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빌레몬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말씀: 빌레몬 1:1-25

요절: 빌레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빌레몬서는 바울이 AD 62년 경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 쓴 서신서입니다. 빌레몬은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 평신도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house church로 만들어서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노예 중에 오네시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어느날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서 달아났습니다. 그러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 감옥에서 사도바울을 만났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를 잘 도와서 예수님을 믿게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순한 양이 되었고 바울의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바울의 양들을 향한 사랑과 동역자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가장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전과자인 오네시모를 영적으로 잉태하고 낳아서 마침내 예수님의 제자로까지 키운 바울의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빌레몬을 동역자로 대우하고 사랑으로 간구하는 바울의 겸손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양들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또 동역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배우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한 양을 돕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감당한 바울입니다. 9,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은 지금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까? 갇힌 자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전달하러 갔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 정도 감옥생활을 하다가 로마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이미 나이를 많이 먹은 상태입니다. 그는 연로하였고 몸은 노쇠하였습니다. 감옥의 환경은 열악하였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무리 믿음이 좋고 내면이 성숙한 자라 할지라도 자기중심적이 되고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더구나 바울은 결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옆에서 섬겨줄 사모님도 없고 자식들도 없습니다. 그런 바울이 노년에 얼마나 쓸쓸 하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둡고 습기 차고 눅눅한 감옥이었습니다. 거기다 같은 감옥에는 세계 각국에서 내노라하는 죄수들은 다 끌려와서 수감되어 있습니다. 이때 바울이 만약에 인간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 쏘리한 마음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주여, 너무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서 그만큼 충성을 다했으면 좀 노년에 축복해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빌레몬서를 비롯하여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등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특히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 불릴 정도로 기쁨으로 충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그가 이처럼 감옥에서도 기뻐하며 문제에 빠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9b절을 보겠습니다.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바울은 예수님을 위하여 갇힌 자 되었기 때문에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만 생각하면 항상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귀한 보혈을 흘려 주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로서 바울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바울은 자신의 고난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해 오히려 감사하였습니다(골1:24).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도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감옥에 갇힌 사람들에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가지고 달아난 절도범입니다. 대개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도벽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와서도 옆의 사람의 물건에 손을 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가 과거에 절도범 있었다는 선입견 때문에 그를 사랑으로 돕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한 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영접하되 그를 예수님의 사랑으로 잉태하였습니다. 처음에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반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귀찮다고 말씀공부 하기 싫다고 튕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산모가 아이를 잉태하면 처음 몇 주가 아주 힘들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양들도 처음에 사랑의 관계성을 맺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 양이 내 품에 들어와서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맺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산모가 입덧을 하듯이, 목자도 말 안 듣는 양들로 인해 처음에 마음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비의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섬겼습니다. 어미의 마음으로 그를 품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밤새워 카운슬링을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왜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씨름하며 1:1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을 지나면서 오네시모는 점점 순한 양으로 변해 갔습니다. 꾸준히 말씀공부를 하는 가운데 오네시모의 마음 문이 점점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바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산모가 아이를 낳고 기뻐하듯이 바울도 너무나 기뻤을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모는 아이를 미워해야 합니다. 자신의 뱃속에서 온갖 영양분은 다 빨아 먹고, 죽을 고생을 시키고 세상에 나왔으니 얼마나 얄밉습니까? 그러나 산모는 아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많은 것을 주고 그 아이 때문에 고생했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자식을 사랑하고 귀하게 여깁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낳았기 때문에 그 자식을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양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양들로 인해서 얼마나 마음 고생을 많이 합니까? 한 양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얼마나 많은 물질이 들어가고, 얼마나 많은 나날을 잠 못 이루며 마음고생을 합니까? 그로 인해서 어떤 목자들은 위장병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들을 끔찍이 사랑합니다. 또 어찌하든지 양들을 잉태해서 낳고자 캠퍼스에 올라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양이 어느날 회개하고 변화되어서 새 사람으로 거듭날 때에 우리는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연탄장수처럼 시커멓던 양이 수양회에 참석해서 해같이 밝은 미소로 피어나게 될 때에 우리는 온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쁘고 감격스럽습니다. 이 맛에 우리가 목자 생활하는 것 아닙니까? 때로는 속을 많이 썩인 양일수록 더 정이 가고 사랑이 갑니다. 그 양을 위해서 사랑을 많이 쏟고 눈물로 기도하고 심령을 다해 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이 기쁨을 알기 때문에 한 양을 돕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데 손짓 발짓을 해가며 1:1을 합니다.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먹을 것을 사주고 입을 것을 선물해 줍니다. 아예 집에서 데리고 삽니다. 친 자식과 같이 키웁니다. 그래서 어떤 이방목자들은 친부모 보다 더 목자를 신뢰하고 따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부모는 자신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나라의 선교사님들이 와서 자신을 거두어 주고, 사랑해 주고, 해산의 수고를 거쳐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까지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 센타에 주일예배 사회를 보는 죄냐 비시스키라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으로 연약한 형제였습니다. 다행히 머리가 좋아서 모스크바 대학 공대에 들어왔지만 글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리포트를 써 주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수업을 따라지 못하고 제적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연약하고 소망 없던 형제를 우리 센타 출신인 최 룻 선교사님이 핏싱하여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가 제적이 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심방 가서 믿음을 심고 도와 주었습니다. 최이삭, 룻 선교사님 가정이 이처럼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며 도왔을 때에 마침내 그 죄냐 목자가 재입학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스크바 대학 재료공학파트 나노분야에 박사과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나자 자매님과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주일예배 때 사회를 보며 특송으로 하나님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선교사님들을 부모님같이 따르고 존경하며 순종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버지도 자신을 버렸고 그는 죄의 세력 때문에 무기력하여 쓸모없게  되었는데 우리 선교사님들이 해산의 수고를 통해 키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도 바울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10절을 같이 읽어 보시겠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신이 낳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에 바울은 오네시모를 영적 아들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도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과거에 오네시모는 무익하던 자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이나 훔치는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도움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2절에서는 바울의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는 정말 아무 쓸모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역사에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적인 아들이요, 심복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네시모 한 사람을 해산의 수고로 섬긴 바울의 목자 심정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어디를 가나 양들을 이런 자세로 섬겼습니다.


 사도행전 20:31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섬길 때에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섬길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다”고 했습니다(고전4:15). 갈라디아 교인들을 섬길 때도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갈4:19). 바울은 어디를 가나 누구를 도우나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낳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핏방울 하나 튀기지 않은 남의 자식들입니다. 특히 오네시모는 노예출신이고,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고 품고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요, 복음의 동역자요, 자신의 심복으로까지 키웠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예수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과거에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중에 괴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에 말에서 떨어지게 해서 목이 부러져 죽게 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리어 그에게 긍휼을 베푸사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사 만민 구원역사에 하나님의 동역자요 심복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생각할 때에 바울은 어떤 소망 없는 사람도 소망을 가지고 품고 사랑하며 해산의 수고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 성장한 오네시모는 마침내 후에 에베소 교회에 감독으로까지 성장하였습니다. 노예출신이, 전과자 출신이 당시 초대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회의 감독으로까지 쓰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를 볼 때에 한 영혼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비슨이라는 의료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백성들 가운데 이질에 걸린 환자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한 사람이 이질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백정이었습니다. 이때 에비슨 선교사가 왕진을 갔습니다. 주변에서는 당시에 백정은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에비슨 선교사는 왕진을 갔습니다. 이에 감동을 받은 그 백정은 바로 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정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박서향이었습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이 백정의 아들 박서향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친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를 학교에 보내서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백정의 아들 박서향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대인 연희전문의대에 7명의 의대생 중에 한 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의대를 졸업한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의대교수 중에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백정, 그리고 그 백정의 아들. 누가 그들을 쳐다보기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에비슨 선교사 한 사람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도왔을 때에 마침내 백정이 크리스찬이 되고 그 백정의 아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대교수가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어떤 학교에 토마스 모니안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거칠고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모든 선생님들이 싫어하는 문제아였습니다. 하지만 베르쟈라는 선생님은 그를 볼 때마다 그에게 희망을 심고 사랑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모니안! 하나님께서는 너를 사랑하신단다. 너도 큰 일을 할 수 있을거야” 모니안은 학교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적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항상 베르쟈 선생님이 심어 준 희망의 말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기치 않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피자 만드는 기술에 재미를 붙여 자기만의 독특한 피자를 개발해 내었습니다. 그 피자가 바로 미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팔리는 도미노 피자입니다. 그는 또 프로야구 구단인 디트로이트 팀을 인수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많은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문제아라고 생각하고 포기해도 포기치 않고 희망의 말을 해준 그 베르쟈 선생님의 권면과 사랑이 한 비행청소년을 희망찬 인생의 개척자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한 사람의 목자의 심정과 해산의 수고가 마침내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역사에 충성스러운 일군이요 심복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겉모습만 보고 편견을 가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목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다 소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노예고, 전과자이고, 제적생이고, 백정의 아들이고, 비행청소년이었다 할지라도 얼마든지 위대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해산의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가장 값진 헌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마음, 목자의 심정으로 양들을 보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므로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을 낳고 키우는 선한 목자들이 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빌레몬에게 사랑으로 간구하는 바울의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1절부터 7절까지에 보면 바울은 빌레몬의 가정교회를 장황하게 칭찬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은 “형제여” 이렇게 말함으로서 빌레몬을 복음의 귀한 동역자로 영접하였습니다. 20절에서도 “오 형제여”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에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도 보면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육신적으로 영적으로나 원로로서 얼마든지 빌레몬에게 지시하고 방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사무적으로 짤막한 메모를 써서 보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노예를 감옥에서 전도해서 키웠으니 잘 영접해 주시오” 이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로 영접하고 같은 위치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9절에 보면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10절에서도 “네게 간구하노라” 그렇게 말합니다. 13,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연로하고 감옥에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통보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의 본래 주인인 빌레몬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18절에 보면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에 바울이 빌레몬을 얼마나 깊이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집에서 동역자를 대할 때나 센타에서 목자들을 대할 때에 일방적으로 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전화할 때에 “용건만 간단히” 해서 오해를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일을 좋아하고 성격이 급한 편이라, 무슨 일이든지 빨리 빨리 일처리를 하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대화를 할 때도 핵심만 간단히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그것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목자생활을 하면 할수록 일이 먼저가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정에서도 동역자를 대할 때에 최대한 배려하고자 애고 쓰고 있습니다. ‘아내여’ ‘오 나의 사랑하는 아내여’ 이렇게 부를려고 애를 쓰는데 동역자가 별로 안 믿어줍니다. 제가 모든 복음의 동역자들을 귀히 여기고 사랑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19절에 보면 바울은 유머까지 써가며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21절에서도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이를 볼 때에 바울이 얼마나 가슴이 따스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초기의 바울은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거칠고 직선적이고 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39절에 보면 바울은 마가 문제로 바나바와 심한 말다툼을 하였습니다. 마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를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24절을 보십시오.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바울이 이제 마가를 깊이 영접하고 동역자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도 성장했겠지만 바울도 그 만큼 성숙해졌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목자생활을 통해서 더욱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볼 때에 우리도 다 소망이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변화는 근본적으로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5-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요, 자신이 십자가에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적인 자아가 온전히 없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상대방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귀하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 바울이 쓴 이 짤막한 편지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노예출신의 절도범 오네시모를 해산의 수고를 통해 영적인 아들이요, 심복으로 키워내는 바울의 목자심정을 배웠습니다. 빌레몬을 복음의 동역자로 삼고 존중하는 깊은 사랑과 겸손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도 이처럼 성숙한 내면을 허락해 주셔서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기는 하나님의 큰 일군으로 키워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