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강


                                                       참 안식 = 짐은 내려놓고 멍에는 메고


말씀: 마태복음 11:1-30

요절: 마태복음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마음에 참 안식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안식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이란 무조건 짐을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짐을 내려놓을 때도 어디에 내려놓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조건 다 벗어버리고 아무런 부담도 없이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진정한 안식을 위해서는 메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첫째로,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는 죄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회의적인 생각에 빠진 내용이 나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과연 약속된 메시야인가? 아니면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만 하는가? 고민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메시야라고 전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불의한 헤롯을 책망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도 깜깜 무소식이자 마음이 힘들어졌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자신을 감옥에서 끌어내 주어야 하지 않는가? 헤롯퇴진을 위한 촛불집회라도 주도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였습니다.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메시야관이 있었기 때문에 감옥에서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마음에 나름대로 신앙적 편견이 있을 때에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어려움에 처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세상은 이처럼 불공평한가? 김정현 목자님은 별로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미국에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고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데 깜깜무소식인가? 이런저런 오고가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나름대로의 편협한 생각을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행하고 계시는가 그것에 관심을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겨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생명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처럼 대구속사적인 측면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지 나의 유익과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면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깊고 장엄한 구속계획에 눈을 뜨지 못하면 자꾸 sorry한 생각, 서운한 마음 때문에 마음에 안식이 사라집니다.


 세례요한도 편견 때문에 힘들어 했다면 왜 우리라고 편견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는 내 나름대로의 편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중심의 메시야관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모든 서운한 마음과 회의적인 생각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건설하실 천국에서는 누구든지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천국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누구라도 세종대왕보다 위대합니다. 적어도 자가용을 운전하고 핸드폰과 인터넷을 자유롭게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종대왕보다 더 훌륭해서가 아니라 내가 세종대왕 때보다 더 기술력이 뛰어난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무리 믿음이 좋고 훌륭해도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사 사망권세를 파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세상을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압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생명력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천국 소망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어 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성령과 교제하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 성령께 지배 받는 삶,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는 내가 주님께 바라는 복보다 주님께서 내게 주시기 원하시는 복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의 짐이 가벼워지고 천국이 임하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이 가고 메시야 예수님이 오신 뒤부터 천국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힘들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렵게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과거가 아무리 지저분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직 천국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이제 침노당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천국은 이제 어느 특정한 사람, 특정한 민족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민족에게 활짝 개방이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24시간 무료로 개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적인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감, 자의식과 수치심, 패배의식, 실패감, 오만과 편견, 아집과 체면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감사함으로 천국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대개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이 천국의 기쁨을 잘 누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세리나 창기등 죄 많은 사람은 예수님을 쉽게 영접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기쁨을 빨리 체험합니다. 단순한 믿음으로 천국을 침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붕을 뚫고 나옵니다. 뽕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합니다. 무리들 뒤에 숨어서 필사적으로 나와 옷자락을 잡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눈치 보지 않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이처럼 단순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오는 자가  천국의 복을 침노합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소자야, 아들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삭개오야, 오늘 네 집에 구원이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서 적극적으로 천국을 침노하는 자에게 천국의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머뭇거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괜히 복잡한 생각하고 머리 굴리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예의 바른 척, 체면 차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천국의 바다에 풍덩 뛰어 들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놀라운 천국의 감격이 내 마음에 밀려오게 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10:11)” 우리에게 이처럼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16,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를 어떻게 비유하십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탄식하십니다. 주일날 찬양예배를 인도해 보면 가장 답답할 때가 흥겨운 찬송을 부르는데도 박수를 치지 않는 경우입니다. “난 예수가 좋다오. 난 예수가 좋다오” 앞에서 신나게 찬양인도를 하는데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퍼듀 수양회에 참석해 보니 싱얼롱 시간에 미국 목자들은 박수를 치고 뛰고 소리를 치고 환호를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목자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한국목자들은 그놈의 체면 때문에 무덤덤 하였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죠. 슬피 울면 가슴을 쳐야죠. 내 안에 성령을 근심케 할 만큼 숨은 죄가 있다면 탄식을 해야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까지 내 생명을 구원해 주셨다면 감사함으로 받아야죠. 우리에게 이처럼 귀한 천국을 선물로 주셨는데 이를 위해서 너무나 값진 댓가를 치루셨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 하시겠습니까? 우리 다같이 “예수가 좋다오” 천국의 기쁨을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박수를 치면서 힘차게 불러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도 적극적으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아집이 얼마나 무서운가 보십시오. 18절에 보면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사람들은 요한을 가리켜서 귀신들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양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자 ‘저는 먹기를 탐한다. 죄인들의 친구다’ 하며 비난하였습니다. 얼마나 가식되고 위선적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많은 이적과 권능들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과 편견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다같이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아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예수님은 교만 때문에 아집과 편견의 옷을 벗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면 얼마든지 천국복음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체면 때문에, 자기의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다 아는데 손해 볼 것이 두려워서 천국의 바다에 뛰어들지를 못합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세다야” 천국의 문은 언제까지나 은혜로 열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가 닫히는 날이 있듯이 천국문이 쾅하고 닫히는 날이 옵니다. 그날에는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교만을 떤 사람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우리가 천국의 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어린아이같이 겸손해야 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슬기 있다 하는 자들은 이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천국의 보화를 숨기십니다.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자에게만 천국보화를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꾸 어른스러움을 탈피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신앙연수가 더 할수록 더 순박하고 더 발랄하고, 더 열정적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이번 퍼듀 수양회때 보니까 배사라 선교사님은 나이가 80이신데 누구보다 기쁘게 찬송하시고, 춤추시고, 앞으로 선교사로 갈 사람 일어서라고 하니까 벌떡 일어나서 단으로 걸어 나가셨습니다. 


  이어령씨는 한국의 지성계의 대부로서 교만과 아집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언어감각과 외국어 실력으로 대학때부터 사상계를 주름잡았습니다. 그는 얼마나 교만했던지 서울대 국문과 학부 시절에 선배 작가들을 향해서 그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문화계는 화적지대다” 이 무식한 대한민국의 문화계는 불태워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하고, 문화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습니다. 그의 딸 미나씨는 미국에서 검사까지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높아졌겠습니까? 그런데 그 딸이 어느날 갑상선 암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 손자가 자폐증 때문에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딸은 너무나 힘든 나머지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망막이 상해서 실명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어령씨는 딸의 집을 찾아가서 이 처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교만이 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논객이다” 자부했는데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암환자에, 앞 못 보는 딸을 위해서 그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자폐증 때문에 학교도 가지 못하는 손자를 위해서 문화부 장관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하와이의 조그만 교회에 출석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암이 낫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력이 회복되고 손자가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권능 앞에 두 손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5절에서 말씀하신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우리 다 같이 다시 한번 5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에 무슨 철학적인 논리가 숨어 있습니까? 복잡하고 어려운 사상이 숨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순한 천국 복음이 담겨있을 뿐입니다. 이를 영접하기만 하면 천국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어령씨가 이전에 스스로 슬기 있는체, 지혜로운 체 했을 때는 복음이 정말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불합리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린아이같이 겸손해졌을 때에 마침내 눈을 떠서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근에 펴낸 『젊음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이성이라는 4차 방정식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지성을 넘어 영성의 5차 방정식까지 가야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노력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의 세계인 것입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준 높은 도덕이나 종교, 어려운 율법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괜히 힘들게 사서 짐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서 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하면 우리 주님께서 그 짐을 다 짊어지고 가십니다. 이사야 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질고를 다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죄의 질고, 질병의 질고, 실패와 좌절의 질고, 슬픔과 운명의 질고, 강박감과 상처의 질고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 우리의 모든 짐이 다 그 어깨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에 나의 죄도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묻히실 때에 나의 한과 슬픔, 수치와 아픔도 함께 매립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나도 함께 어두운 과거로부터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유합니다. 죄로부터 자유합니다. 과거로부터 자유합니다. 수치와 절망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참안식만으로 충만합니다. 나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저는 UBF에 와서 말씀공부를 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에게는 항상 저를 짓누르는 두 개의 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기대수준은 엄청 높은데 이에 못 미치는 나의 능력으로 인한 짐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도덕적으로 성인군자처럼 고상하게 살고 싶은데  죄 때문에 위선적이 되어야 하는 이중성의 짐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의 짐을 내 스스로 해결해 보고자 몸부림 쳐 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마치 죄수가 수갑에서 빠져 나오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옥죄어 오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저를 값없이 초청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너의 수고롭고 힘든 짐을 내가 대신 져 주리라”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나의 죄와 강박감을 다 내려 놓았을 때에 주님께서 참 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항상 잘해야 한다는 강박감과 쫓기는 심정 때문에 두 발 뻗고 잠도 편히 못 자던 제가 이제는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참된 안식을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멍에를 매야만 합니다. 29,30절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이것은 앞에서 말하는 안식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안식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는 죄 사함의 안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예수님을 배우는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사명의 멍에를 메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도 없이, 아무 사명도 없는 삶을 살면 당장은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안식이 아니라 안일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오히려 우리의 삶을 비상하게 하는 날개와도 같습니다. 새들에게 있어서 날개는 짐이 아닙니다. 새들이 자유롭게 창공을 나르게 하는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물고기에게 있어서 지느러미는 거추장스런 짐이 아니라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다니게 하는 참으로 중요한 기관입니다. 새가 날개가 부담스럽다고 떼어 보십시오. 하늘을 나는 백조가 아니라 미운 오리새끼로 전락하게 됩니다. 물고기가 지느러미를 떼어버리면 힘차게 물살을 차고 올라가는 연어가 아니라 도랑의 미꾸라지가 됩니다. 자동차에 엔진이 무겁다고 떼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부터 그 차는 쓸모없는 고철덩어리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사명의 멍에가 있을 때에 그 인생이 비상하게 됩니다. 힘찬 추진력을 갖게 됩니다. 그때에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수준 높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멍에는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고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소가 멍에를 매지 않으면 제멋대로 날뜁니다. 그러면 편한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멍에를 매지 않는 소는 버릇없는 소가 됩니다. 소가 밭도 갈고, 달구지도 끌어야 소답지,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아무 밭에나 들어가서 곡식을 뜯어 먹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소는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협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인생을 지으실 때에 분명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다스리고 개척하며 정복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인생의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방향이 있어야 합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향해서 땀 흘려 일하고 부지런히 달려갈 때에 인생에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어제 북경올림픽 유도경기에서 최민호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금메달을 딴 순간 얼마나 감격했는지 한참동안 메트에 얼굴을 쳐 박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훈련의 멍에도 없이 자유롭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선수촌을 드나들었다면  금메달을 땄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감독이 지시하는 방향에 따라 순종하여 금메달을 목표로 멍에를 메고 달려왔기 때문에 오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참된 안식과 기쁨을 위해서는 나의 인생을 잡아주는 분명한 멍에가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수양회에 가면 많은 젊은이들이 마약과 정욕문제로 무절제한 삶을 살면서 고통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들이 불행했던 것은 물질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육체적인 자유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삶의 질서를 분명하게 잡아주고 이끌어주는 멍에가 없기 때문에 함부로 살다가 죄의 덫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우리를 죄로부터 보호해주고 우리를 수준높은 사람으로 이끌어 주는 참으로 고마운 것입니다.


 죤 칼빈은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맨다는 것을 주님께 내 인생의 주권을 맡기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소가 멍에를 매게 되면 주인의 손에 고삐가 쥐어지게 됩니다. 주인이 이리 가라하면 이리가고 저리가라하면 저리 갑니다. 우리도 이제 내 인생의 고삐를 우리 주님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 되심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맘대로 살면 편하고 좋을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으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키를 주님께 내 드려야죠. 그리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거기에 안식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승리가 있고 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우리의 죄짐은 적극적으로 예수님 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며 예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는 참된 안식, 천국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