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2 강

                                       작은 자 하나라도

말씀: 마태복음 18:1-35

요절: 마태복음 18: 14 “이와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오늘 말씀의 화두는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위대한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위인전기를 읽고 장차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꿈을 꿉니다. 우리가 지난 주 <영화로 푸는 성경 이야기> 말씀 축제를 하였습니다. Dreamer, Radio Star, 두 작품 다 우승을 하고,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이야기였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위대한 자가 되고자 꿈꾸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시대에 위대한 인물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기대와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Who is the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예수님은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의 소원 자체를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제자들의 마음에 심겨진 위대한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잘못 되어 있음을 보시고 그것을 고쳐 주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제자들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이 말은 “자기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이미 따논 당상이고, 이제 천국에 들어가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절에서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예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그들이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인간적인 야망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져야지, 돌이키지 않으면 아예 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엄격히 따지고 보면 누가 감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죄로 말미암아서 지옥에 던져져야할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낮아져 오셨습니다. 우리 죄인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이제 얼마 후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도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천국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이것이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문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죄인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얼마나 값진 댓가를 지불하셨습니까?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자가 되는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가 되셨습니다. 낮은 자가 되셨고 천한 자가 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위에 뛰어 나신 분, Almighty God 이십니다. 그런데 섬기는 종이 되셨고, 만물의 찌끼같이 되셨습니다. Nothing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이 위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자꾸 높은 자가 되고자 하기보다 낮은 자가 되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서 문제많은 양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위대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주님은 어떤 사람을 위대하고 인정하십니까? 예수 이름으로 소자 한 사람을 돌아보고 품고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에서는 남이 못하는 큰 일을 하고, 대단한 재주를 발휘하고, 많은 부를 쌓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자들을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논리요, 힘의 논리입니다. 천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는 한사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 소자 하나를 영접하고 끝까지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다른 사람이 돌아보지 않는 작은 자들을 찾아 열심히 섬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장 무시당하는 갈릴리 사람과 30년 넘게 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 지방에 심방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에서 가장 무시당하고 손가락질당하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과 장시간동안 우물가 1:1을 하셨습니다. 그녀는 정말 상처많고 문제많은 양이었습니다. 말끝마다 톡톡 쏘고, 상대방 무시하고. 정말 밥맛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녀를 끝까지 참고 감당하셨습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스스로 마음문을 열고 자기 문제를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얼마나 부담스러운 양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그녀의 생명을 지켜 주시고 그녀가 새로운 삶을 살도록, 빛가운데 걸어가는 삶을 도와 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1,12)” 사람들은 다 돌로 쳐서 죽여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여자는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씩씩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도 한 인간이다. 이 여인도 변화되면 얼마든지 빛된 인생을 살 수 있다” 말씀하시고 그녀의 방패가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가 있다고 하면 예수님의 명예에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세리를 거두어 주시고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소자를 돌보신 사랑 때문에 세리마태가 성마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즘 매주 공부하고 있는 마태복음이 바로 그 세리였던 사람의 손에 의해서 쓰여졌습니다. 마태복음이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임마누엘, 팔복 말씀, 천국이야기 등등. 마태복음이 사 복음서중에서 가장 깁니다. 마태는 자신이 가장 흉악한 죄인이었기 때문에 쓸 이야기가 가장 많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잖습니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많이 헤매다 온 사람의 인생소감이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 첼린지 목자의 소감은 언제 들어도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은 각종 병든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 배 고픈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도 옆에 있는 십자가 강도를 양 삼으시고 그와 1:1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의 1:1. 말이 십자가상의 1:1이지, 물과 피를 다 토하고 죽어가는 판에 무슨 1:1할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 이미 지옥의 포구까지 다 들어간 한 영혼을 살려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순식간에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시는 등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요 사역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문제 많은 양들을 영접하시고 1:1로 그들의 내면을 치료하시는 사역이 예수님의 주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구체적으로 하신 일은 한 소자를 돌아보고 영접하고 그 영혼을 끝까지 돕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요즘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 곳곳에 소자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17:20), 작은 생선 두어마리(15:34), 부스러기의 은혜(15:27), 전부를 부풀게 한 작은 누룩(13:33). 오늘 말씀에도 보면 어린아이, 작은 자 중에 하나, 길 잃은 양 한 마리, 기도하는 두 세 사람. 주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소자 한 사람을 영접하고 품고 살려내는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소망 없다고 포기한 사람, 자기 자신도 스스로에게 소망 둘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인간, 그런 사람을 포기치 않고 끝까지 도와서 구원하는 곳.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위대한 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는 1:1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저는 한동안 1:1이 얼마나 소중한지 까먹고 있었습니다. 그냥 오랫동안 해 왔기 때문에, 우리 UBF 문화니까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우리도 보면 1:1이 너무나 상투적이 되었습니다. 습관적이 되었습니다. 누가 양과 1:1을 하고 있어도 그렇게 귀하게 보지를 않습니다. 그냥 하나보다. 양이 왔나보네.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그러나 1:1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명의 1:1 양을 얻는 것은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 신입생 양과 1:1을 하시는 분들은 정말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몇 년째 말 안 듣는 양과 1:1을 하고 계신 목자님들은 참으로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자기 돈을 들여가면서 양 밥 사 주고 같이 영화 보러 가주고 때마다 선물 해주고. 그들을 키워서 사람 되게 만들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시켜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도록까지 도와주는 1:1목자님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들입니다.

우리가 본래는 이런 1:1 목자가 되는 것을 참으로 존귀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도 양 한 명을 얻어서 1:1 해야겠다” 발이 부르트도록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심방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열정이 많이 식었습니다. 1:1 양이 없어도 별로 가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까? 다른 목자님이 옆에서 1:1을 하고 있어도 별로 격동을 받지 않습니다. 1:1양을 소개시켜준다고 해도 부담스러워하는 목자들이 늘어갑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일인데. 나도 과거에 1:1 목자님의 사랑과 헌신으로 살아났는데. 자꾸 목자들이 양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자로서 직무유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과 눈물을 잃어 버리면 우리 모임은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한 영혼을 살려내고자 하는 뜨거운 피와 불붙는 열정이 식어 버리면 그것은 목자로서 사망선고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선교지에서는 그 좁은 홈센타에서 이방 양 한 사람이라도 제자로 세우고자, 5년, 10년, 20년을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애쓰는 선교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을 친자식처럼 함께 데리고 살기도 하고, 도망가면 또 찾아가고 수양회 때마다 또 데려오고. 비싼 수양회비, 비행기 값까지 대줘 가면서 한 양이라도 초청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우리 가운데도 누가 보든 보지 않던,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눈물로 양들을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을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스탭 목자지만 천국에 가면 저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뼈 아프게 회개하고 1:1의 스피릿을 회복합시다. 지난 주에도 우리가 성경학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되긴 했지만 양들이 너무나 없었습니다. 지난 주 말씀축제 하면서 양을 한 명도 초청하지 못한 요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요회 목자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축제가 있는데도 기도모임 한번 안 나오고. 새벽기도 한 번 안 나오고. 말씀 축제가 있어도 와보지도 않고. 손님처럼 지내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번주 부터는 의대, 교대, 보건대, 과기원, 치전원등 캠퍼스별 겨자씨 말씀축제가 있습니다. 요즘 보면 이런 소그룹 개척팀들이 더 은혜가 있습니다. 아마도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심정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5절 말씀,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정말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영접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어린 양 한 사람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도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어린 양을 먹이라”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예수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어린양 한 사람을 도웁시다.

앤 설리반 여사는 어려서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정신질환까지 있어서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부모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육체와 영혼이 병든 장애아였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맹수와 같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나이 많은 자원봉사자가 그녀를 헌신적으로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의 투정을 다 받아주고 섬겨주고 사랑을 베풀어 주자 6개월 만에 앤의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나중에는 맹아학교에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여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한 소녀를 도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녀가 헬렌 켈러입니다. 앤 설리반 여사는 헬렌켈러를 찾아가서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1,2년이 아니고 무려 48년 동안 헬렌 켈러와 함께 먹고 함께 자며 그녀를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그 앤 설리반 여사의 섬김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헬렌 켈러박사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를 겪는 쓸모없는 소자 헬렌 켈러. 그러나 그 소자 한 사람을 앤 설리반 여사가 영접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1:1로 도왔을 때에 위대한 인물이 탄생했습니다. 사실은 헬렌켈러가 위대한 자가 아니라 헬렌켈러를 키운 앤 설리반 여사가 위대한 자입니다. 설리반도 자신을 도와준 이름없는 자원봉사자가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소자를 도운 것입니다. 우리도 양들을 돕되 몇 번 도와보고 포기하지 말고 적어도 10년은 내다보고 도와야 하겠습니다. 그 양이 만약에 우리의 친 자식이라면 포기하겠습니까? 10절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우리눈에는 아무리 부족해 보여도 하나님편에서는 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서 헬렌켈러와 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지 누가 압니까? Who knows? 더구나 각 사람에게는 전속 매니저 천사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보고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주에는 말씀축제가 있었는데 목자님이 나한테 전화도 안 해 주었어요” “우리 목자님은 저에게 통 관심이 없어요” 양의 천사가 하나님께 그렇게 보고하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작은 자라 하더라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문제가 많아 보여도 그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도웁시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있는 소자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역사를 이룹시다. 그런 사람이 정말 위대한 사람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볼까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믿고 작은 자들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무책임하게 이들을 돌보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방치해서 그들이 실족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직분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목자 선서할 때에 자랑스럽게 선서를 합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직분에는 또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 직분이 영광스러울수록 책임도 더 큽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가 만약에 범죄해서 어린양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영향력면에서 너무나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런 말이 있죠? “얘들 무서워서 뭘 함부로 못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때로 죄를 짓고 싶어도 양들에게 악영향을 끼칠까봐서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죄와 허물이 양들에게 누룩이 되지 않도록 철저히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 자에 대한 큰 자들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큰 자가 된다는 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바라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본을 잘 보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큰 자가 되고자 하기 보다 본을 보이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내 손과 발을 찍어 버리고, 두 눈을 뽑아 버릴 각오를 하고 죄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단은 목자들을 노리고 목자들을 실족시키서 양들을 넘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자는 작은 자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12-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천국에서 큰 자는 자꾸 문제를 일으키고 도망 다니는 양도 끝까지 찾는 자입니다. 사실 잃은 양을 한 마리를 찾아 다니느니 남아 있는 양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술적으로는 분명히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그렇게 희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천국에서 큰 자는 마지막까지 한 영혼을 포기치 않고 돕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목자인 증거가 무엇입니까? 뺀돌이 양 롯을 끝까지 포기치 않고 도왔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것만 싹 챙겨서 소돔고모라까지 도망간 얄미운 롯을 아브라함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돌라오멜 군대가 롯의 가족을 납치해 갔을 때는 단 까지 쫓아가서 전투를 해서 롯과 그 가족을 구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고모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시자 목숨을 걸고 중보기도를 감당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고 믿음의 거장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도 다가오는 여름수양회에 잃은 양 한 사람을 찾도록 찾아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여름 수양회가 65일 남았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여름수양회를 위한 새벽기도모임을 갖고자 합니다. 한 요회가 적어도 하루는 다 나와서 요회 합심기도를 합시다. 오늘 요회별로 소감발표를 하고 진지하게 기도모임을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름수양회에 어떤 양을 초청할까? 어떤 소자를 살릴 것인가? 찾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잃어 버린 양들이 돌아오고 한 영혼이라도 더 예수믿고 구원받는 역사를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는 그 한 양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흘려서 그 영혼을 구원하기 원하셨다면 우리도 그 양을 위해서 땀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정도는 흘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소자 한 사람을 감당한다고 해서 무조건 받아주고 감당해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여기서 ‘권고하라’는 것은 원문에 ‘드러내다’ ‘지적하다’ 그런 뜻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꾸짖어라” “책망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돕는데 있어서 사랑으로 영접하고 감당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죄문제가 발견되었을 때는 그냥 눈감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 중심을 바로잡도록 강하게 권고해야 합니다. 즉 죄를 책망하고 꾸짖어야 합니다.

어떤 목자는 양과의 관계성이 파괴될까 봐서 싫은 소리를 못합니다. 절대로 책망하거나 훈련을 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실 목자생활하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양들의 내면의 죄문제와 싸우는 것입니다. 저도 마음이 너무나 약해서 책망을 잘 못했습니다. 특히 이름이 바나바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인데 하는 이미지 때문에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로 이름이 바뀐 뒤부터는 제가 개혁자와 투사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연구해 보니까 영적이지 않는 사람은 막 머리털을 뽑아 버리고 가재도구를 집밖으로 던져 버리고 야단치고. 아주 철저했습니다. 저는 이 느헤미야라는 이름이 너무 좋습니다. 아 목자생활은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 죄와 철저히 싸우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든 양들을 키우든 야단치지 않고 오냐오냐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은 목자의 직무유기입니다. 그 사람이 심각한 죄문제가 있는데도 모른채 하는 것은 영적인 자살을 하도록 방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내면의 죄문제와 씨름해 줘야 합니다. 죄문제와 싸워 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죄와 싸우고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그 사람이 회개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용서해야 합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자입니다. 형제의 죄를 분명하게 도와서 회개하도록 할 때는 엄하게 해야 하지만 그가 일단 회개하고 나면 용서하고 받아 주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조원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이는 죽었다 깨나도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서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추한 죄인이요, 흉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결론적으로 천국에서 큰 자는 작은 자 한 사람을 영접하는 자입니다. 아무리 부족한자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그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 품고 섬기는 자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산술적으로 따지지 않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온갖 정성과 사랑을 쏟아 붓는 자입니다. 우리가 1:1을 소중히 여기고 한 영혼을 말씀으로 도와 살리는 목자의 심정을 회복할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