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9 강
은밀한 경건생활의 축복
말씀: 마태복음 6:1-6, 16-18
요절: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자들이 행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경건생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세 가지 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경건의 덕목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경건의 덕목들이 정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중에 행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일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봅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만약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 앞에서 신앙생활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볼 때만 열심히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고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할 것입니다. 그때에 신앙생활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상을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자에게 상을 베풀어 주십니까? 사람들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를 바라보건 게의치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묵묵히 의를 행하는 사람입니다.
창세기에 노아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홍수심판을 경고하시며 노아에게 산에 올라가서 큰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노아는 사람들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그를 이해해 주건, 미쳤다고 손가락하건 게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120년 동안 묵묵히 방주를 지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대홍수 심판가운데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판단이 얼마나 허망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참으로 간사합니다. 어제까지 환호하고 손뼉치고 치켜 세워 주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고 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내 면전에서는 온갖 좋은 말로 칭찬을 하지만 나 없는데서는 험담을 일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2:22절에서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6절은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십시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기드온, 바락, 다윗, 사무엘. 그들은 모두 시대배경도 다르고 삶의 조건도 다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며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환경을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는 오해와 비난, 핍박과 따돌림을 극복하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견디기 힘든 고독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의 순간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꼭 고립이나 저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고독은 그들로 하여금 사람에게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참된 경건의 통로였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고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보호하고 값진 선물로 간직하는 것이다. 때로 사람들은 고독을 회피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러다가 빠른 만족과 위안을 약속하는 거짓 신들의 덫에 걸리게 된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뼈아픈 인식을 통해 우리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습니다. 고독은 힘들지만 나의 믿음을 성숙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고독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재빨리 사람들이 주는 위로와 칭찬, 이해와 동정의 세계속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은 거짓 신들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것들이 몰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주의하라” “Be careful” “조심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다가,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의 마약에 중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하는 속성 때문에 스스로 망해가고 있다” 고독을 자꾸 회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혼자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에 경건에 이르지 못하고 영성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기 위해서는 영적인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누가 인정해 주든 말든, 누가 보든 안 보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달려갈 때에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의 경계 너머에 있는 신령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자 영적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은밀한 경건생활에 대해서 세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구제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구제는 궁핍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사람이 주변에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고 물질과 시간을 쪼개어 도와준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저도 주일날 헌금봉투를 보고 축복기도를 하는데 꼭 구제헌금을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제헌금은 드리는 분들이 꼭 드리더라구요. 이런 분들을 볼 때에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 마음의 선함과 따뜻함이 느껴져 옵니다. 그런데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사람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제가 지금 누구를 도와주고 있으니까 알아 주세요”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외식의 어원은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심이 아니기 때문에 순수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정말 그 사람이 구제받는 사람을 위해서 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구제라는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구제는 받는 사람도 부담스럽습니다.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도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에게서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그들의 보상을 이미 충분하게 받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참된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경건이란 좀 비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은 좀 덜 채워진 부분, 즉 여백이 있어야 합니다. 인정과 칭찬과 상급을 좀 덜 받아서 아쉬운 것이 있어야 합니다. 좀 서운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채워주실 것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 버리고, 세상에서 인정과 칭찬을 다 받아 버리고, 모든 인기와 영광을 다 누려 버리면, 하나님께서 뚫고 들어오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교제의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됩니다. 구제를 받는 사람과 구제를 하는 나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도 손상을 받게 됩니다. 이를 볼 때에 구제하면서 나팔을 불게 되면 결국 복이 다 날라가 버립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복,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복이 다 허공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조용하게, 남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은밀하게 해야 합니까? 3절에 보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릅니까? 이는 그 정도로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나님 앞에서, 구제 그 자체를 기쁘게 생각하고 섬기고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어떤 축복이 주어지게 됩니까?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한 중에 행하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야! 저 사람이 없는 물질을 쪼개서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있구나’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을 베풀고 있구나’ 감동을 받으시고 때가 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십니다. 잠언 19: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자를 구제하고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께 돈을 꾸어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 때에 마음에 큰 부담을 느끼십니다. “내가 저 가난한 사람을 보살펴야 하는데 저 사람이 도와주네. 참 감사도 하지. 미안하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하시면서 빚진 자의 심정을 가지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빚을 안 갚고 떼어 먹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빚을 갚아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빚을 지면 3%, 4%로 갚아 줍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기 때문에 30배, 60배, 100배로 갚아 주십니다.
저는 곽선희 목사님의 간증을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북에서 아버지가 공산당에 의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월남하였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올 때에 오직 성경책 하나 들고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굶지도 않게 하시고, 그 힘든 시절에 미국 유학도 갔다 와서, 신학교수도 되고, 목회의 길을 가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가 북한에서 사실 때에 그렇게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줬다는 것입니다. 거지가 와도 꼭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더 못 줘서 아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조부모, 부모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곽목사를 찾아와서 도와주더라는 것입니다. “자네 할아버지가 나를 도와주었네” “자네 어머니가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네” 하면서 어린 곽목사를 도와주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은밀하게 구제할 때에 하늘에서 다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기특하시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뭉클하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못 본체 하지 않으십니다.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다 보고 계시다가 때가 되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자기 당대에 갚아주시기도 하시고, 자기 아들 대에, 손자 대에 갚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잠언 11:24절에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저희들이 은밀한 가운데 구제함으로 흔들어 넘치도록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기도입니다.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민을 덜어주고 상처를 싸매주는 하늘의 명약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리는 마음의 창문입니다. 기도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의 탯줄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보물창고를 여는 황금열쇠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성도의 경건생활에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보배입니다. 그러면 이 기도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기도는 사람과의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은밀한 대화요, 교제인 것입니다. 기도가 기도로서 빛을 발하고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들이 들으라고 외식적인 기도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회당이나 큰 거리 어귀에서, 북구청 사거리나, 도청 앞에서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하도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분이 계셨답니다. 이분이 어느날 성지순례를 갔다 와서는 더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입만 벌리면 자기가 성지순례 갔다 온 것을 자랑했답니다. 설교할 때도 성지순례, 세미나 할 때 성지순례, 광고할 때도 성지순례자랑. 그래서 동료 목사님들이 아무 순서도 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자 토라져서 힘들어 하니까 성지순례 갔다 온 것 자랑할 수 없는 순서를 맡겼습니다. 축도를 맡긴 것입니다. 이번에는 성지순례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축도 하면서 “이제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내가 성지 순례할 때도 함께 하셨던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렇게 기도하더랍니다.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고 싶으면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외식적인 기도,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기도,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에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다같이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문을 닫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집중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과 나만의 은밀한 교제요,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말을 다른 사람이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신혼부부는 골방을 좋아합니다. 말을 할 때도 보면 다른 사람이 못 듣도록 둘만 속닥속닥, 밀어를 즐깁니다. 요즘 우리 김상현 목자님은 제주도를 오가면서 룻 목자와 대륙을 뛰어 넘는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전에 구갈렙 선교사님과 영국의 데보라 선교사는 서로 국제전화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데 4층에서 아예 안 내려 옵니다. 전화비가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천문학적인 숫자여서 밝히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분들에게 둘 사이에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공개하라고 하면 막 화를 낼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는 은밀한 공간에서 자신의 속 마음을 다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기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나의 모든 고민과 아픔을 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나의 모든 속 마음을 다 털어 놓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아뢰고 용서를 구합니다. 나의 어려움을 아뢰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나의 고독과 아픔을 토로하며 위로를 구합니다. 앞이 캄캄할 때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 주십니다. 몸이 아프고 무력할 때에 기도하면 힘을 주시고 강건케 해 주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세상을 향해서 문을 닫고 하나님을 향하여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가장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82장에 보면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483장에서는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세상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주님과 나만의 은밀한 사연을 키워 나가는 비밀의 방입니다. 기도는 내가 주님을 만나서 풍성한 사랑을 누리고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신비스러운 공간입니다. 기도의 골방은 꼭 어떤 장소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차 운전석이 골방일 수 있습니다. 부엌이 골방일 수 있습니다. 거실에서 TV와 컴퓨터를 끄고 무릎 꿇고 기도하면 그 거실이 골방이 됩니다. 우리가 새벽이나 금요기도회 때에 3층 큰 홀에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옆에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골방입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한나는 골방기도의 좋은 본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한 문제로 마음이 슬프고 아팠습니다. 그 심령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식 낳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브닌나로 부터 구박을 받는 것이 더 슬펐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남편 엘가나를 찾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지 않았습니다. 브닌나와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실갱이를 벌이지도 않았습니다. 일부러 브닌나 들으라고 마당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 저 브닌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렇게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은밀하게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상 1:12절에 보니까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과 은밀한 기도를 하는지 엘리는 한나가 기도하는 줄도 모르고 술에 취한 줄로 알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달린 것입니다. 그 마음이 괴롭고 원통하지만 사람들에게 전혀 표를 내지 않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1:11)”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들으시고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사사를 잉태케 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에 어린아이같이 하나님께 나아가 은밀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앗수르의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에 성전에 올라가서 편지를 펴놓고 은밀하게 기도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18만 5천명이나 되는 앗수르 군대를 일순간에 물리쳐 주셨습니다. 그의 불치병을 치료하사 15년이나 수명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서 다 보고 계십니다. 나의 눈물을 보십니다. 내 마음에 원통함을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면 왜 당신의 자식들의 은밀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9-11)”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기도를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셋째로 금식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구제나 기도보다 더 어려운 것이 금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금식에 있어서 더 은밀성을 강조하십니다. 앞에 구제나 기도할 때는 남들 모르게 조용히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금식할 때는 아예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고 적극적으로 감추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하시지 않습니까? 금식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머리에 기름까지 바를 힘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대도 이렇게까지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금식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높은 수준의 경건이기 때문에 더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은밀하게 금식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자녀들이 밥을 굶어가면서까지 애타게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금식은 자기를 절제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자세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위기로부터 구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중에 금식할 때에 영혼의 창이 맑아집니다. 그 맑은 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쏟아져 들어오게 됩니다. 이사야 58:6절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은밀한 중에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더 귀한 것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상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의를 행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사람앞에서 하지 말라는 말씀이 다섯 번 나옵니다. 그리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행하라는 말씀이 여섯 번 나옵니다. 우리가 이제 사람들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40:26절에 “너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고 했습니다(사40:28-31).”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힘이 없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눈이 하나님만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자꾸 사람들 바라보고 사람들 의식하고 사람들과 비교하고 사람들에게 위로와 사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분을 뵐땐 나는 만족하였네 저기 빛나는 세상을 보라 또 저기 서 있는 산을 보아라 천지 지으신 우리 여호와 나를 사랑하시니 나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하였네♬ 사람을 바라보면 너무 칭찬을 받아도 병들어서 쓸모없게 됩니다. 무시를 받아도 상처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우리의 신앙이 대상이 아닙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우리의 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들 바라보지 말고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봅시다. 주님께 포커스를 맞추고 주님만 의식하며 삽시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삽시다. 그리할 때에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인생, 비상하는 인생, 이 세상의 자잘한 일에 얽매이지는 않는 초월적인 인생,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