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3 강

                                                                         굳게 잡으라

말씀: 요한계시록 2:12-29

요절: 요한계시록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오늘 말씀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두 교회는 모두 훌륭한 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교회에는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의 핵심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성경의 교훈, 성경의 가르침을 놓아 버린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러자 세상의 물질주의와 쾌락주의의 누룩이 침투해서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핵심진리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굳게 잡으라! 우리가 무엇을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 성경의 교훈,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는 다른 교훈을 따르다가 이상한 쪽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다가 죄에 빠지고 시험에 들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교회를 향해서 엄중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가운데 너희를 던지리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붙잡으라” 우리도 이 시간 내가 붙들고 있는 교훈이 무엇인가?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첫째로, 버가모 교회를 살펴 봅시다. 버가모 지역은 어떤 곳입니까? 13절에 보면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버가모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는데 이 제우스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에 들 정도로 웅장했습니다. 또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 개나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여러 도시들 중에 상업적으로 가장 번창한 도시가 에베소였다면, 행정중심지는 버가모였습니다. 에베소가 오늘날 미국의 뉴욕과 같다면 버가모는 워싱턴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또 버가모에는 큰 의학 도서관이 있었는데 책이 20만권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뱀 모양을 한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신을 섬겼는데, 그 신을 치료의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이처럼 버가모는 황제 숭배 사상과 우상의 세력이 강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곳을 사단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키고 있는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안디바.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지도자였는데 황제숭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풀무에 갇혀 불에 타 순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훌륭합니까? 사탄의 권좌가 있는 우상천지 도시에서 믿음의 중심을 굳게 지키다가 안디바는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시대에 믿음의 지조를 지키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나 최권능 목사님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버가모 교회는 훌륭한 교회입니다.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이니 얼마나 훌륭합니까? 더 놀라운 것은 안디바가 순교를 당했는데도 버가모 교회 성도들이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믿음의 약한 사람 같으면 흔들리기 쉽죠? 하나님께서는 왜 충성스럽게 믿음으로 사는데 그 사람의 목숨을 지켜주시지 않고 순교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불신과 회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도 잡혀서 순교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배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의 위험가운데서도 믿음의 중심을 지킨 훌륭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절을 보십시오. 버가모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입니까? 14,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버가모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 뭐죠? 민수기 22-25장에 보면 발람선지자가 모압왕 발락에게 뇌물을 받고 이스라엘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서 갑니다. 또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형제들을 유혹하여 음행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발람 때문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의 음란한 잔치에 참여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24000명이 죽습니다. 발람의 교훈은 순진한 신자들을 유혹해서 우상도 섬기고, 적당히 쾌락도 즐기도록 조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발람의 교훈을 따르도록 조장하는 사람들이 버가모교회에 있었습니다. 바로 니골라당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정체가 무엇인지 학자들도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합리화시키는 교훈을 퍼뜨린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으니 이제 적당히 죄도 즐기고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다는 주의입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했죠. 이 니골라당이 바로 그런 악한 동무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부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않습니다. 세상 쾌락과 물질의 유혹이 다가오면 이것과 싸우질 않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합리화 하며 잔재미를 즐기다가 죄에 넘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걸림돌입니다. 사단은 정면으로 도전했다가는 우리가 더 강하게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방법을 잘 쓰지 않습니다. 대신에 얼른 눈에 띄지 않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에 가는 길에 걸림돌을 만들어 놓고 살짝 지푸라기로 덮어 놓습니다. 이때 깨어있지 못하면 걸려 넘어집니다.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강대국과의 전쟁에서는 두 눈을 부릅 뜨고 믿음으로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모압 처녀들이 파놓은 음행의 덫에 빠져서 큰 낭패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 두 사람도 아니고 무려 25000명이나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를 보면 수많은 청년들이 그 쾌락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도 보십시오. 수많은 전쟁에서는 다윗이 패배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깨어 기도하였고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쾌락의 유혹 앞에 넘어져서 너무나 뼈아픈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판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그런데 뭐” “딱 한번 만이야”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오늘날은 성공 제일주의가 판을 칩니다. 방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사고방식이 무서운 덫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한가? 그것은 보지 않습니다.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발람의 교훈이요, 니골라당의 교훈입니다. 주님은 지금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책망의 음성을 발하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신자들을 대상으로 책망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신자들이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속적인 문화를 그대로 따라갈 때에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버가모 교회가 아무리 훌륭한 교회이고, 안디바같이 충성스러운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일지라도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성도들이 신앙의 순결성을 잃어 버리고 물질과 쾌락의 우상에게 타협하게 되면 반드시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주님께서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으로 당장에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에도 보면 발람이 물질의 유혹에 넘어가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갈 때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서 그 길을 막았습니다. 비느하스가 칼을 들고 막사에 들어가서 음행하고 있는 남녀의 배를 찔러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의 칼을 맞기 전에 빨리 정신차려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 들을 귀가 있는 자,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새겨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질과 쾌락의 우상문화가 넘실거리는 패역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죄의 함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에게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회자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런 물질주의, 쾌락주의의 죄악된 문화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5:8,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우리가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려야 하겠습니다. 발람의 교훈에 솔깃할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려야 하겠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를 것이 아니라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좀 힘들고 어려워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그에게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고 이기는 자가 될 때에 주님께서는 크신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감추었던 만나와 흰돌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감추었던 만나’는 ‘천국의 잔치’를 의미합니다. ‘흰 돌’은 ‘승리자에게 주는 상패’를 가리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징표가 바로 흰 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잠시의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게 되면 장차 주님 오실 때에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의 칼에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고 참고 이기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좀 죄를 즐기다가 장차 천국의 문턱에서 탈락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좀 힘들고 고생할지라도 믿음으로 살아서 장차 천국에서 생명의 잔치에 참예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꼭 하나님 나라에 가서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가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 날에 육신의 소욕에 타협하며 적당히 사는 사람들 보십시오. 재미있고 좋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영이 죽습니다. 그 영혼이 죄로 더럽혀지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기쁨을 잃어 버립니다. 그 마음에 진정한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 영혼이 생명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스피릿이 충만하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로마서 2:7-9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그랬습니다.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얼른 들으면 꿀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달콤합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쑥같이 씁니다.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롭습니다(잠5:4). 그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분명히 입에서 들어갈 때는 꿀이었는데 일단 배 속에 들어가게 되면 두 날 가진 칼이 되어서 그 심령을 난도질해 버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교훈은 어떻습니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교훈은 부담스럽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해서 그 교훈을 따르게 되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내 몸에 양약이 되어 내 골수를 윤택하게 한다고 했습니다(잠3:8). 17절에 보면 장차 천국의 명부에 이름이 기록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나라, 천국의 명부에 이름이 등재되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것도 이왕 이름이 기록될려면 앞에 크게 기록되는 것이 좋죠. 금상, 대상, 최우수상 얼마나 좋습니까? 장려상, 참가상보다 좋잖아요. 우리가 이 땅에서 세속적인 가치관과 싸우느라고 좀 고생할지라도 죽도록 충성해서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큰 축복의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둘째로,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개척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의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아주 열정적으로 전도해서 온 가족이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루디아의 영향으로 두아디라 교회가 개척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장점이 무엇입니까? 19절에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초창기 두아디라 교회는 그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돋보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아디라 교회에도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인지 20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것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두아디라 교회는 루디아의 영향으로 대대로 자매님의 파워가 컸던 것 같습니다. 특히 두아디라 지방이 섬유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옷감장사들이 많았고 여성들 중에 재력가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루디아도 자주장사, 옷감장사였잖습니까? 그런데 루디아처럼 복음적이면서도 파워풀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자는 아주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는데 양들을 이상한 쪽으로 이끄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가리켜서 자칭 선지자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위협하고 유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왠지 그 사람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처럼 신령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왠지 그 사람에게 가면 내 문제를 속 시원히 해결해 줄 것 같고, 모든 고민에 대해서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 줄 것 같습니다. 또 당사자는 은근히 그런 것을 즐깁니다. 그래서 옷도 하얀색에 신령한 옷을 입고, 표정도 신령하게 하고, 말도 신령하게 하고자 애를 씁니다. “남쪽으로 가서 땅을 사” “애들은 북쪽으로 보내” 그러다 보면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목자 말은 안 들으면서 그런 사람의 말은 기가 막히게 잘 듣습니다. 점점 그 사람이 신령하고 신통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중에는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말씀에로 인도해야 하는데, 자기 말만 듣도록, 자신의 똘만이로,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일단 그 사람의 제자가 되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성경도 잘 보지 않습니다. 말씀 붙들고 영적인 투쟁하는 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섭게 봅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 사람만 찾아가서 기도부탁하고 그가 시키는대로 합니다. 이게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마약과 같아서 자꾸 그런 사람만 찾아다니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이 한 명 교회에 떳다 하면 그 교회는 완전히 쑥대밭이 됩니다. 더 이상 말씀공부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메시지도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문제만 생겼다 하면 그 여선지, 교주를 찾아갑니다. 성경말씀보다 그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사람들이 자꾸 자기에게로 몰려 오니가 당사자는 교만해집니다. 은밀히 돈을 밝힙니다. 순진한 성도들을 유혹해서 음행의 죄까지 짓습니다. 이런 일들이 두아디라 교회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가증스런 사단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얼마나 화가 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우고 순진한 성도들 죄에 빠뜨리니 이것은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이 여자를 가리켜서 이세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칭호입니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아내로서 온 나라를 바알 우상천지로 만들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다 몰아내고 거짓된 바알 선지자들을 집중 육성하였습니다. 선량한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고,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그를 돌로 쳐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엘리야 선지자까지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갈멜산의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기는 커녕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죽는 순간에도 거울 보고 화장을 하며 형제들을 유혹하고자 했던 아주 사악한 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녀를 저주하셨던지 건물 위에서 땅으로 던져져서 온 몸이 터져서 죽었습니다. 개들이 그 피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자칭 여선지를 이세벨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왜 이런 여자에게 넘어갔을까요? 24절에 보면 “사탄의 깊은 것” 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이 여자가 뭔가 깊고 심오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고 하니까 거기에 조금씩 조금씩 솔깃하다가 완전히 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잖습니까? 어디가면 깊고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순진한 성도들을 유혹하는 거짓선지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 쫓아다니다가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로 어떤 사람이 거기 넘어갑니까? 평소에 영적인 투쟁을 안 하고 뭔가 심령이 답답한 사람, 복음신앙의 뿌리가 약한 사람, 회개하는 생활을 잘 안 해서 심령이 막히고 기쁨이 없는 사람, 사명이 부담스럽고 교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 주로 이런 사람들이 이세벨의 교훈에 넘어갑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랬잖습니까? 하와가 아담과 1:1성경공부를 열심히 잘 하고 소감을 꼬박꼬박 쓰고 새벽기도와 일용할 양식도 잘하고 사명을 열심히 감당했을 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1:1도 빼먹고 “여보 이번 주는 1:1 쉽시다, 이번 주는 영화나 보러 가게. 해운대가 좋대. 우리 예배 빠지고 전어축제나 갈까” 이렇게 하면서 점점 말씀을 멀리 하니까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하와! 이리 와 봐. 내가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 줄게.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는 비결이 있어. 말씀공부 안 해도, 말씀에 순종 안 해도, 힘들게 영적인 투쟁을 안 해도 단번에 대박이 터지는 비결이 있어” 이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심을 믿는다.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투쟁을 게을리하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불만이 쌓이니까 사단의 유혹에 솔깃했다가 결국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사단의 유혹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20절에서도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가 이세벨을 용납하는 것이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이세벨의 교훈을 처음부터 단호하게 잘라 버려야 하는데 어영부영 용납하기 시작하니까 나중에는 그 올무에 걸려들어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여러 번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탐심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주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심각한 질병에 걸리게 하거나 큰 환난에 처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회개치 않는 자들은 가정에 화가 임하여 자녀들이 죽임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각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한번에 심판하시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사건을 통해서 경고를 주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때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심령이 완악하여서 회개치 않는 자들은 빛난 주석같은 발로 질그릇을 깨뜨리듯이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리고 숨은 죄를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힘써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다같이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가 받은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복음의 진리. 이 진리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확실한 진리, 참된 진리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장 좋은 것을 이미 받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감사하게 여기고 주님오실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나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이요, 영생의 복음인데 뭐가 부족해서 한 눈 팝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풍족한 에덴동산을 주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헛생각합니까? 약속의 말씀만 굳게 붙들었으면 영원히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지 않으니까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 없는 축복, 고난과 헌신이 없는 영광. 이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또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이렇게 썼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바울은 자신이 정말 능력있고 살아있게 하는 교훈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교훈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다른 성도들도 그 진리를 붙들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삼층천에 올라가는 신비로운 체험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를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바울은 입만 열었다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그것을 목 놓아 외쳤습니다. 예수님도 마지막까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요,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광.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요, 우리가 목숨 걸고 붙들어야 할 참된 진리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자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새벽 별’은 ‘메시야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좀 고생하고 땀 흘리며 수고할지라도 복음진리를 수호하고 굳게 붙들 때에 장차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는 축복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가 범했던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발람의 교훈, 니골라당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 이런 것들은 당장은 입에 단 사탕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성경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가 최상입니다. 우리가 헛된 세상의 교훈, 사단의 교훈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교훈, 십자가의 진리를 굳게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서 참된 영광과 영원한 승리가운데 들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