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말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곽아브라함)
말씀/ 로마서 1:8-17
요절/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 님 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올해 우리모임의 큰 방향 가운데 하나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캠퍼스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첫째 사명으로 감당해 왔습니다. 지난해에도 변함없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왜 다시 복음에 대한 말씀이 필요합니까? 요즘 우리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비해 열매가 적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힘든 때에 무엇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복음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선 로마 선교를 꿈꾸는 바울에게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분명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선교를 어떤 방법론이 아니라 오직 복음의 능력을 믿고 나가고자 합니다. 이 시간 2010년을 시작하면서 승리하는 한해를 살고자 소망하는 우리 목자님들에게 이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서신의 첫 머리에 가장 먼저 로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사도들에 의해 정식으로 개척되지 않아 부족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더구나 쾌락과 헬라 철학이 판치고 황제가 신처럼 여겨지는 로마에서 믿음으로 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 소문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로마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너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쉬지 않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로마 성도들은 그가 직접 개척한 양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마음에 품고 위해 중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내 양, 네 양 따지는 이기적이고 속 좁은 목자가 아니라 모든 양들을 주님의 양으로 영접한 성숙한 목자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로마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로마로 나아가 그들을 돕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출세나 돈벌이 등 인간적인 동기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열망하는 첫째 이유는 사랑스런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고자 함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여기서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5절에서 바울이 복음전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을 볼 때, 신령한 은사는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니라 복음 사역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로마 성도들도 복음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사도들을 통해 정식으로 들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은사로 그들의 믿음이 견고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를 통해 바울이 얻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피차 믿음의 안위함을 얻으려 합니다. 로마 성도들은 대 사도를 통해 복음을 듣고 믿음이 견고해져 위로를 받고, 사도 바울도 이런 로마 성도들을 보면서 믿음의 위로를 얻고자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대 사도이기 때문에 믿음의 위로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게 양들의 믿음을 통해서도 위로를 받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피차 주고받는 믿음의 위로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또한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성도 더욱 깊어집니다.
결국 지금까지 내용을 보면 바울이 그토록 로마에 가고자 하는 근본 동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로마 성도들을 견고케 하고, 피차 믿음의 위로를 얻고자 함입니다. 또한 13절을 보면,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함 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로마에 그토록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Motive, 즉 내적 동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빚진 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에게 무슨 빚을 졌습니까? 사실 바울은 이들에게 물질적인 빚을 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진 빚은 복음의 빚입니다. 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채무관계입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구원하시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명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의 빚을 지게 된 것입니다. 빚을 진 것은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빚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복음의 빚은 다릅니다. 복음의 빚은 거룩한 빚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빚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의무감으로 나타납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고전9:16). 빚진 자의 심정은 바울로 하여금 절대적이고 충성스런 복음의 일꾼이 되게 했습니다. 겸손한 일꾼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복음의 빚을 어찌하든지 갚고자 하는 동기 때문에 로마에 그토록 가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도 동일하게 구원하시고 캠퍼스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과거 우리각자를 보면 정욕과 미움과 실패의식과 운명주의 등 어두움의 세력에 살다가 그대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주님은 일방적으로 구원하여 주시고 빛 가운데서 새 인생을 살게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감사하여 이 빚을 갚아가는 캠퍼스 목자로서 복음역사와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전공하나 감당하기도 버거운데 아픈 몸을 이끌고 소감, 양 심방, 1;1, 파트메세지 등을 감당하며 충성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가장 젊을 때에 청춘을 불태워서 주님께 헌신해야 한다며 결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학사님, 사모님들은 늘어만 가는 흰머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머리 무리 속에서 이렇게 주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음에 오직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지요!
그런데 이런 마음이 항상 매번 똑같지는 않지요! 어쩔 때엔 손해 심정, 사람들에게 섭섭하고 미운 심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양들과 복음역사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린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고 오직 내가 마땅히 할일이라는 빚 진자의 심정을 회복해야합니다. 하루 24시간 우리는 이 빚진 자의 심정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바울처럼 변함없이 주님역사를 지속적으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빚진 자의 심정이 있어서 로마에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에 대한 바울의 믿음이 어떠합니까?
16절을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바울은 먼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실 복음은 당시엔 별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헬라인들은 복음을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보다 한참 수준이 떨어져 후진국 사람들이나 믿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 성도들 가운데는 복음을 믿으면서도 당당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며 숨어서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복음에 대한 identity가 부족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엄두는 아예 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복음은 가장 큰 자랑거리요, 자긍심입니다. 사실 그가 가고자 하는 로마는 자랑할 것이 많은 곳입니다. 세계적인 군사력, 경제력, 철학, 화려한 문명 등 로마 전체는 마치 보석과 같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중심지 뉴욕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로마의 화려한 위세 앞에 바울은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위풍당당했습니다. 복음에 대한 자부심만으로 충만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들이 복음과는 족히 비교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직 복음만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원의 다양성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본주의와 상대주의를 심습니다. 절대성을 강조하는 복음을 무시하거나 배척합니다. 또 요즘에 그럴싸하게 자칭 구원자라 하는 이단 무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복음을 비웃습니다. 점점 더 심각해져 갑니다. 특히 우리가 복음역사를 잘 섬기다가도 눈에 보이는 치유나 뚜렷한 열매가 없을 때 회의가 들기 쉽습니다. 플러스알파를 찾고 싶습니다. 이러한 것에 기웃거리다가 완전히 복음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오직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우리 주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복음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은 말씀하십니다.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죄인들을 붙들고 있는 죄의 권세, 사망의 권세, 사단의 권세가 너무나 강하고 지독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능력으로도 이 세력들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전능자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수 있는 초자연적인 구원의 능력, 그 자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강력한 복음만이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를 다 깨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의 산체험입니다. 그는 과거 스스로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할 정도로 교만하던 자였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핍박자요 악독한 자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일방적인 복음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꼬꾸라졌습니다.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하고 변화될 수 없을 것 같던 그가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고 대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180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나아가 죽음을 무릅쓴 세 차례에 걸친 선교 여행을 통해서 강력한 복음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경험 하였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점치던 박수, 무당까지도 뒤집어지고 구원받는 역사가 놀랍게 일어났습니다. 이를 통해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만이 모든 죄인들을 구원 할 수 있음을 이론이 아닌, 몸으로 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순교자 캐시버넬 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1999년 4월20일 미국 콜로라도 리틀톤에서 히틀러를 신봉하던 두 학생이 총기를 난사함으로 13명의 학생과 교사가 사망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범인들은 학생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총구를 들이대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Do you believe in God ?". "너는 하나님을 믿느냐?“ 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심지어 교회를 다니는 학생들조차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17세 소녀 캐시버넬 이라는 학생에게 총을 들이대며 범인들은 똑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소녀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Yes I believe in God".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그러니까 너희들도 역시 하나님의 길을 따라야 해! ”. 그러자 범인들은 분노에 떨면서 “그럼 너는 네가 믿는 하나님 곁으로 가라! ” 며 방아쇠를 당겨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순교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학교 내에선 자신들의 비겁한 모습을 회개하며, 큰 신앙 각성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죽어있던 미국의 젊은이들에게서 "Yes, I believe in God" 라고 쓰인 캐시버넬 T 셔츠를 입고서 전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워싱턴 D.C 에선 40만의 기독학생들이 모여서 금식하고 기도하게 되었으며, 어른들 사이에서도 큰 회개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미국의 한 신문은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캐시가 미국교회에 불을 질렀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 하고 물음표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이일이 일어나기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소녀는 두 범인들처럼 암흑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으로 소녀는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문제아의 길에서 빠져 나와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를 두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렇게 고백 하였습니다 . 나의 딸은 순간적으로 "Yes" 가 튀어 나온 것이 아닙니다. 2년 전 복음을 영접한 후에도 날마다 “하나님을 믿는가?” “Yes" 하며 자신에게 묻고 또 매번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하곤 하였습니다. 이것이 내 딸이 그 순간 "Yes"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소녀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만이 그녀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능력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 난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 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죄인들은 원래 죄로 인해 의롭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깨어 졌습니다. 그래서 죄인 된 인간들은 어떠한 노력이나 율법으로도 의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그 길을 여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2)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모든 죄를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을 여셨습니다. 이 화목제물 되신 독생자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믿음의 의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놀라운 능력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믿기만 하면 임하는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구원입니다.
이 복음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오직 믿기만 하면 우리자신, 가정, 직장,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특히 우리 모임은 과거를 돌아 볼 때 정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의 원조로 먹고 살던 그 가난하고 키 작은 한국 선교사들이 미국이나 독일 등 선진국 양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엇이 아쉬워 후진국 선교사의 말을 들었겠습니까?. 오직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음의 능력이 과연 오늘날에도 동일하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나 과거 우리모임을 통해 나타난 복음의 능력이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합니까? 오늘 우리 시대는 참 힘든 시대라고들 합니다. 향락적이고 이기적이며 감각적인 가치관이 팽배한 우리 대학생들을 보면 복음역사가 어렵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통 영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있어도 얼마 버티지 못하는 양들과 만사가 취업에만 고정되어있는 캠퍼스 분위기를 보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힘든 상황을 극복해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답은 확실합니다. 오직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복음에 대한 100프로 확신과 절대성을 가지고 복음의 능력을 덧입는 것입니다. 힘든 환경과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실력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가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내가 지금 이 복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믿음이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변함없이 꾸준하게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덧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어떤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과 조건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연약하고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지만 도전하고 또 도전하는 7전8기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잠시 실패하는 것도 결코 서럽지 않습니다. 끝내는 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우리가 꼭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를 믿어야 합니다. 다같이 16,17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덧입으시다.
이 시간 제 인생을 돌아볼 때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변화된 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3남2녀의 막내로 저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인지 학교 다닐 때에 항상 인성검사를 하면 공무원이 제 성격에 딱 이라고 답이 나오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저의 꿈은 먹고 살만큼 월급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민폐 끼치지 않으며, 나만 행복할 수 있는 소박한 가정을 이루어 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죽어서는, 2세가 제사라도 잘 지내줬으면 하는 것이 전부였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저는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완전히 딴판입니다. 내성적이던 자가 언제 어디서든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담대한 성격이 되었습니다. 소심하던 자가 홍콩에 갔다가, 우간다에 갔다가 ,독일에 갔다가, 나중엔 미국, 북한을 품은 세계적 가치관을 가진 적극적인 성격이 되었습니다. 나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자가 타인을 돌아볼 줄 알며, 양들을 위해선 손해도 보고 울 줄도 아는 목자인생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장차 죽어도 다시 살게 될 하나님나라 소망으로 인해 2세에게 바라는 제사걱정은 이제 안 해도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내게 임한 복음,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 찬송합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을 볼 때 아직 제가 복음,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변화 받을 요소가 몇 가지 있음을 고백합니다. 첫째는 저의 못된 성질, 다시 말하면 꼬라지입니다. 예전에 비해선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순간 성질이 나면 집에서 동역자에게 온갖 인상을 쓰거나, 수술실에선 기구를 던지려고도 합니다. 그러면 저도 순간 힘들어집니다. 두 번째는 영적인 안일입니다. 언제부턴가 오늘 안 되면 내일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새벽기도도, 전도도 내일부터 하지! 생각했습니다. 2년 전에는 3년 안에 병원 전직원복음화를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년, 내년에 하다가 어느덧 3년째가 되었습니다. 후회가 됩니다. 병원장 5년을 하니 어느덧 지역에서 유지가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그것도 국회의원, 시장, 시의원, 경찰서장, 보건소장, 검사 등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과 식사를 자주하게 되었습니다. 적당한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해야지 했다가 다음으로 미루길 잘했습니다. 이것도 후회가 됩니다. 송 인화 형제와 1:1 하고 있지만 캠퍼스목자로서 결단하도록 말해야지! 하다가 어느덧 2년이 지났습니다. 반성합니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올해는 의대 제자양성을 꼭 해야지 하고 굳게 다짐합니다. 그러다 한달이가고 두 달이 가면, 내년부터 새시로 하지! 하고 타협합니다. 벌써 몇 년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정말 후회가 되고 회개합니다. 늘 바쁘다는 구실로 합리화하고 이런 영적인 안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치료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자족하였습니다. 복음은 현재 당장 이루어질 하나님의 능력이 되거늘, 저는 이 복음의 능력을 현장 속에서 깊이 신뢰하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 하나에 열정과 충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헌신의 스피릿이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목숨을 걸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를 본문 말씀 앞에서 온전히 회개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덧입고자 합니다. 매일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의 권세와 말씀의 능력을 덧입길 원합니다. 이를 통해 올 한해는 복음의 능력으로 캠퍼스 한명의 제자양성을 하고 싶습니다. 병원선교에서도 뚜렷한 신우회성장의 열매를 맺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요회동역에서 성령의 그릇을 잘 이루고 싶습니다. 새벽기도를 꾸준히 감당하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을 오직 복음의 능력을 덧입어 오늘일은 오늘 끝을 봐야지! 하는 각오로 도전코자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주님! 저의 이 소원을 받으시고 도와주소서! 할렐루야! 아멘
결론적으로 복음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합니다. 여전히 복음은 어떠한 죄인일지라도 믿기만 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수많은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이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는 직장 동료들, 점점 힘없이 늙어만 가시는 부모님, 정욕을 따라 모텔을 부끄럼 없이 드나드는 친구들, 입학부터 취업을 걱정해야 하는 신입생들, 졸업을 해도 백수로 전전하는 선배들, 등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고만 있을 것 입니까?. 이들도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죄에서 구원 받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이 임하면 어떠한 사람도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핸드폰 얘기를 잠깐 해 보겠습니다. 요즘 보면 하루가 다르게 세련된 디자인과 첨단 기능으로 무장한 핸드폰이 나옵니다. 그런데 핸드폰에는 핵심부품이 있는데, 그것은 신호 분할장치로 불리는 CDMA입니다. 미국 퀄컴사가 거의 독점하고 있다는 이 부품이 없으면 아무리 기능이 뛰어나고 디자인이 좋아도 핸드폰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다른 많은 것을 갖추었다 할지라도 가장 핵심인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CDMA없는 핸드폰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는 2010년을 시작하면서 무관심, 무가치, 무정한 이 시대 와 힘든 양들을 걱정하며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의 능력을 믿고 다시 힘차게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각 개인과 가정과 직장의 문제를 극복하고 캠퍼스 개척 역사에도 도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복음의 능력이 반드시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이기게 하고 2010년 광주 캠퍼스 곳곳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나타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못 말리는” 짱구가 아닌 목자 생활을 하는 한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