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 강

                                   더 나은 제자의 의

말씀: 마태복음 5:17-48

요절: 마태복음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세상에 소금과 빛이라고 배웠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단지 구원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누리며 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바로 우리 신자입니다.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말하기를 “우리 신자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happiness)이 아니라 거룩(holiness)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이 어느 정도로 거룩해져야 하는가?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의는 굉장히 수준이 높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그만큼 우리에게 큰 기대를 갖고 계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17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나 새롭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배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고 그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들은 거룩하고 경건하고 철저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는 외향적이고, 형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결과만 가지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의는 속마음을 중요시 합니다. 과정과 동기를 강조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겨우 자기를 지키는 의라면 예수님의 의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역동적인 의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 봅시다. 


  첫째로, 살인에 대한 계명입니다. 21,22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십계명에 여섯 번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만 안 지으면 이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꼭 돌로 치고 칼로 찔러서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분노하게 되면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습니까? 가인이 동생 아벨에 대해서 노하다가 돌로 쳐 죽였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 분노가 살인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실제로 살인을 행한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해서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를 범한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해서 방아쇠를 당겨서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살해하고 친구를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6,27절에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혈기는 마귀가 가장 아끼는 충신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분노를 빨리 풀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그 분노를 어디로 끌고 갈지 모릅니다. 미움은 다른 사람도 죽이고 나의 영성도 파괴시키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3: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미움과 분노를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미운마음이 들면 그 대상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까지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을 때만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미움은 사랑으로 이길 수 있지 율법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또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십니다. ‘라가’는 ‘바보’ ‘돌대가리’ ‘골빈 놈’ 그런 뜻입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함부로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자녀인데 내가 어떻게 무시하고 멸시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근본적으로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꽃들도 자꾸 예뻐해 주면 색깔이 더 아름다워지고 향기도 더 좋아진다고 합니다. 미움은 상대방도 죽이고 나도 죽이는 양날 달린 칼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쌍방의 양약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려고 가다가도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으면 빨리 가서 화해부터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기도의 문이 막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 속담에 “맞는 사람은 발 뻗고 자도 때린 사람은 구부리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것이 있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빨리 그 상대를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좀 자존심이 상해도 예수님의 성육신의 사랑을 묵상할 때에 먼저 화해의 손을 내어 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덧입을 때에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시고 먼저 찾아와 주시고 품어 주셨는데 어떤 사람을 풀 수 없겠습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다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됩니다.


둘째로, 간음과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27,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십계명의 일곱 번째 계명이 ‘간음하지 말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체적인 불륜의 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마음에 간음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보고 음욕을 품었을 때에 이미 그 마음에서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어떤 생각을 품는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성을 대할 때에 육신적인 감정을 품고 대해서는 안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거룩한 존재야. 저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시고 아끼시는 고귀한 존재지. 저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함부로 음욕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은 자유다 생각하고 온갖 종류의 상상의 나래를 폅니다. 이 생각 저 생각, 이 형제, 저 형제, 이 자매 저 자매를 마음에 품고 속으로 즐깁니다. 남이 안 보는 은밀한 장소에서 눈으로 생각으로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마음과 생각의 죄는 절대로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점점 커져서 나중에 반드시 추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9,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 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예수님은 아예 눈을 빼 버리고 손을 찍어 버릴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전에 ‘눈이 실족케 하거든 빼 버리고 손이 실족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이 말씀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무지막지한 말씀을 하시는가? 너무 원색적이고 격렬하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가만히 묵상해 보니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생명의 말씀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영혼을 죄로부터 철저히 보호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영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컴퓨터 CPU처럼 너무 값지기 때문에, 또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한 번 망가지면 큰 일 나기 때문에, 한번 더럽혀지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이처럼 철저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가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존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어서 온 세상을 밝히는 환한 빛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썩어가는 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 짜디짠 소금이요, 불순물이 하나도 없는 영성덩어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음란한 것들이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더러운 것들이 침범하면 영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파워를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철저하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즘 조류 독감 인플루엔자가 발견되자 어떻게 했습니까?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다 땅에 묻었습니다. 산 닭과 오리조차도 수 천 수 만 마리까지 다 묻었습니다. 그 중에는 감염 안 된 닭이나 오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 묻어 버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병원균이라도 침투했을 가능성만 있어도 다 철저히 차단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반도체도 그렇습니다. 1%라도 불량품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하게 이 물질을 차단시킵니다. 온 몸에 방염복을 입고 머리카락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머리까지 다 싸고 마스크까지 쓰고 일합니다. 최고 우량제품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거룩하고 탁월한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람들, 심지어는 그 경건하고 의롭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더 영성이 탁월한 사람들, 그 영혼이 윤택하여 빛이 반짝반짝 나는 존재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더러운 것, 음란한 것들이 입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죄의 바이러스가 들어와서는 안됩니다. 하드가 깨끗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철저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 눈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빼 버리라. 네 손이 너를 실족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사단의 통로를 철저히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모든 죄의 유혹은 보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에 눈을 조심해야 합니다. 욥기 31:1절에 보면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고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눈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유혹이 될 만한 것은 절대로 보지 않기로 눈과 약속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매일 집을 나서기 전 그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눈아 눈아 오늘도 나를 지켜주렴. 주여! 오늘도 내가 못 볼 것을 보지 않게 하소서. ♬ 주만 바라 볼지라” 오늘날은 특히 감각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보는 것을 정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성결케 합시다. 매일 매순간 눈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에는 다 불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꾸 거룩한 것을 보고 성결한 것들을 입력시키면 우리 안에 거룩한 불이 타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시대의 등불이요, 횃불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100번, 1000번 구운소금이 되어서 이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질 좋은 영향력있는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란한 것들을 자꾸 보고 입력시키면 정욕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잠언 6:27절에 “사람이 불을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을 적극적으로 피해야 합니다(딤후 2:22). 빌립보서 4:8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마음의 생각을 성결케 해서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로마가 왜 망했습니까? 소돔 고모라가 왜 유황심판을 받았습니까? 노아시대에 왜 홍수심판이 있었습니까? 다 음란의 죄 때문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이 시대도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물질이 없어서도 질병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음란의 죄 때문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29, 30절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보배로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부담스러워하지 말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죄와 싸우기 정 힘드신 분들은 컴퓨터 모니터 밑에 이 말씀을 써 붙여 놓고 투쟁하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보약이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6)”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그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 사도바울은 눈 하나 빼 버리고, 손 하나를 찍어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봐주지 말고 아예 죽여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몰래 음란한 것들을 어디 숨겨놓고 은밀히 즐기고 있다면 오늘 당장 집에 가셔서 죽여 버리기 바랍니다. 그런 선을 죽여 버리고 그런 사이트를 죽여 버리고 그런 매체들을 다 죽여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영이 삽니다. 그래야 내 안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서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결단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20절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잖습니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도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배우자가 음행한 경우를 빼고는 이혼도 간음의 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혼은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서 배우자를 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맹세에 대한 계명입니다. 33, 3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사람이 한번 맹세를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것이고, 사람과의 신뢰의 관계성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대개 맹세를 할 때는 허세를 부리고 과장을 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 자기가 과거에 얼마나 영웅적인 일을 했는가? 펑튀기를 합니다. 그 자체가 죄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끝나야 합니다. 나의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보복에 대한 계명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계명은 보복을 최소화하기 위한 계명이었습니다. 사람이 보복을 할 때에 당한대로 그 정도만 보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화가 나고 감정이 상하기 때문에 두 배, 세 배로 보복을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싸움이 커지지 않도록 눈은 눈으로만, 이는 이로만 갚도록 제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할 것이며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어떤 위인이 오른쪽 뺨을 때리는데 왼뺨을 돌려대겠습니까? 우리는 흥부전에서 흥부가 배가 고파서 형 집에 구걸하러 갔다가 형수가 주걱으로 뺨을 때리자 그 밥풀떼기 몇 알 먹기 위해서 ‘이 쪽도 때려 주세요’ 했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뺨을 후려 갈기는 사람에게 다른쪽 뺨을 들이대는 사람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오른쪽 뺨을 맞는 것은 대개 오른 손등으로 뺨을 맞는 경우입니다. 이것은 정말 인격이 모독을 당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수년전에 센타를 찾아온 어떤 목자의 아버님으로 부터 뺨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막 욕을 하며 달려 들더니 사정없이 제 뺨을 때렸습니다. 저는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그 분을 밀쳤는데 계단 밑으로 굴러서 손가락에 피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붙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경찰이 파출소로 데려가서 화해를 시켰습니다. 파출소에서 돌아오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술 먹고 센타를 찾아와서 목자의 뺨을 때리는 그 부모도 정말 한심하지만 참지 못한 나도 한 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나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입히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속에서 열불이 올라오고 인격적인 모독감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고발해서 피해를 주는 사람에게 맞고소를 해서 분풀이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느 정도까지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43,44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와! 갈수록 태산입니다. 양들이나 가족들도 때로 사랑하기 힘든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쉽지 않는데 나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해를 선인에게도 비추시고 악인에게도 비추십니다. 하나님은 비를 신자들의 땅에만 내리시고 믿지 않는 자들의 밭에는 내리지 않으시는 그런 편협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시는 넓고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처럼 넓고 큰 마음을 가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과거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 동일한 은혜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인생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이요,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간적인 상식이나 감정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대적한 죄인들을 향해서 하늘에서 심판의 불을 내리셔야 마땅할텐데 오히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원수들을 자기 자녀 삼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온몸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고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옷을 발가벗기고 채찍으로 때리고 주먹으로 치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이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 같으면 너무 화가 나서 저주의 기도를 할 것 같습니다. “주여! 저들을 좀 손 봐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본성으로는 도저히 이 예수님의 사랑의 발꿈치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흉내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가리켜서 ‘측량못할 사랑(unfathomable love)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의 모든 악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사랑입니다. 어떤 이유도 묻지 않고, 전혀 저항하지 않고 말없이 인간의 모든 흉악함을 자신이 짊어지고 제물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고통입니다. 아픔이요, 고독이요, 상처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예수님의 아픔과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상처가 치유의 원천이다” 능력이 치유의 원천이 아니라 상처가 오히려 치유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상처가 사랑의 출발입니다. The wounded healer.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엄청난 상처를 받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상처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는 치유제가 됩니다. 우리는 나의 뺨을 때리는 사람이 밉습니다. 내 속옷을 가지고자 고발하는 자가 부담스럽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라고 시키는 사람이 싫습니다. 나를 박해하는 사람에게서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분을 풀고 싶습니다. 저주하고 싶습니다. 맞대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바로 사랑할 때다” “상처가 사랑의 출발이다” “상처가 치유의 원천이다” 내가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지 않고 그 상처를 끌어 안을 때에 그때 비로소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고 치유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더 상처가 많은 사람입니다. 나보다 그 사람이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또 다른 상처로 보복해 버리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상처의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상처의 고리를 끊고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예수님처럼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주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비록 우리의 마음에서는 상처로 인해 속이 뒤틀리고 억울해서 피눈물이 흐르지만, 그래도 우리가 품고 사랑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수준이 높습니까? 높은 수준에는 반드시 아픔이 따릅니다. 수준 높은 사랑일수록 상처와 아픔이 많습니다. 왜 부모의 사랑이 숭고합니까? 죽을 고생하고 낳아서 눈물로 키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46,47)” 예수님은 우리가 겨우 세리나 이방인의 수준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의 수준에 만족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4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수준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원수들을 위해 자기 자식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수준까지 올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와! 주여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절 보고 죽으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합니다. 맨정신으로는 이렇게 못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상처를 끌어안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상처를 다 끌어안고 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이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미움, 분노, 살인감정, 음욕, 복수심, 이 모든 것들이 왜 생깁니까? 내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자아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없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처 받을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고 과도한 욕심을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 남았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모든 죄인들을 다 용서하시고 품고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포용하고 사랑하고 기도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어렵습니다. 엄청나게 수준이 높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에게 큰 기대를 하고 계시는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타락한 본성에 기초해서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미워하고 싸우고 아웅다웅하는 그런 저차원의 인생을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그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준으로, 하늘의 온전함의 수준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다 Saint가 되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나의 의지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덧입을 때만 가능합니다. 나의 자아가 온전히 죽어지고 내 안에 오직 예수님으로 가득차게 될 때에 예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강권하실 때에 우리도 손양원 목사님같이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저희들이 스스로의 기대 수준을 낮추어서 평범한 삶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에 이르기까지 힘써 예수님을 배우길 바랍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이 세상에 빛이요, 소금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