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3강

                                                                     행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말씀: 마태복음 7:13-29

요절: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께서 그동안 산상보훈 말씀을 통해서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산상보훈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았어도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은혜 받고 즐기라고 주시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해서 진짜 복을 받으라고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행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입니다. 우리 다 같이 해 봅시다. “행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신앙생활 속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서도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요, 헛 것이라(17,20)”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한 말씀이라도 가슴에 새기고 순종하여 행 할 때 큰 축복이 임하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행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다 대조법을 써서 말씀하십니다. 두 종류 문의 비유, 두 종류 나무의 비유, 두 종류 집의 비유입니다.


 첫째로, 두 종류의 문입니다. 다같이 13,14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삶이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좁은 문입니까?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산상보훈에서 하신 말씀 중에 하나도 쉬운 것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하게 되는 것,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것,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 세상에 소금과 빛이 되는 것,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는 것, 오른 편 뺨을 치는데 왼쪽 뺨을 돌려 대는 것, 나아가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 정말 다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길이 절대로 쉬운 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좁고 험하고 협착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찾는 이가 적은 소수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누가 이런 인생을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자연스럽게 이를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그 문은 결국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때로는 속이 상하고, 피곤할지라도 이 길을 가야만 하는 이유는 그 끝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어느날 두 청년이 술이 잔뜩 취한 뒤 2차를 가기 위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쪽 교회 앞에 그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이 현수막을 보고 한 청년은 가슴이 뜨끔해서 2차 가는 길을 포기하고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청년은 교회로 들어가는 그 친구를 비난하며 2차, 3차까지 가며 죄를 즐겼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을 때에 교회로 들어간 그 청년은 회개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의 제 22대와 24대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을 지낸 그로버 클리블렌드 (Grover Cleveland: 1885~1889, 1893~1897)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계속해서 방탕한 길로 갔던 그 친구는 30년 후에 사형장에서 인생을 마감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그 결국이 문제입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 끝이 멸망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 결국이 생명입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장래가 보장된 넓은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좁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도 생명을 얻고, 수많은 동족들도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공대 쪽문을 나와 센타로 걸어 올라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야 양들이 센타 올 때 참 갈등 되겠다” 건널목을 지나 오른쪽 평탄한 한 길로 가면 유흥가들이 즐비합니다. 반면에 왼쪽 센타 가는 길은 가파릅니다. 한 여름에 센타까지 걸어올라 올려면 솔찬히 힘듭니다. 거기다 센타 들어와서 엘리베이터라도 타면 좋겠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누가 또 뭘 써 붙여 놓았습니다. 50세 이하는 할 수 없이 걸어서 3층까지 와야 합니다. 정말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넓은 문으로 가면 그 끝이 멸망이요,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 끝이 생명입니다. 우리가 청년의 때에 유혹이 많고 놀고 싶은 마음이 많지만 예수님이 가신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부활의 길입니다. 이번 여름에도 그렇습니다. 방학계획을 짤 때 놀러갈 것인가? 여름수양회에 참석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생각이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제가 구태여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20년, 30년 후에 우리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답이 나옵니다. 오늘 다 수양회 등록하시고 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둘째로, 두 종류의 나무 비유입니다. 15-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선지자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거짓 선지자요, 또 하나는 참 선지자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여기서 거짓선지자들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생명이 좁은 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은 길에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꼭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가신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양의 탈을 쓰고 정말 양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 속에는 음흉한 속셈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서 “양의 생명을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습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수다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말 많은 동네>에 사는 <달변>씨의 아들로서 말을 기가 막히게 잘합니다. 그는 주인공 <크리스찬>과 그 친구 <믿음>을 곁길초장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애를 씁니다. 성경말씀도 얼마나 많이 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주로 쉽고 편한 길만 이야기 합니다. 희생과 헌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거짓선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상업주의 시대이기 때문에 뭔가 신앙생활의 비법을 이야기 하는 척 하면서 돈과 인기를 모으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 속마음이 다 드러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했습니다.  


  다같이 16절부터 18절까지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과정은 속일 수 있어도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지 않습니다. 보통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는 3년에서 5년을 키워야만 먹을 수 있는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아주 맛있는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는 7년에서 10년은 키워야만 합니다. 7년에서 10년을 소리 소문 없이 묵묵히 영양분을 농축시키고, 따가운 햇볕을 참아내고, 온갖 비바람과 만고풍상을 이겨내야만 마침내 맛있는 과일을 맺게 됩니다. 참된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명예와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누가 보든 보지 않던, 묵묵히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자 애를 씁니다. 내면의 죄와 싸우고 육신의 소욕을 부인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투쟁을 감당합니다. 이런 내면투쟁을 10년, 20년, 30년을 감당하게 될 때에 마침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됩니다(갈5:22).


  반면에 나쁜 나무는 어떻습니까? 가시나무나 엉겅퀴나무는 빨리 자랍니다. 아주 번식력이 강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열매를 보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순진한 양들이 열매를 기대하고 접근했다가 그 가시에 찔려서 생명을 잃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선지자들은 뭐가 있는 것처럼 처음에는 떠들썩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삶을 보면 부끄러운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디서 누가 뭐라고 한다고 따라가서는 안 되고 조용히 그 열매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21,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아무리 입술로 ‘주여 주여’ 소리 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권능을 할지라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능력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적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심판의 때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정말 신기한 마술을 봤습니다. 사람을 긴 의자에 앉혀놓고 마술사가 중얼중얼 하니까 사람이 반 토막 나서 상반신이 잔디밭을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또 나머지 반 토막 난 하반신의 발가락이 꼼짜락 꼼지락합니다. 옆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마술을 부릴 수 있을까? 저도 너무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처럼 신기한 마술을 행한다고 참 선지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의 술사들도 이적을 행합니다. 지팡이로 뱀도 만들고 나일강물을 피로 변하게도 하고 개구리도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아닙니다. 이적과 기사가 참된 선지자의 기준은 아닙니다. 2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큰 이적을 행해도 불법을 행할게 되면 예수님께서 “떠나가라” 쫓아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관심을 갖아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21절 말씀과 같이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적에 너무 혹해서는 안 됩니다. 뭔가 다른 사람이 못하는 신기한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좋은 나무가 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무는 참 포도나무 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볼 때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아서 아무 볼품이 없었습니다(사53: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돌아가실 때에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에 그 피 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는 우리 온 인류에게 구원을 주는 생명나무였습니다. 지금도 그 예수님의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나무는 인간적으로는 저주의 나무요, 수치의 나무였습니다. 너무나 끔찍해서 감히 쳐다보고 싶지도 않는 혐오스러운 나무입니다.


  그런데도 왜 하나님의 교회마다, 그것도 맨 앞에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매달아 놓습니까? 괜히 멋있으라고, 뭐가 없으면 전면이 허전하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십자가가 생명의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는 참으로 아름답고 신비로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이 세상에 주어진 생명나무는 하나님 아들의 피로 물든 끔찍한 나무입니다. 이것을 보고 어찌 생명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가 영적인 눈을 떠서 그 나무를 보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 위로와 죄 사함의 은총을 덧입게 되는지 모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138장)” 우리가 이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될 때에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습니다.


 이 영적인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사모함으로 따라갑니다. 말씀의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주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을 빼먹지 않고 써서 먹습니다. 소감 쓰는 주간에 무슨 일 있다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한 양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애를 씁니다. 틈만 나면 집에 가서 TV보고 아기자기하게 시간 보내지 않고 센타에 와서 주님의 역사를 섬기고자 애를 씁니다. 힘써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습니다. 이런 사람은 장차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두 종류의 집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마감하면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를 집 짓는데 비유하셨습니다. 다같이 24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집을 짓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초공사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동경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무너지지 않은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Frank Lloyd Wright)씨가 설계하여 지은 임페리얼 빌딩(Imperial Building)이었습니다. 처음에 그가 건물을 설계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였습니다. 그가 한 설계대로라면 기초공사 하는 데만 2년이 걸리고 돈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지진이 일어났을 때 다른 건물들은 다 무너졌지만, '임페리얼 빌딩' 만은 무너지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기초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석’과 ‘모래’의 차이는 얼마나 깊이 팠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눅 6:48)”이라고 했습니다. 반석이라는 주초는 금방 나오지 않습니다. 깊이 파야 합니다. 그 깊이 파는 과정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한나절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순종하고, 자기부인하고, 회개하고, 결단하는데 많은 수고가 따릅니다. 많은 내적 투쟁과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마침내 반석이 나옵니다. 이 반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순종하여 우리의 집을 반석 되신 예수님께 짓게 될 때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치면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됩니다. 나는 예수님의 일부분이 되고 예수님은 내 인생의 기반이 됩니다. 내 인생 철학은 예수의 철학이요, 내 인생의 소망과 기쁨은 오직 예수가 됩니다. 살아도 예수, 죽어도 예수,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 때문에 슬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부활하시므로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내게 구원과 생명을 주신 분, 참 소망과 기쁨을 주신 이 예수님이 반석이 아니고 무엇이 반석이겠습니까? 돈이 반석입니까? 명예가 반석입니까? 육체의 아름다움이 반석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2,13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인생에 비바람이 닥쳐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게 되면 모든 공적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불이 타오를 때에 다른 것들은 다 불타서 없어지게 됩니다. 돈도, 명예도, 권세도, 미모도 다 잿더미로 변하게 됩니다. 오직 구원의 반석 되신 예수님만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예수님만을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1: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0,21)”하고 말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예수님을 반석으로 삼아 인생의 집을 지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얽매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기절했을 때도,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죄수의 신분으로 총독 앞에서 섰을 때도, 광풍을 만나 배가 파선하게 되었을 때도, 독사에 물렸을 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인생의 비바람과 창수가 불어 닥쳐도 끄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생의 위기가 닥쳐올 때 더 당당하고 스피릿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재벌총수들이나 정치인들이 법정에 출두할 때나 감옥에서 나올 때에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가? 종종 봅니다. 평소에 돈 있고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큰소리치던 그들이 법정에서 나올 때는 꼭 휠체어를 타고 입에 마스크를 하고 곧 죽는 시늉을 합니다. 그것은 세상권력과 돈이 마치 모래성과도 같이 얼마나 약한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무엇 위에 인생의 집을 짓고 계십니까? 찬송가 539장에 보면 “이 몸에 소망 무엔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는 120년 뒤에 홍수심판이 올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 짓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6:17)”고 하였습니다. 그는 미련할 정도로 우직하게 충성스럽게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120년이라는 시간을 소비해 가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이런 노아를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빌딩을 짓고, 별장을 짓고, 호텔, 콘도, 카지노, 유흥업소들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랬을 때에 세상 사람들이 지은 빌딩들과 별장들, 호텔들은 다 물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오직 노아의 방주만이 물위에 둥둥 떠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올수록 다른 건물들은 더 깊이 깊이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노아의 방주는 비가 많이 오면 올수록 더 높이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누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평소에 요령피우고 슬렁슬렁, 대충대충, 사람들 눈치 보며 적당히 신앙생활한 사람들은 그날에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어리석은 자, foolish man’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해서 방주를 지은 노아가 진정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날 동안에는 홍수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당히 모래위에 집을 짓고 견뎌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전혀 예기치 않는 순간에 인생의 비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다른 것은 빌려 줄 수 있어도 반석은 땅속 깊이에 있기 때문에 빌려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평소에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초를 깊이 파고 반석되신 예수님위에 견고한 인생의 집을 지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얼마나 빨리 지었느냐?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화려한 집인가? 얼마나 높이 올라 갔는가? 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기초가 튼튼한가? 가 중요할 뿐입니다. 오히려 기초가 튼튼하지 않는 상태에서 높이 올라가면 높이 올라갈수록 더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괜히 나보다 앞서 가는 사람, 높이 올라가는 사람,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묵묵히 말씀의 기초를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의 믿음이 빛을 발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저희는 오늘로서 주옥과도 같은 예수님의 산상보훈 말씀을 다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이 말씀을 듣는데서 만족하지 말고, 정말 이 말씀에 대해서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고자 말씀에 내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인생에 어떤 시련과 역경의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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