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12 강
성숙한 인간관계의 황금률
말씀: 마태복음 7:1-12
요절: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인간관계의 황금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상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를 위한 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너를 위한 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자연스럽게 ‘나를 위한 너’의 가치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가치관, me-centered life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가치관은 God-centered life, you-centered life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 타인 중심의 가치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오늘은 타인 중심의 가치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타인 중심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예수님은 좋은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왜 가장 먼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큰 적이 바로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헬라어로 ‘크리노’로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서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서 그 사람을 단죄하고 심판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나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이 나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여인을 정죄하기 위해서 돌을 들고 씩씩거리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손에서 돌을 놓고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 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남을 정죄하고 비판할 때 자기는 바라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허물에만 포커스를 맞춥니다. 때문에 그 허물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보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보지만 자기의 허물을 볼 때는 썬글라스를 끼고 본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는 현미경을 들이대고 보기 때문에 엄청나게 크게 보입니다. 그것도 아주 칼라풀하게, 심각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허물을 대할 때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보이기 때문에 별로 잘 보이지 않습니다. 흑백사진처럼 고상하게, 그저 대수롭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의 허물은 대들보요, 다른 사람의 허물은 티끌에 불과하다고 하십니다. 이를 볼 때에 우리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모릅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로맨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다른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면 스캔들이라고 비난합니다. 내가 승진할 때는 내 능력의 결과라고 자랑하지만 다른 사람이 승진을 하면 줄을 잘 섰기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내가 선거에 나갈 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우국충정이라고 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선거에 출마하면 저 사람이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정치를 한다고 비난합니다. 내가 기도를 길게 하면 내가 기도의 종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기도를 길게 하면 왜 저렇게 중언부언하는가 비판 합니다. 우리는 모두 눈 속에 큰 대들보가 하나씩 박혀 있어서 왜곡되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탓할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내 속에 있는 허물과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4:11,12절에 보면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의 속사정을 어떻게 알 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졸업식장에서 총장님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졸업생들이 두 손으로 깎듯이 졸업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 생이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런 버릇없는 학생을 봤나?” 그때 한 학생이 그런 말을 해 줍니다. “저 학생은 월남전에 참전했다고 한 손을 잃었답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일제히 숙연해졌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속사정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속단해서는 안됩니다.
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비판의 배후에 사단이 역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근본적으로 비판자요, 참소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사단이 아담을 찾아와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열심히 비판하였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었겠어? 너를 노예로 삼으려고 하셨지? 그것도 몰라?” 이렇게 해서 사단은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성을 파괴시켰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가정도 파괴시켰습니다. 인류 최초의 교회인 에덴동산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비판에는 그 배후에 보이지 않는 영이 있고 세력이 있습니다. 비판에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었습니다. 비판에는 독이 숨어 있습니다. 책망의 말은 그때는 쓰지만 그래도 그 사람을 살리는 약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은 그때는 달콤하고 재미있지만 그 안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들어 있습니다. 비판은 가장 먼저 비판 받는 당사자를 죽입니다. 비판의 말을 듣는 제 삼자도 죽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판하는 자기 자신도 죽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정말로 비판의 말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내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내가 똑같이 비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그 자체가 순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판은 부메랑과도 같습니다.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을 보십시오. 모르드개를 목매어 죽이고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신랄하게 비판하고 모함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은 그 장대에 자신이 매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돌아다니면서 이복형제들을 비판하고 불신을 심고 험담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고자 70명이나 되는 이복형제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비멜렉은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서 머리가 깨져서 죽었습니다(삿9:53).
5절에서 예수님은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순수하지 않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정말 그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된 사람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줄지언정 비판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의 눈 속에 티가 내 자식의 티라면 비판하겠습니까? 오히려 허물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할 수 있는대로 덮고 쉬쉬하며 자신이 나서서 몰래몰래 수습하고자 애를 쓸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자식이요, 내 가족이요, 내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비판하는 대상을 ‘형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과 5절에서 ‘형제’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아닙니다. 원수가 아닙니다. 형제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마귀 사단입니다. 마귀 사단을 비판해야 합니다. 복음의 원수들을 대적해야 합니다.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개와 돼지들은 경계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진리를 우습게 생각하고 짓밟고 상하게 하는 대적자들은 분명하게 대항해서 싸워야 합니다. 싸워서 물리쳐야 합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형제된 자는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아비의 마음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찬송가 278장에도 보면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했습니다. 우리는 형제요 친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받은 주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이요, 복음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들의 허물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사랑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잘못을 보고 비판하기 보다 좋은 점을 보고 한사코 칭찬하기에 힘을 씁시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우리 죄인들 비판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정죄하시고 판단하시고 저울에 달아서 미달되는 사람은 다 처단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대신 비난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비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까?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어도 끝까지 견디고 소망을 끊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속아주기도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허물을 보고도 못 본체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요,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비유가 나옵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유산을 가지고 이방 땅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법대로라면 당장 법정에 고발해서 손해배상을 청구해야죠? 그러나 그 아버지가 어떻게 합니까? 한마디도 비판하거나 아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형은 동생을 미워하고 비판하고 험담을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동구 밖에 가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도 아무런 책임을 묻거나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옷을 갈아 입히고 신발을 갈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잔치까지 벌여 줍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아비의 마음입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자식이 어떻게 됩니까?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좋은 아들로 변화가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아버지는 오래 참았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을 변화시킨 것이지 비판이 아들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안과 의사 선생님들의 말에 의하면 눈은 참으로 예민한 조직이기 때문에 함부로 칼을 대거나 하면 큰 일 난다고 합니다. 눈에 티가 들어갔을 때에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눈물이 흐르게 해서 저절로 티가 빠져 나오게 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허물이 있다고 해서 비판을 하고 지적을 하고 야단을 친다고 티가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눈에 핏발이 서서 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관계성이 파괴됩니다. 사랑으로 감당하고 품어줄 때에 그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 저절로 눈 속에 티가 눈물을 타고 빠져 나오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대할 때도 그러했습니다.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향해서 칼을 겨누어도 비판하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참고 또 참았습니다. 감당하고 또 감당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호소할지언정 사울을 향해서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에 나중에 사울이 어떻게 합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다윗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6)”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라(삼상 24:20)” 다윗의 사랑이 사울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받는 자들까지도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도해 주셨습니다. 그랬을 때에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의 십자가 멧시지를 듣고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누구를 향해서도 함부로 비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어찌 남의 작은 허물을 가지고 헐뜯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보다 참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저희들이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을지라도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참고 사랑하고 감당하고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문제들이 눈 녹듯이 녹게 되는 신기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을 믿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같이 7,8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 예수님께서 왜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다가 갑자기 기도이야기를 하십니까? 그것은 기도가 인간관계의 갈등을 푸는 가장 좋은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변론을 하고 변명을 하고 말로서 상대방을 설득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더 오해가 쌓이고 문제가 커지고 상처만 깊어집니다. 그러나 사실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더불어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서에 나오는 한나를 보십시오. 브닌나가 한나를 구박하고 못살게 굽니다. 이때 한나는 “누가 정실 부인인가 따져 보자” 하며 브닌나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남편 엘가나를 찾아가서 바가지를 긁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누구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한나의 태의 문을 여사 사무엘이라는 좋은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한나는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책임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자학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사극을 보면 계파와 계파 간에 얼마나 무서운 암투가 벌어지는지 모릅니다. 맨날 서로 모여서 서로 비판하고 모함하고 죽고 죽이는 것, 그것이 인간의 역사고 정치판입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비판의 명수들입니다. 특히 각 당의 대변인들은 가장 독설을 잘 퍼붓는 사람, 비판의 고수들, 저격수들을 배치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목을 매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너무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어짜피 인간의 한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가 구하면 좋은 것으로 주시고자 애를 쓰십니다. 26명을 죽인 천하의 살인마 유영철도 자기 아들만큼은 끔찍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까지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들 내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최상의 것을 주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에 사람에게 나아가서 비판하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1:17절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에 하늘의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퍼 부어주십니다. 이처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내면에 여유가 있습니다. 마음에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넉넉함이 있고 부요의식이 있습니다. 마음에 흘러넘치는 뭔가가 있기 때문에 자꾸 주고 싶습니다. 베풀고 싶습니다. 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녹고 사랑의 심정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기도생활이야말로 인간갈등의 어려움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이미 좋은 것으로 받았으므로” 하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서 좋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온갖 좋은 은사들과 각양 선물들을 매일 매일 공급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먼저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in everything, 이는 할 수 있는대로 베풀고 주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내가 받고 싶으면 다른 사람은 또 얼마나 받고 싶겠습니까? 내가 칭찬받고 싶다면 상대방은 또 얼마나 칭찬받고 싶겠습니까? 내가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싶으면 그 사람은 또 얼마나 인격적인 대우를 받고 싶겠습니까? 내가 사랑받고 싶으면 상대방도 사랑받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으면 그 사람도 위로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대접하고 먼저 사랑하고 먼저 위로해주고 먼저 인정해주고 먼저 칭찬해 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그 사람이 먼저 나를 대접해 주면 나도 그렇게 대접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섬겨주었기 때문에 나도 섬겨주어야지” “그 사람이 언젠가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나도 도와주어야지”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했으니까 언젠가 본때를 보여 주어야지” 그게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So, in everything. 그 사람이 내 기억에 좋은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그 사람이 내게 잘 대해 주었던지 무관심했든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었던지 아니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먼저 대접하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총체요 성경의 결론입니다.
어떤 아이가 산에 올라가서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이 나쁜 놈아”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 나쁜 놈아 이 나쁜 놈아 이 나쁜 놈아” 그 소리가 수도 없이 메아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집에 뛰어와서 엄마한테 그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는 ‘이 나쁜 놈아’ 한마디 밖에 안했는데 산들이 나를 향해서 ‘이 나쁜 놈아 이 나쁜 놈아’ 열 마디를 해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습니다. “다시 올라가서 ‘사랑해요’ 해봐라” 그래서 그 아이가 산에 올라가서 “사랑해요” 했더니 사방에서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요’라는 메아리가 들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관계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서 되돌아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황금률은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사랑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칭찬의 말, 위로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마음에 안 드는 것, 불만스러운 것이 있지만 그러나 할 수 있는대로 좋은 이야기, 은혜가 되는 이야기, 소망스러운 이야기, 비젼이 넘치는 이야기, 칭찬하는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해야 먼저 합니다. 그곳에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이런 사람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내가 남에게 칭찬을 주고 사랑을 주고 도움을 주면 절대로 손해가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 30배, 60배, 100배로 되돌려 받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넘치도록 베풀어 주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이 아무리 불의를 행해도 모든 것을 다 참고 끝까지 사울을 먼저 왕으로 섬겼습니다. 나중에 사울의 일가가 다 죽었는데도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찾아서 챙겨줍니다. 그가 다리를 져는 장애아였지만 일생동안 같은 상에 앉히고 밥을 먹입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원수 집안의 자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까지 품고 먼저 사랑하고 섬깁니다. 그런 다윗을 보고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십니다. “이 사람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다윗의 왕위를 견고케 해 주셨습니다. 또한 모든 백성들이 다윗을 존경하고 믿고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우리인생들로부터 존경과 섬김을 요구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삶이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에 비판하기 보다도 불쌍히 여기고 기도를 해주고 사랑해주기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모든 사람을 가슴에 품고 섬기는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이 어려움과 부족함이 있어도 비판하고 불평하기 보다도 서로서로 세워주고 도와주고 칭찬해주고 기도해주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잘 되는 하나님의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