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 강

                                하나님 자녀가 먼저 구할 것

말씀: 마태복음 6:19-34

요절: 마태복음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오늘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어떤 물질관을 가지고 살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물질에 대한 고민들이 많습니다. 특히 요즘은 자고나면 물가가 뜁니다. 차에 기름 넣는 것이 겁납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온통 돈 벌 궁리와 물질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우리 신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19,2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우리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부지런히 땅에 보물을 쌓아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에 꺼내 쓸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에는 좀과 동록과 도둑이 많기 때문입니다. 화재가 나서 다 타 버리기도 합니다. 지진이나 해일 등 자연재해로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기도 합니다. 도둑이 들어서 강탈해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언젠가 죽어서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보물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줄 아십니까? 잘 먹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고 악착같이 벌어서 몰래 몰래 재산을 숨겨놓았는데 불의의 사고로 죽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불쌍합니까? 우리는 이 땅의 것에 목숨 걸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은 언젠가는 빛이 바래고 녹슬고 닳아져서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목숨 걸고 투자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하늘입니다. 하늘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는 기껏해야 80년, 90년 살다가 짐을 꾸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보물을 쌓아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나의 소중한 것들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소중한 물질, 나의 금쪽같은 시간, 젊은 날의 꿈과 정열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투자하고 진심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살았다가 괜히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면 나만 손해보는 것 아닌가” 손해의식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진심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에 다 저축이 됩니다. 하늘나라 은행에 다 적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쌓아둔다”는 것은 언젠가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 피 같은 물질과 헌신들을 다 계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말라기 3:10-12절에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여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가 나의 소중한 것들을 드려 주님의 창고에 열심히 쌓게 되면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늘 문을 열어서 복을 주시는데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퍼부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물을 이 땅의 창고가 아니라 하늘 창고에 열심히 쌓아 두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봄 수양회에 오셨던 신 집사님과 개인적으로 대화하면서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이분이 어떻게 그처럼 가난한 데서 복을 받고 명장의 반열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열심히 교회 봉사하고, 절대적으로 십일조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수기법에 대한 영감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방수액만 바르지 말고 부직포를 씌우고 방수액을 부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집을 지을 때에 흙을 이길 때에 지푸라기를 썰어서 넣으면 흙이 잘 붙고 방수도 잘 되던 일이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직포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대학교수들도 깜짝 놀랄 제품을 개발한 것입니다. 그 분은 최종학력이 중학교 1학년 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늘 창고에 보물을 쌓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지혜의 창고를 열어 주셔서 방수분야에 명장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많이 안 살았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인생이 정말 잘 될려면 하늘 문이 열려야 되더라구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창고를 열어 주셔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애를 써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인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늘 창고에는 보물을 쌓는 사람은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저는 어제 영국의 구갈렙 선교사님으로 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삼성 정규직원이 되어서 내일 메니저와 계약서를 쓴다고 했습니다. 요즘 영국 삼성이 엄청나게 뜨고 있습니다. 지난 주 삼성첼시와 맨유가 결승전을 했는데 1-1 무승부라,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90분 경기인데 120분, 140분 동안이나 전 세계에 중계가 되어서 삼성의 광고효과가 거의 1000억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 영국 삼성에 취직하는 것은 정말 바늘구멍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영어도 잘 못하고, 컴퓨터 전공자도 아닌 구갈렙 선교사님이 전산직 정규직원이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영국 삼성증권 다니는 동역자까지 얻었습니다. 이는 그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하늘에 보물을 쌓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신기한 방법으로 복을 퍼 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하늘창고에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내 인생의 보물을 투자하고 있습니까? 하늘 창고에 투자합시다. 하나님 은행에 맡깁시다. 이 땅의 창고는 부도가 나기도 합니다. 파산하기도 하고 원금보장도 안됩니다. 그러나 하늘창고는 그 이윤이 어마어마합니다. 하늘은행의 은행장 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30배, 60배, 100배, 아니 만 배로 축복해 주십니다. 물질의 복만이 아니라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영적인 평강과 기쁨의 복, 현세와 내세의 복을 겸하여 받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땅에 보물을 쌓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보물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 보물을 쌓게 되면 소망이 자꾸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 땅의 것에 매이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의 소망이 하늘을 향해서 비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새들이 겨울이 와서 남쪽으로 날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집 앞에 맛있는 곡식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새들이 잠시 내려서 그것을 쪼아 먹고 가기로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새들은 먹을 만큼 먹고 다시 하늘로 날아서 남쪽을 향해 날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욕심 많은 새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계속 먹이를 쪼아 먹다가 몸이 불고 날이 차가워져서 몸이 공중으로 뜨지 못하는 바람에 얼어서 죽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이 땅의 것들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만 합니다. 이 땅에 너무 많이 쌓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 하겠느냐?” 우리가 세상 욕심에 눈이 가리워지게 되면 영적인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오직 물질적인 가치, 현실적인 유익 밖에 보지 못합니다.


  창세기에 롯을 보십시오. 작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분가하게 되었을 때에 롯은 눈을 들어서 사방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진 소돔 땅을 얼른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유황불로 심판 받을 땅이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영적인 안목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또 창세기 15:5절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롯은 근시안적이 되어서 겨우 눈앞에 기름진 땅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동서남북으로 뻗은 온 세계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온 우주를 바라보았습니다. 자기 당대만이 아니라 자손만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안목과 구속사적인 혜안을 가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물질에 혈안이 되어 있어도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물질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신 하나님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모세도 어떻게 했습니까? 히브리서 11:24-26절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모세의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눈이 그냥 180도, 360도 팽팽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제가 올해 영국에 갔을 때에 구 갈렙 선교사님과 대영박물관에 잠시 들렀습니다. 거기에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을 갖다 놨는데 어마어마했습니다. 박물관에서만 봐도 대단한데 그 현장에 있었으면 어떠했을까요? 저 같으면 모세같이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때 이미 그 애굽 문명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보았습니까?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임을 보았습니다. 그런 모세의 눈이 성한 눈입니까? 나쁜 눈입니까?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모세의 눈이 삐었다, 모세의 눈이 거꾸러 박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어떠했습니까? 모세의 눈이 성한 눈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미 주전 1500년에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모세의 영적 시력은 2.0이 아니라 한 20.0쯤 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의 눈은 초점이 하나입니다. 눈알은 두 개이지만 초점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되든지, 물질에게 집중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는 오직 마음의 눈을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면 물질도 따라옵니다. 그러나 먼저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면 나중에 물질도 잃고 하나님도 잃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영적인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시고 반드시 축복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재물을 섬기지 말고 하나님을 first로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필요합니다. 핸드폰 값도 내야 합니다. 각종 보험료도 내야 합니다. 가스비도 내야하고, 집세도 내야하고, 아이들 교육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움직였다 하면 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우리 마음에 파고드는 것이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염려라는 단어가 6번이나 나옵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속에 염려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생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Hurry, Worry, Bury” “먹고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서두르고, 염려하다, 묻힌다” 정말 우리 인생이 이것이 전부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없는 이방인의 인생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염려하지 말라”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에 목숨과 몸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목숨과 몸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본질적인 것을 주신 하나님께서 부수적인 것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수적인 것에 매여서 오그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두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하나는 공중의 새요, 또 하나는 들의 백합화입니다. 공중의 새는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씨를 뿌린다거나 창고에 저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새들은 조금도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항상 웃고 노래하며 날라 다닙니다. “짹짹짹 짹짹짹,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Thank you Lord” “Praise the Lord”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새 대가리니까 그렇죠?” “생각없이 사니까 그렇죠?”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새들을 먹이시기 때문에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 보면 새들이 오히려 인간을 먹여 살립니다. 열왕기에 보면 엘리야를 누가 먹여 살립니까? 까마귀가 먹여 살립니다. 노아의 홍수 때 물이 얼마나 빠졌는지, 육지에 먹을 것이 있는지 누가 알려 줍니까? 비둘기가 알려줍니다. 어떤 때 보면 새들이 인간들 보다 낫습니다. 사람들은 장래근심 때문에 자살을 해도 새들은 염려 때문에 자살을 했다거나 굶어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는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또 들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들의 백합화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백합화는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습니다. 염색도 하지 않습니다. 향수도 뿌리지 않습니다. 누가 와서 수를 놓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얼마나 정교하고 아름답습니까? 요즘 TV회사들이 고화질 선명도를 자랑합니다. 우리나라 삼성TV가 전 세계 TV의 20%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고화질 LCD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TV도 꽃들의 색상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요즘 우리 화단에 장미꽃이 피었습니다. 가만히 다가가서 바라보면 너무너무 아름답습니다. 빨간색도 분홍색도 아닌 것이 불그레한 그 색이 기가 막힙니다. 또 그 그윽한 향기는 어떻습니까? 한 송이 한 송이가 너무너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 솔로몬이 도대체 어떤 옷을 입고 살았는지 모르지만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이 꽃 한 송이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30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처럼 일회용 꽃들도 완벽하게 옷 입히시는데 하물며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모른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확실하게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내가 나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깊이 생각하고 계십니다. 내가 내 앞날을 대비하는 것 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확실한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 작은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정말 키워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염려가 작아집니다. 그러나 믿음이 작아지면 염려가 점점 커져서 힘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31,32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줄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을 내가 침범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어려서 저희가족은 주로 부모님과 한 방에서 잤습니다. 7남매와 부모님이 한 방에서 자는 것입니다. 잘 때는 주로 어디서 잤는지 모르고 잡니다. 그런데 새벽녘이 되면 어디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이 깹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많은 자식들을 가운데 뉘여놓고 한 분은 저쪽 끝에서 한 분은 이쪽 끝에 누워서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가만히 들어보면 주로 자식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몇째 딸은 뭘 잘하니까 어떻게 키우고, 몇째 아들은 뭘 좋아하니까 어떻게 키우고. 또 얘들을 키우기 위해서 돈은 어떻게 저축을 하고 무슨 계를 들고. 주로 그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린 마음에도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이 ‘아 우리 부모님이 우리의 장래를 위해서 다 저렇게 미리미리 준비하고 계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가 부모가 되고 보니까 저와 동역자가 주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하영이는 어떻게 키우고, 세한이는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새벽기도 나올 때는 “누구  목자는 어떻게 결혼문제를 도와주고, 어떤 목자는 어떻게 장래방향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 대부분 그런 대화로 하루를 보냅니다. 저는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 부모나 목자도 이처럼 양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고민하고 준비하는데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서로 토의하고 연구하고 고민하실까?” 창세기 1:26절에서도 보면 삼위 하나님의 토의가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모든 동식물을 다스리게 하자”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깊이 논의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우리를 키우시면서 매일 토론을 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의 특권이요, 도리입니다. 베드로 전서 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6,7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염려는 근본적으로 사단이 우리마음에 심는 불신과 분열의 씨앗입니다. 염려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염려대신 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나의 일을 주님께 맡기고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 장래를 대비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나라, 내 왕국을 구축할 것인가? 그것부터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우리 인생들을 화평케 될 수  있을까? 그처럼 하나님의 일, 하늘의 일을 먼저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좋은 자녀요, 동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나 살 궁리만 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면 잘 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서운하게 생각하시고 하나님께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일이 안 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고,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내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미처 구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서 챙겨주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습니까? 부와 귀를 구했습니까? 아닙니다. 열왕기상 3:7-9절에 보니까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은 내 백성, 내 나라, 내 왕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백성, 주의 나라를 위해서 필요한 지혜를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시고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셨다고 했습니다(왕상 3:12,13).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몸부림을 쳐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닫아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보십시오. 아무리 별의 별 농법을 다 개발하고 애를 써 봐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뜻대로 하니까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지금도 먹을 것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구제헌금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축복의 창고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먼저 하늘 창고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도 집안에서 그렇잖습니까? 자식들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면 이뻐서 뭐든지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부모에게는 조금도 관심도 없고 올 때마다 뭘 좀 가져 갈까? 어떻게 좀 뜯어 갈까? 그런 생각만 하면 아무리 부모라도 도와주고 싶지 않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어디서 그런 글을 봤습니다. “시계를 보고 얼마나 빨리 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침반을 보고 어디를 향해서 달려 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습니다. 나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나의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집중될 때에 하나님은 내 인생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가 목표지점인지도 모르고 나 혼자 죽어라고 뛰는 것 하고. 하나님께서 위에서 보시고 원격조종으로 이리가라 저리가라 그렇게 지시해 줘서 따라가는 것 하고 어떤 길이 빠른 길이겠습니까? 후자가 훨씬 현명한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런 분이십니다. 로마서 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13절에서도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하늘 아버지를 믿습니다. 신뢰합시다. 내 인생을 온전히 맡깁시다. 그리고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합시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하여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늘의 축복을 체험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