수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 좋은 설교, 좋은 말씀 듣는 것도 복이죠. 그러나 진짜 복은 갈보리 언덕에 올라 십자가은혜를 체험하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어야 진짜 복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도 박해를 받으셨는데 우리도 그와 함께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롬8:17). 이상에서 우리가 팔복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받을 자가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늘의 복을 소망하며 하늘의 복을 맛보며 살게 되면 어떤 존재가 됩니까?
첫째로, 이 세상에 소금이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서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는 “너희는 세상에 보석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다아나몬드다” “너희는 세상에서 금이다, 은이다” 그렇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소금이다’ 이 말씀이 얼른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소금은 금이나 은처럼 화려하지 않습니다. 금이나 은이면 집안의 깊은 장롱 속에 예쁜 케이스 속에 넣어져 있을 텐데 소금은 부엌에 투박한 질그릇 속에 담겨 있습니다. 소금은 향기도 모양도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만큼 소중한 존재가 없습니다. 사람이 금이나 은, 다이아몬드등 보석은 없어도 살지만 소금없이는 못 삽니다. 그만큼 소금은 소중합니다. 소금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음식의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이는 소금이 음식에 맛을 내는 독특한 성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은 세상 살아가는데 맛을 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맛은 설탕 같은 쾌락의 맛이 아닙니다. 청량음료와 같은 쌈박한 재미가 아닙니다. 소금 맛은 사람의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신선한 충격을 주고 감동을 주는 영적인 맛을 가리킵니다.
어제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사랑을 남기고 떠난 영등포의 슈바이처” 지난 20년동안 도시빈민,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등 43만 명을 무료로 치료해 온 요셉의원 원장 선우경식선생이 위암으로 별세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분은 카톨릭 의대를 나와서 미국유학을 갔다 온 수재였지만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인 신림동에서 주로 가난한 환자들을 돌보며 의료 봉사를 펼쳤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었습니다. 어제 신문에는 여러 종류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박태환선수가 수영 400미터 자유형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앞으로 미국 방문할 때에 90일은 무비자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사도 실렸습니다. 함평 나비 축제가 이제는 세계적인 곤충엑스포로 발돋음하게 되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뉴스는 선우원장의 소식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앞에 뉴스들과는 달리 선우원장의 소식은 우리 마음에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는 소금 맛입니다. “세상에 아직도 저런 분들이 있어서 세상 살 맛이 나는구나” “저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 세상이 아직도 소망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금은 짜디짠 염분 덩어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금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충만한 예수님 덩어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영의 존재, 영성 덩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진리가 없습니다. 영이 죽어 있습니다. 때문에 맛 없는 음식처럼 삶의 허무와 무의미, 무미건조함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소금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소금이 되어서 조금만 뿌려지면 세상 살 맛이 나게 될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 속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삶의 기쁨과 만족이 없기 때문에 몸에 나쁜지 알지만 쾌락이라는 독약을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제 저희 센타에 나무를 싣고 오신 트럭 기사 두 분이 계속해서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식사를 대접하면서 “왜 몸에 안 좋은 담배를 그렇게 피우시냐?”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피곤하고 힘든데 안 좋은지 알지만 술 먹고 담배피우는 재미라도 없으면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사느냐?”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를 믿으면 기쁩니다. 예수 믿으세요” 했더니 웃으면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몸에는 소금 성분이 있기 때문에 소금을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사람은 그 자체가 영의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성분이 들어가야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나가서 소금을 뿌려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어 뿌려질 때에 그들이 참 진리의 맛을 보고 인생 사는 맛을 되찾게 됩니다. 잠자는 영성이 깨어나서 삶의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 인생사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의욕도 소망도 비젼도 없는 맹물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베드로가 말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그러자 그 사람이 즉시 일어나서 걷고 뛰며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얼마나 기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게 되었습니까? 이전에는 살 가치가 없는 인생이었는데 이제 살 맛 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감격과 희열이 넘치는 인생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소금이 되어서 그 사람의 인생에 뿌려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안에 있는 나사렛 예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구원이요, 능력이요, 사랑이신 예수가 한 불쌍한 인생에게 뿌려졌을 때에 마침내 한 생명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 속에 뿌려져야 합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넣어야 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금도 그릇에만 담겨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뿌려져야 합니다. 또한 녹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녹아들어야 제대로 맛이 나게 됩니다. 우리는 녹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녹아야 합니다.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희생을 의미합니다. 선우원장도 65세의 많지 않는 나이에 완전히 녹아서 없어지지만 그의 인생은 삭막한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화시키는 위대한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 배사라 선교사님도 한국 땅에 뿌려진 한줌의 소금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크리스찬 투데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결혼도 안 하시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아니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꿈이 있으신가요?” “마지막으로 중국 연변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늘나라 가고 싶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조금도 자신이 어떤 존재로 이 세상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다 녹아서 생명을 살리는 역사에 온전히 드려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정말 그분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이는 그 마음 속에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소금으로, 말씀이라는 소금으로 충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온전히 뿌려서 녹아 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가만 놔두면 자연히 썩고 부패해서 냄새가 나게 됩니다. 그런데 소금은 그 썩는 것을 막아주는 신비로운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이 항상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은 항상 살아 있습니다. 항상 생명력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항상 역동적입니다. 복음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깨끗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거룩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 삼위 하나님을 모시고 살면 우리도 항상 살아있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세상에 뿌려질 때에 세상은 썩지 않게 됩니다. 더러워지지 않게 됩니다. 세상이 소독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소금의 성분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버려져서 짓밟히게 됩니다. 소금이 소금성분을 가지고 있으면 세상을 바꾸는 변혁의 주체가 되지만 소금성분을 잃어 버리면 비난과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가 갖는 특권이 큼과 동시에 책임이 얼마나 큰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영적인 생활을 하고 영성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어둡습니다. 어두우면서도 어두운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이면 어두움은 빛이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됩니다.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과 절망을 몰아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을 던져주는 빛의 사자들입니다. 우리 때문에 어두운 세상이 환해지게 됩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빛은 시대의 파수꾼입니다. 빛은 희망의 전도사입니다. 빛은 무지를 깨우쳐 주는 계몽의 일군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로 말미암아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빛 되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마음에 불을 켜 주셨습니다. 그 불이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커져서 큰 불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불은 장차 세상을 변화시킬 성령의 횃불이 될 줄을 믿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예수님이 없는 이 세상은 차갑습니다. 메몰찹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때에 이런 세상이 따뜻해지게 될 것입니다. 추운 겨울에 작은 난로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얼어붙은 손발을 녹여주고 온 몸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차가운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 자신도 똑같이 차갑고 냉정한 얼음같은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된 인생, 불꽃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될 수 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어둡고 차가운 세상을 비출 수 있습니다. 말만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착한 행실로 나타나게 될 때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빛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인도의 간디가 영국유학시절 한 교수님과 성경을 공부하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간디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평생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문지기의 착하지 못한 행실이 간디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그 문지기가 친절하게 간디를 자리로 인도했다면 오늘날의 인도는 저처럼 미개한 흰두교 국가로 남아있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간디에게는 교수님들을 통해서 들은 이론적인 복음보다 교회 문지기의 실제적인 행동이 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아무리 말을 잘해도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힘써 선한행동, 착한 행동, 형제를 사랑하는 행실을 통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기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시골에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불신자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을 교회 못 가게 하기 위해서 항상 일요일에 일을 시켰습니다. 그날도 주일날 고추밭에 고추를 다 따놓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두 형제는 어떻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예배를 드릴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토요일 날 밤이 새도록 고추를 다 따 놓고 주일날 예배에 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런데 창고에 가보니 고추를 다 따서 가지런히 정리를 해 놓고 두 아들이 교회에 간 것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고추에 피가 묻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두 형제는 아버지가 시킨대로 어찌하든지 고추를 다 따놓고 교회를 가기 위해서 밤새도록 손이 부르터서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고추를 딴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그 고추에 묻은 핏자국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빛이 된다는 것은 착한 행실을 수반합니다. 착한 행실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소금이 소금되기 위해서는 녹아야 하고 빛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태우는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할 수 있는대로 희생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짜피 우리의 인생은 언젠가는 녹아서 없어지고 타서 없어집니다. 언젠가는 사라질 인생인데 이왕 사라질 인생, 주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불타고 녹아지는 것이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가 얼마나 존귀하고 보배로운 존재인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맛이 없습니다. 금방 썩고 부패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서 침몰할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진가는 금방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목자님들의 헌신적인 사랑도 우리가 어렸을 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철이 들게 되면 나에게 빛이 되어 주시고 말씀의 소금을 뿌려주신 분의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도 지금은 사람들이, 양들이 나의 가치와 고마움을 모를지라도 계속해서 헌신할 때에 우리 주님이 알아 주십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그 맛을 느낄 때가 올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조용히 세상 속에 녹아지는 소금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빛을 비추면 언젠가는 얼어붙은 심령들도 녹고 훈기를 느낄 때가 올 것입니다. 항상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은 소수입니다. 때문에 외롭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회의를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가치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