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15 강
먼저 나를 따르라
말씀: 마태복음 8:14-22
요절: 마태복음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우리가 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신 행적이 여러 번 나옵니다. 특히 불치병을 고치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만 바라보면 막연히 예수님의 따르는 제자의 삶을 동경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시니 얼마나 좋을까?” “그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만 보고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권능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가지고 다니시다가 뚝딱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아픔에 깊이 동참하십니다. 그가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그가 고통할 때에 함께 고통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치료하실 때에 그 병을 자신이 짊어져 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볼 때 그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병든 영혼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무엇보다 헌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 그런 사랑과 긍휼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심정적인 자세가 없으면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내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점검을 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치료해 주셨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은 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으로 중풍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15절에 보니까 그녀의 손을 만져서 열병을 떠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질병은 우리인간을 괴롭히는 가장 큰 고민거리 중에 하나입니다. 병은 우리의 몸을 아프게 합니다. 마음도 아프게 합니다. 집안에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온 가족이 침울해집니다. 특히 악한 영으로 인해 고통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 아픔은 말로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런 병을 치료해 주십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 주십니다. 지금도 병원에 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병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도 이런 저런 병으로 인해 병원에 다니거나 약을 복용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능력의 손으로 안수하실 때에 능히 치료될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이 터치되면 어떤 병도 떠나고 악한 영도 쫓겨나고 온전케 될 줄을 믿습니다. 저자 마태는 이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우리 다같이 1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저자 마태는 이사야 53장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들과 병을 담당하시고 짊어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의 병과 연약한 것들을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들이 잘못해서 병났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너희들 죄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졌으니 너희들이 책임져야지 내가 알 바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병과 연약함을 깊이 동정하시고 친히 담당하시고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과 연약한 것을 치료하시되 훅 불어서 날려 버리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헬리콥터에서 구호품 던져 주듯이 휙 그냥 은총을 던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친히 당신이 아픈 자가 되시고, 고난 받는 자가 되십니다. 채찍에 맞으심으로 아픈 자가 되십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무거운 병들을 짊어 져 주십니다. 예수님은 본래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의 연약한 것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 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짊어지셨습니다. ‘담당하셨다’는 것은 ‘떠맡았다’ ‘책임을 졌다’ 는 뜻입니다. ‘짊어지셨다’는 것은 ‘자신이 대신 지고 운반했다’ ‘고통을 참고 감수했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과 문제들을 내가 대신 떠맡고 책임지고 짐을 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사람이 잘 나가고 출세할 때는 너도 나도 달려들어서 함께 축하의 무등도 태워주고 일도 거들어 주고자 합니다. 그러나 병들고 연약한 사람을 일부러 찾아가서 그 짐을 져주고 병수발을 하고 그 사람을 떠맡아서 돌봐주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한 두 번 방문할 수는 있습니다. 친절하게 한 두 마디 위로의 말을 해주고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어떻게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성의 한계요, 사랑의 한계요, 능력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가끔 젊어서 반신불수가 된 남편이나 아내를 일생동안 수발하며 사는 훌륭한 사람을 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병을 짊어지고 담당한다”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한 가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 나와서 제가 직접 인터넷으로 확인해 보았습니다. 2005년 8월 1일부터 5일까지 KBS TV <인간극장>에서 방영된 내용인데 제목은 <내겐 너무 예쁜 당신>입니다. 얼마전 책으로도 출판되어서 많은 분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건설현장에서 페인트칠을 해서 먹고 사는 가정입니다. 남편의 이름은 이길수, 아내의 이름은 유금옥씨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 금옥씨가 20미터 사다리차에서 페인트칠을 하다가 추락하는 큰 사고를 당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아내 금옥씨는 4년 동안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그 아내가 언젠가는 깨어날 것을 믿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수발을 합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날 마침내 아내가 기적적으로 깨어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해”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아내는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합니다. 그녀의 정신연령은 5살짜리 꼬마 상태입니다. 그 부부에게는 아들 요한이와 딸 레지나가 있지만 전혀 엄마노릇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그런 아내를 남편 이길수 씨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7년 동안 병수발을 합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서 파마도 시켜주고, 얼굴 마사지도 해주고, 예쁘게 화장도 해주고,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서 별의 별 곳을 다 데리고 다닙니다. 남편은 그동안 아내의 병수발을 하느라고 있는 돈을 다 허비하고 지금은 화장품 외판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변함없이 아내의 병상을 지키고 있습니다. PD가 남편 이길수씨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헌신적으로 병든 아내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남편이 대답을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니까 그렇죠. 그래도 저는 제 아내가 너무나 예쁜 걸요” 그래서 제목이 <내겐 너무 예쁜 당신>입니다. 남편 이길수씨는 자신이 과거 젊은 시절에 망나니같이 살 때 그 아내가 자신의 모든 허물을 담당해 주고 참아주고 섬겨 준 것을 생각할 때에 아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맙고 사랑스럽고 예쁘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부를 보면서 ‘담당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짊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담당한다’ ‘짊어진다’는 것은 병들어서 앞뒤 못 가리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모든 것을 수발해 주는 것입니다. 아내의 병과 연약함을 남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랑으로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조금도 힘들어 하거나 귀찮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과 연약함을 짊어지신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 병든 요소들을 책망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내 삶 속에 들어오셔서 나의 부족한 것을 다 받아 주시고 챙겨주십니다. 나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과 연약한 것을 다 자신의 몸에 전가시키고 우리에게는 나음을 주십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강건케 하십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죽어가지만 우리에게는 구원과 영생을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담당하는 것과 예수님이 담당하시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부모가 되었건 남편이나 아내가 되었건 담당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이길수씨의 경우는 정말 드문 예입니다. 또 담당을 해 주어도 아내가 온전케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온전한 존재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각자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두 죄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에 억눌렸던 자들입니다. 마음의 병, 영혼의 병, 육체의 병, 각종 병으로 신음하던 병든 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수많은 병들을 나 홀로 짊어지고 살아가고자 할 때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나의 연약한 것과 병을 다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참 평강과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내 짐이 점점 무거워 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 주사 내 대신 짐을 져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찬송가 363장)” 베드로 전서 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지 우리에게 영혼의 죄 사함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 육체의 질병도 깨끗이 낫게 해 주시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건강하고 정결한 삶을 살게 된 것이 나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랑과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고 항상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짊어지심과 감당하심의 수고를 모르고 그저 외적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만 바라보면 막연히 예수님을 부러워하기 쉽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런 사람이 등장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한 서기관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과 능력이 부럽고 사모가 된 것 같습니다. 18절에 보면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쌌다고 했습니다. 서기관의 눈에는 예수님이 대단한 인기인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은 서기관으로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가르쳐도 잘 능력이 나타나지도 않고 사람들이 잘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는 저렇게 많은 무리가 따른 것을 보니 너무나 부럽고 신기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자신도 이제 예수님을 따르다 보면 인기도 누리고 능력도 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20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의 삶은 사람들에게 에워싸 다니며 대접받고 영광 받는 삶이 아니란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예수님을 따르고 존경하고 떠 받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자들입니다. 지금은 저렇게 예수님은 흠모하고 사모하고 따르는 것 같지만 언제 저들이 손가락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의 속성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간사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양무리들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기가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여기서 ‘머리 둘 곳 없다’는 것은 단순히 일정한 거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평생 집 없는 천사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소망의 뿌리를 내리고 살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습니다. 요즘처럼 장마철이 되어 비가 오면 산에서 뛰어다니는 짐승들도 다 자기들의 처소로 들어가서 쉽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도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고 몸을 추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양들의 도움의 필요한 때면 언제든지 가야 합니다. 가난한 삶도 각오해야 합니다. 배고픈 삶도 각오해야 합니다. 고난과 핍박도 각오해야 합니다. 배척을 받아서 도망 다니기도 해야 합니다. 마침내는 골고다의 언덕 십자가의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생들의 존경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만삭이 된 몸인데도 호적하러 고향까지 가야 했습니다. 해산 날이 찼지만 누구 하나 방을 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잔인한 헤롯대왕이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임으로 말미암아 멀리 애굽까지 피신해서 유아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소년시절은 가난한 목수 요셉의 집에서 많은 가족들과 동생들을 부양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30세에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는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며 문제 많은 양들을 도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뒤 부활 승천하여 다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기까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누구도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무리들이 에워싸 밀며 좇고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떠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스스로 외롭게 되시고 가난하게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8: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이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그 내면이 가난하고 병든 우리를 부요하고 강건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자신을 꾸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360장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 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아보고 많은 영광 보여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예수님은 괜히 영적인 소원을 가지고 나아온 서기관의 소원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소원은 좋습니다. 단지 “주께서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주께서 앞으로 가실 길을 가르쳐 주신 것 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를 때에 인간적인 환상을 가지고 따르게 된다면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에 갈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축복받고 사랑받고 은혜 받을 때는 괜찮지만 핍박받고 고난 받고 시련을 당할 때는 제 갈 길로 가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중에 제자들이 실패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되 나의 유익을 위해서 현실적인 필요를 위해서 따를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따라야 하겠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을 소망하며 예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8-11)” 저희들이 오직 예수님 자체를 얻고 예수님을 배우고 장차 부활의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영적인 열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길 기도합니다.『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는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소유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내려놓음이란 나 중심의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신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것이다” 저희들이 인간적인 환상을 내려놓고 주님의 크신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함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하늘의 위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1절을 봅시다. 이번에는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 이 말씀에 대해서 학자들 중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학설은 아버지가 지금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다는 견해입니다. 또 한 학설은 아버지가 지금 연로하시기 때문에 연로하신 아버지를 봉양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때 와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다는 의견입니다. 그러나 어떤 학설이건 간에 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먼저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옵소서” 그에게는 가족이 먼저였습니다. 인간관계가 먼저였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공부 합시다” “예배 좀 나오세요” 그러면 “먼저 시험공부 해 놓고요” “먼저 얘들 키워놓고요” “먼저 이런 저런 문제 해결해 놓고요” “수양회 갑시다” 하면 “먼저 아르바이트 하고요” “먼저 MT 갔다 와서요” “먼저 가족여행 갔다 와서요” 이런 사람의 말만 들으면 굉장히 가족을 사랑하고 효자인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핑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먼저 내가 하고 싶은 것부터 끝내고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항상 주님의 일은 후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해 주십니까?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제자가 지금 무엇에 먼저 마음을 드려야 하는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을 따르면서 생명 구원역사를 섬기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죽지 않도록 생명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 쫓아다니며 장례식 치러주는 것이 중요합니까? 정말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죽은 뒤에 쫓아가서 장례 치를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할 수 있는대로 복음을 믿고 영생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할 때에 가족보다, 친구보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박요셉 목자님께서 홈페이지에 쓰신 zion칼럼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루마니아가 아직 공산국가로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푸로레스코 목사님이 공산당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어느날 11살 먹은 목사님의 아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보는 앞에서 그 아들의 옷을 다 벗기고 거꾸로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끓는 물을 코에 부어넣는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문을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자신이 고문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아들이 고문을 당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고문을 당하고 있던 아들이 이렇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조금만 참으세요. 저는 배신자가 된 아버지를 제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아요.” 이 말에, 푸로레스코 목사님은 다시 용기를 얻어서 끝까지 공산당에게 저항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입니다. 그 목사님이나 아들은 부모나 자식보다 예수님이 먼저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사랑하는 가족이나 그 누구보다 최상의 가치와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장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먼저 찾아오시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가장 먼저 예수님을 따르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나의 장래를 위해서 뭔가를 부지런히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먼저 내 앞 가름부터 하고 나서 사명이고 뭐고, 양들이든지, 수양회 역사든지 섬겨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나를 따르라” “먼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마음을 드려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이를 구하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막8:35). 푸로레스코 목사님이 인간적 정에 얽매여 가족관계를 먼저 생각하고 예수를 부인했다면 순간적으로 자신과 아들의 목숨은 구원할 수 있었겠지만 영원한 구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믿음의 길, 예수님의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요, 고난과 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드시 기쁨과 영광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스크바에 최 안드레 선교사님은 예수님을 만난 뒤 선교사로 살고자 할 때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부모님이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고생하시며 평생 자식들을 위해서 헌신하신 부모님을 장남인 자신이 모셔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고 나서 선교사로 살든지 사명을 감당하든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인간적인 연민의 정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마태복음 8:22절 말씀을 붙들고 부모님을 하나님께 맡기고 과감하게 선교사로 나아갔습니다. 그때 오히려 믿지 않던 부모님이 하나님을 영접하시게 되었습니다. 두 동생들도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집안이 복음화 되는 축복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따르면 손해보고 망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께서 확실하게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먼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이로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길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에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자체에 최우선권을 두고 따라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도 우리를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과 약점을 담당해 주시며 우리를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