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 강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라


말씀: 마태복음 12:22-50

요절: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논쟁입니다.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같은 사람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것 처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주심으로 그 사람이 말을 하고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란 뜻입니다. 무리들은 순수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역사를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일하는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였습니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귀신의 조종을 받고 귀신의 도움을 받아서 일하는 귀신의 종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귀신의 종으로 매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똑같은 역사를 보고도 이렇게 다르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예수님을 좋지 않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사단은 하나님께 대해서 반발심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선악과에 대해서 악평을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순수했기 때문에 당연히 경외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선악과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이미 하나님께 대해서 대적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악한 생각을 심은 것입니다.


 이를 볼 때에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 35절에 보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품고 그 마음에 쌓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말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쌓았을까요? 자기들이 최고라는 생각, 자기들만이 정통이라는 생각, 자기들 외에는 다 틀렸다는 생각, 다 자기들 밑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쌓아 왔습니다. 그런 생각이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십년 이십년, 백년, 이백년이 쌓이다 보니 교만과 자기의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나의 생각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지금 무슨 생각을 쌓고 있는가? 정말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을 뜻을 찾는 겸손한 생각을 쌓고 있는가? 아니면 바리새인처럼 헛된 자부심과 자기 의와 교만과 우월감을 쌓고 있지는 않는지. 내 생각의 방향이 잘못된 곳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조용히 기도해 보면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때 잘못됐다 싶으면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좀 자존심이 상하고 억울할지라도 내 생각이 틀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방향이 옳다고 생각하면 빨리 회개하고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고 끝까지 자기 생각을 고집하게 되면 바리새인처럼 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중에 사도행전에 가서야 가슴을 치며 “우리가 어찌할꼬?” 땅을 치며 후회했던 무리들처럼 됩니다(행2:37).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권적으로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하나님 역사는 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겸손히 인정하고 배워야 합니다. 꼭 나를 통한 역사가 아닐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령의 역사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 생각을 다 들여다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귀신끼리 싸우면 서로 망합니다. 그런데 왜 귀신이 자기 친구 귀신을 쫓아내겠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당시에는 바리새인들도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 쫓아내면 귀신의 역사고, 자기들이 하면 성령의 역사고.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제 예수님은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다같이 2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역사는 엄연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앞에 도래한 것입니다. 그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예수님의  사역은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마태복음 1: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 위에 임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일 들렸다고 했습니다(마3:16,17).” 성령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어떻게 이기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리어 말씀을 기초로 싸우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시는 역사. 이 모든 역사가 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4:18절에 보니까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셨습니까? 로마서 8: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곧 성령께서 예수님을 부활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승천까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이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나라가 정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겸손히 인정하면 그 즉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십자가상의 강도를 보십시오. 그 흉악한 죄인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성령의 역사로 깊이 인정했습니다. 옆에 또 다른 강도는 예수님을 저주를 했지만 이 강도는 겸손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너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런 뜻입니다. 십자가의 강도일지라도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면 즉시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직접 보고 있습니다. 그 역사의 현장 가운데 있습니다. 지난 7월 말에 있었던 퍼듀 수양회는 정말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전 세계 70여국에서 3400명이 참석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선교비젼을 덧입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앞으로 선교사로 살 사람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라고 했는데 500명이 나왔습니다. 대부분이 2세들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UBF 홈페이지에서뿐 아니라 국민일보등 객관적인 보도매체를 통해서도 이 역사를 전해 들었습니다. 지난 주에 전요한 목자님께서 스탭목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한 중견 목사님은 우리 수양회에 이틀만 참석하고 다른 모임에 가기로 했는데 우리 수양회가 너무나 은혜로와서 다른 모임을 다 취소하고 우리 수양회에 끝까지 참석하셨다고 했습니다. 지난 논산 삼천리 수양관에서 있었던 우리 광주 여름수양회 때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 양님들과 리더들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요즘 김영근 형제님의 소감을 들을 때 참 은혜가 됩니다. 처음 이분이 센타에 왔을 때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했는데 요즘 아주 내용있는 소감을 발표합니다. 저는 또 시므온 안나팀 어르신들이 진지하게 말씀을 공부하고 열심히 메시지를 들으시는 것을 볼 때에 참 은혜가 됩니다. 나이는 많으신데 어린아이처럼 순수하십니다. 또 우리 김기도 목자가 나이지리아 선교사로 나아가고자 결단한 것도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 말은 별로 안 듣는데 형수인 룻 사모님의 카운슬링을 듣는 결단했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올해 파송한 선교사들을 살펴 보니까 영국, 키르키스탄, 일본, 미국, 중국 등에 6명의 선교사를 파송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아프리카, 중남미등에도 선교사가 나갈 것 같습니다.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까? 또 우리 학사님들과 사모님들이 올 가을 부터는 적극적으로 복음역사에 동참하고자 결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요즘 올림픽을 보면서도 우리 선수들 중에 많은 분들이 승리 후에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를 통해서 전 세계에 복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별의 별 흉찍한 말로 기독교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올 김용옥씨 같은 사람은 지금도 열심히 기독교를 비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의 역사를 무당들의 신 내린 역사와 동일시 합니다. 정말 한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1,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보다 성령님이 더 위에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고의적으로 훼방하는 죄는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만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물난리가 나서 한 마을이 고립되었다고 합시다. 이때 헬리콥터가 와서 구명 밧줄을 내려주는데 한 사람이 자꾸 의심을 심는다고 합시다. “저 밧줄은 썩은 밧줄이야. 저 사람들은 우리를 어디다 팔아 넘길거야” 그렇게 해서 한 사람도 구명밧줄을 잡지 못하도록 훼방한다고 합시다. 결국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다 급류에 휩쓸려서 큰 화를 당하게 한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악합니까? 그 사람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자기만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구원받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면 얼마나 사악합니까?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으면 자기들만 안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믿지 못하도록 고의적으로 예수님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매도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큰 죄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서운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연약하고 부족해서 죄에 넘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죄는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미는 것이기 때문에 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안드레가 하찮은 오병이어를 들고 나왔을 때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자 했던 삭개오의 진심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음에 싹트고 있는 믿음의 역사를 주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바라보면 한 팀의 1:1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줄기차게 캠퍼스에 올라가고 양들을 심방하고 새벽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없는 물질을 드려서 헌금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성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다들 귀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 한 두 가정이 House Church를 이루며 선교사명에 충성하고자 몸부림치는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일본 수양회에서도 토카이에 선교사님들이 많은 양들을 초청했다고 들었습니다. 토카이는 지금 개척 10년이 되었지만 아직 아브라함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교사님들은 줄기차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성령의 역사를 귀하게 보고 열심히 기도 지원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만약에 이런 역사를 하찮게 여기고, 자꾸 뒤에서 모임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소리를 한다고 합시다. 우리 가운데는 그런 분이 한 사람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는 큰 죄입니다. 특히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자꾸 인간적인 소리를 해서 그 사람을 실족시킨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죄인 것입니다. 자기는 별 생각 없이, 무심코 내 뱉은 말일지 모르지만 당사자에게는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3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혀는 곧 불이라’고 했습니다.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이것은 마땅치 않도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3:6-11)”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 치 혀로서 온 세상을 불태우는 큰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이 작은 혀로 아름다운 복음을 전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잠언 25:11절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 영적인 말,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 성령 충만한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 생각 속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생각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는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음료수 광고에 그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흔들어 드세요. 흔들어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과일 분말이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흔들면 흔들수록 그것이 올라와서 맛있는 음료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같이 다니면서 사귀어 보면 사귈수록 은혜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들수록 그 속에서 좋은 점, 배울 점이 올라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우리는 “보기보다 참 진국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흔들수록 그 속에서 안 좋은 것들이 올라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과거에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탐심과 죄의 소욕, 슬픔과 상처가 가득했기 때문에 툭 건들기만 해도 눈물주머니가 터지고 온갖 쓰레기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 안에 누가 계십니까? 그리스도께 사신 것이라.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흔들면 흔들수록 무엇이 올라옵니까? 예수님이 올라옵니다. 말씀이 튀어나옵니다. 성령의 은혜와 은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일제 시대에 최권능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입만 벌렸다 하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고 돌아다녔습니다. 이로서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수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일제 순사들이 너무나 미워서 감옥에 가두워 놓고 고문을 했습니다. 그만 복음 전하라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매를 맞을 때마다 최목사님이 크게 소리쳤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일본 순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네 속에는 뭐가 들었냐?” 그때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내 안에는 예수가 가득 차 있소. 그러므로 누가 나를 건들기만 하면 예수가 터져 나오는 것이라오” 최권능 목사님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쌓아 두었기 때문에 일제순사들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내 안에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독을 쌓고 있습니까? 선을 쌓고 있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그래서 영적인 것을 쌓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선한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TV만 보고 인터넷이나 뒤지고 허탄한 것들만 쌓은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허탄한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인생을 나무에 비유하십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저는 시골에서 자라면서 찔레나무와 장미나무를 잘 구분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 가시가 많고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또 탱자나무와 유자나무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 본질이 다 드러났습니다. 찔레나무에서는 절대로 장미꽃이 피지 않았습니다. 탱자나무에서 유자가 열리는 법이 없었습니다.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접붙인 바 되어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침내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습니다. 우리가 여름수양회때 배웠죠? 갈라디아서 5:22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42-45절에서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귀신 들렸다가 나갔는데 잘 단속하지 않으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사단의 지배를 받았는데 주님의 은혜로 이제 우리 내면이 깨끗이 청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것들을 드러내고 치웠으면 이제는 선한 것, 거룩한 것, 영적인 것으로 적극적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비워두면 사악한 것들이 또 들어옵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악한 것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가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적극적으로 말씀으로 우리 내면을 채우고 무시로 기도해서 성령 충만함을 덧입어야 하겠습니다. 


 30절 말씀처럼 영적인 세계에서는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요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입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깨어서 기도하므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소에 겸손하게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보던 보지 않든 우직하게 우리 안에 성령의 영양분을 쌓아서 풍성한 성령의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마지막 날에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책망의 말이 아니라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의 말을 듣는 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