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마태복음 40강
예수님의 눈물어린 책망
말씀: 마태복음 23:1-39
요절: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세 천사들을 세상에 급파하셨습니다. 세상에 보내시면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한 가지씩 가지고 와 봐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첫 번째 천사는 금덩어리를 큰 자루에 담아가지고 왔더랍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세상에 가 보니까 사람들이 금을 가장 귀하게 여깁디다. 그래서 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도로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봐라, 천국의 도로는 보도블럭이 다 금이 아니냐” 그러더랍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 세상에서는 다이아몬드를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탁자 위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해변가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해변가가 온통 다이아몬드 천지인데 뭘 그런 것을 가져왔느냐” 그러시더랍니다. 마지막 3번째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는 조금만 병을 가져 왔습니다. “이게 뭐냐”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어 보시니까 천사가 대답하기를 “어머니의 눈물입니다” 그러더랍니다. “제가 가서 보니까 어떤 어머니가 못된 자식을 위해서 조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그 눈물이 너무나 귀하게 느껴져서 제가 그 어머니의 눈물을 병에 담아 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그 셋째 천사에게 상을 내리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귀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문제 많은 자식을 위해서 흘리는 그 어머니의 사랑의 눈물, 심정의 눈물이 가장 귀하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눈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멸망당할지도 모르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눈물어린 책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화 있을찐저” “화 있을찐저” ‘화 있을찐저’ 하시는 말씀이 7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시며 야단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얼른 보면 이 말씀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보훈에 보면 팔복 말씀이 나옵니다. “복 있을지어다” “복 있을지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은 복이 있다” “저런 사람은 복이 있다” 하시면서 8번이나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축복의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부담도 없고 은혜롭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처럼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하시는 책망의 소리, 쓴소리를 들으면 정말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축복의 말씀, 칭찬의 소리만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책망의 소리, 쓴소리도 잘 들으면 우리에게 보약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마음에 영접하여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깨울 수 있길 바랍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다같이 함께 읽어 볼까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입니까? 우리도 그런 점에서 이 시대에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쳐서 죽어가는 자들을 구원하는 성경선생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오히려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들은 천국에 디딤돌이 되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로, 말만 하고 본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3b절을 보면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율법으로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는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에 차는 경문을 넓게 하였습니다. 경문은 말씀을 쪽지에 써서 넣는 양피지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 경문을 왼쪽 팔 상단에 붙이기도 하고 이마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경문을 넓게 하여서 누구보다 말씀을 사랑한 척 경건한 척 했습니다. 옷 수술을 길게 늘어뜨려서 거룩한 척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랍비로, 아버지로, 지도자로 칭함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꼭 지도자의 자리에 앉는다고 다는 아닙니다. 삶에서 본을 보여야죠.
사무엘서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을 보십시오. 그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제사장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음으로 본을 보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조차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 아들들은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습니다. 자신은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며느리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빼앗기고 큰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온 나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3절에 보면 “장로들이여! 양 무리의 본이 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1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 요한복음 12:24절에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입으로 멋있는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손수 낮아지셔서 섬기는 자가 되셨습니다.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 주시며 섬김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끌어 안으시고 치료하시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한 알이 밀이 되어 이 땅에 떨어져 죽으셨기 때문에 본인도 부활하시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명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고 따르잖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실제 삶 가운데서 본을 보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는 외지 심방갔다 왔기 때문에 몸이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역자가 세한이 학원에 가서 학원비를 내고 아이를 태우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역자 말에 순종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세한이 친구가 같이 있어서 함께 차에 태우고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갑자기 먹은 음식을 다 토해 버린 것입니다. 와! 난리가 났습니다. 그 아이의 옷과 차가 완전히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씻겨주고 옷을 빨아주고 차안을 청소하면서 참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하루 종일 운전해서 몸이 너무나 피곤한데 이런 일을 만나니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냄새나고 지저분한 오물을 씻어주고 닦아 주시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아이의 토한 음식 좀 닦아주고 씻어 주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훨씬 더 추하고 더러운 우리의 죄를 다 뒤집어 쓰시고 십자가에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자 하실 때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이 사랑의 목자, 섬김의 목자지 정말 사랑의 목자요 섬김의 목자로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아이는 우리 CBF 예배에 나오는 우리교회 성도입니다. CBF이긴 하지만 우리교회 성도인데 담임목사가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데 속으로 짜증내고 있는 제가 심히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맨날 강단에 서서 말만 섬기는 종이 됩시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외치지 않고 본을 보일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그리고 교회에서 양무리들에게 좋은 본을 보임으로서 삶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가장 좋은 메시지는 입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삶에서 본을 보이는 살아 있는 메시지입니다.
둘째로, 이들의 문제는 물질에 대한 탐심으로 영적인 눈이 가리워진 것이었습니다. 다같이 16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화 있을찐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당시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성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킬 필요가 없지만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괜찮지만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백성들로부터 물질을 갈취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 더 크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 더 크냐?.” 당연히 성전이 더 중요하죠, 제단이 더 중요합니다. 성전이나 제단보다 더 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이 백성들에게 잘못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질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 쾌락을 더 좋아했습니다. 영적인 것 보다 물질적인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마력이 있습니다. 물질이 주는 혜택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질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합니다. 물질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의 삶을 멋있고 고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물질은 또 사람을 안일하게 하고, 교만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물질은 영적인 눈을 가리워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이 물질이 넘쳐나고 부족함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습니다. 또 물질은 사람을 타락하게 합니다. 돈 있는 곳에 항상 쾌락의 불나방들이 따라다닙니다. 우리는 돈이 가진 위험성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6: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5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고 했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탐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은 큰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찐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여”하시며 물질을 탐하는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1,12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물질을 탐하며 살아서는 안 되고 위엣 것, 영적인 것, 하나님의 것, 곧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초대교회 때는 교회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물질도 없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낮았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살아있었습니다. 기도가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소수였지만 로마를 복음화 시키고 세계를 복음을 정복하는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시대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멋있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많은 돈과 토지를 소유하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금은 보석으로 장식했건만 정작 그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높은 자리를 탐하였습니다. 그때에 그들은 영성을 잃어 버리고 부패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악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 교회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이 가장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은 높은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말씀의 열정으로부터 나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이처럼 많은 축복을 받은 것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국교회사를 읽어 보면 성도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모했든지 성경사경회를 하면 며칠씩 교회에서 먹고 자고하면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저 멀리 평양에서 성경사경회를 해도 목포, 해남, 무안등지에서 쌀을 짊어지고 가서 성경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한 성경을 자기 교회에 돌아와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제가 한번은 여수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을 갔었는데 가다보면 애양원 병원 옆에 옛날 신학교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 유물관이 가 보면 그때는 신학교 성적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과 과목이 거의 성경과목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쭉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교 커리큘럼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한국교회가 너무나 돈을 좋아합니다. 목회자들이 너무나 감투를 좋아합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습니다. 갈수록 정치적이 되고 물질적이 되어 갑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오늘 한국에 오신다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한국교회여! 축복을 받을지어다” 그러실까요? 아닐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한국교회여” “화있을찐저 한국교회 목회자들이여” 하시며 책망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북한에 핍박받는 지하교회 성도들을 축복하시지 한국교회를 칭찬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UBF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초창기에는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루도 빼먹지 않고 써서 먹고자 애를 썼습니다. 매주 소감을 썼습니다. 한 양을 돕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어떠합니까? 일용할 양식을 써 먹는 사람이 극히 적습니다. 인터넷을 켜서 한 3분 만에 눈으로 먹습니다. 그래도 그런 사람은 양호합니다. 우리 가운데 일용할 양식, 소감 노트검사 해 보면 기절 초풍할 사람 많을 것입니다. 그만큼 영성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 말씀을 향한 열정을 잃어 버렸습니다. 한 양을 향한 목자의 심정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 “화 있을찐저 UBF 목자들이여” “화 있을찐저 김 느헤미야 목자여”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책망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주에 중흥벧엘교회 목사님을 만나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이전에 우리 UBF 건물을 사서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분은 벧엘 교회에서 개척 나올 때에 거의 개척멤버가 없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가 100명에 육박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약 2시간동안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의 간증이 참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신학교 다니면서부터 곡성 남면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개척을 하였습니다. 교인들이 단 4명 모이는 작은 시골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곳에 집집마다 방문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침 놔주고 한약지어주고 학생들 공부가르쳐 주면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240가구가 있는 그 마을에 80퍼센트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또 그 곳에 가서 갈 곳 없는 사내아이 둘을 아들로 입양하였습니다. 손수 교회를 짓고 사택도 지었습니다. 전남과학대학교 학생들을 전도해서 그곳에 채플을 만들고, 복음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의 목회 철학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사는 날 동안 한 사람만 변화시켜도 목회 성공하는 것이다” 그렇게 순수하게 하니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보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중흥벧엘교회를 개척하고도 1년동안은 거의 사람들이 오지 않아서 배가 고팠지만 열심히 전도하면서 섬기니까 2년째 되면서 사람들이 몰려 오는데 이제는 예배가 100명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도 2명을 파송하고 올해도 티벳에 한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교회에 들어가 보니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표어를 붙여놓고 UBF정신을 계승하고자 투쟁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형님, 제가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고 배우겠습니다” “야! 요즘도 이런 목회자가 있었구나” 너무 감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한 영혼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 말씀 사랑, 한 영혼 사랑의 본래 정신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화가 있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시대에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 눈이 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눈을 밝힐 수 있길 기도합니다. 소자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눈에 불을 켤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번 수양회에 말씀을 맡으신 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먼저 한 말씀을 깊이 영접하므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도록 기도합시다. 아직 수양회가 11일 남았습니다. 남은동안 간절히 기도함으로 한 영혼을 찾고 찾아서 영적으로 눈먼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길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거짓과 위선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다같이 25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겉모양은 열심히 닦고 꾸미고 깨끗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온갖 탐욕과 방탕과 시기와 미움과 음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그들의 모습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우리도 겉모양만 보면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예쁘게 화장하고 다니기 때문에 신사, 숙녀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가히 요지경입니다. 이 시간 주님은 저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모든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도다.” “소경된 자들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우리가 겉만 씻지 말고 우리 내면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힘써 씻어야 하겠습니다.
3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원색적이고, 무시무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미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책망입니다. 다같이 37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어 보시겠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저는 시골에서 가끔 개들이 병아리를 공격할 때에 암탉이 병아리들을 가슴에 품고 벼슬을 세우며 개와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암탉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우는지 아무리 사나운 개라도 당해 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심정으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이쁜 자식 매 하나 더 때린다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더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사단의 밥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지옥의 자식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무섭게 책망도 하시고 쓴 소리도 하십니다.
사람을 도와보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칭찬해 주고 좋게 좋게 사랑해주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죄 문제를 지적하고, 책망하고, 훈련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잘못 했다가는 관계성이 파괴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 사람의 영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냥 모른체 하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무섭게 책망해서라도 그 삐뚤어진 마음을 책망할 것입니다. 그래야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최순종아 최순종아! 정신차려라, 정신차려라” 저희들이 이 주님의 음성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38절에 보면 회개치 않는 자는 그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회개치 않으면 무서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정말 사모하고 마음으로 들어야 할 소리는 축복의 소리, 칭찬의 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책망의 소리, 경고의 소리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정말 수준 높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항상 어린아이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주님의 책망의 음성, 쓴소리를 마음으로 영접하고 가슴에 새겨서 마지막 날 주님께 칭찬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