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7

                                                                 첫째가 되고자 하면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이 적당하게 인생을 살지 않고 위대한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자가 정말 위대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예수님은 참으로 위대한 자는 누구인가? 말씀해 주십니다. 이전에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2등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다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순위를 매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다 위대하게 창조하셨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키우기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위대성을 배우기 원합니다.

 

31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얼마 후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됩니다. 또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활하시게 됩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예수님 마음은 비장하고 착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예수님 말씀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설마 예수님이 정말 죽으실까? 그런 생각만하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이 뭔가 심각한 토론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토론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길에서 누가 크냐?”하며 쟁론을 했습니다. “누가 크냐?” “Who is the greatest?”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분명히 왕의 자리에 앉으실 터인데, 누가 예수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이 문제를 가지고 격론을 벌인 것입니다. 이를 아신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너무나 세상적이고 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기보다 누가 큰가? 조근 조근 말씀해 주셨습니다. 3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첫째로, 예수님은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가장 위대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뭇 사람의 머리가 되고, 뭇 사람을 지배하는 자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적인 배경도 좋아야 하고, 말을 잘해야 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에는 쇼맨쉽에, 비주얼도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 보니까 그런 요소들이 당락을 좌우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자, 뭇 사람보다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밑거름이 되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아픔이 무엇인지 자세히 살피며 말없이 도와주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를 좋아하고 거기서 보람을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적극적으로 칭찬해 줍니다. 이런 사람은 은밀하게 남을 도와주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다 보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들어 쓰시고,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하십니다. 이번에 우리나라 축가 국가대표 선수들 중에 몇 사람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세계 유명구단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있기까지 숨은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시절에 그들의 등록금을 대신 내주고, 무명 시절에 소망가운데 키워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정말 위대한 분들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닮고자 애를 씁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뭇 사람의 끝이 되셨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큰 자요, 가장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자로 오셨습니다. 가장 가난하게 되셨고, 가장 천한 사람들,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가장 능력 많으신 분이 가장 연약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썩는 밀이 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뭇 사람을 구원하고 수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위대성은 바로 이 섬김과 희생에 있습니다. 제자들이 정말 위대한 자가 되기 원한다면 이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배워야만 했습니다.

 

며칠 전이 6.25전쟁 68주년이었습니다. 이때를 즈음해서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 벌리 스미스(Burley Smith, 89)씨가 있습니다. 19501223일 흥남 철수작전 때 피난민을 태우고 거제도로 인도한 빅토리아호 항해사 중에 한 명입니다. 당시 중공군에 밀려 철수 할 때 빅토리아호의 항해사들은 25만 톤의 무기를 버리고 몰려드는 피난민 14000명을 실었습니다. 그 배는 기뢰로 가득한 죽음의 바다를 건너 사흘 만에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사흘 동안에 배 안에서 다섯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들을 김치1, 2, 3, 4, 5호라고 부릅니다. 이번에 벌리 스미스씨가 한국에 왔을 때 김치1호 손양영(68)씨와 김치5호 이경필 씨가 찾아와서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벌리 스미스씨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먹을 것도 없이 화물칸에 빼곡하게 웅크려 체온을 나누던 피난민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이 운전하는 배가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자유의 땅에 도착할 것이라는 믿음과 용기를 가졌습니다. 그들이 바로 흥남철수작전의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항해사 벌리 스미스씨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비롯해서 당시 항해사들이 14000명의 생명을 구해 냈습니다. 그 피난민 중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타고 있었습니다. 남산 UBF의 책임목자이셨던 이다니엘 목자님도 가족과 함께 그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14000명의 후손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건설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이름없는 항해사들의 헌신이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승선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공군이 밀고 내려올 때 7천명의 군인들이 개마고원에서 사투를 벌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죽고 동상으로 손발을 자르는 고통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무명용사들이야말로 정말 위대한 분들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지금 우리 목자님들이 한 양이라도 더 여름수양회에 초청하고자 많은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서 피난민들을 태우고 죽음의 바다를 건넌 빅토리아호 선원들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수고를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헌신을 통해 수양회 참석한 양들이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장차 캠퍼스의 목자가 되고, 선교사들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2018년 담양철수작전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의 작전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다 위대한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월드컵 스타들에게만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 목자들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36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예수님은 어린아이 한 명을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처럼 위대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지금 첫째가 되고자 하는 야망으로 인해 어린아이 한 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힘 있는 사람, 유명한 사람을 가까이 할까? 거기에만 온통 관심이 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아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를 영접하기 원하십니다. 어린아이는 철이 없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놀고 싶을 때 놀고,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합니다. 이런 어린 아이를 감당할려면 진이 빠지고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양들도 어린아이와 똑 같습니다. 먹을 것 사주고, 놀아주면 잘 나옵니다. 그러나 조금만 부담이 될 것 같으면 전화 꺼 놓고 숨어 버립니다. 이런 양들을 돕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라고 하십니다. ‘영접이라는 단어가 5번이나 나옵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적극적으로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소망을 두고 섬세하게 돌아보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요즘 박진수 목동이 상태가 심해져서 조대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그런데 박대장부 목자님이 매일 퇴근 후에 심방 가서 기도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어린 아이같은 진수 목동을 영접하고 아들처럼 섬겼습니다. 영화관에도 데려가고, 야구장에도 데려가고, 때마다 먹을 것을 사주었습니다. 진수 목동의 어머니는 이런 대장부 목자를 천사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대장부 목자 집에도 돌봐야 할 자녀들이 4명이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 많은 진수 목동을 8년 동안 섬긴 그를 생각할 때 정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우리 목자님들이 다 이처럼 어린 양들을 영접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도 모두 영적으로 어린아이같이 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우리를 영접해 주시고 섬겨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사랑을 갚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우리가 어린아이 같은 한 영혼, 죄인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감당해서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로, 여러 종류의 사람을 포용하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38절을 봅시다. 요한이 예수님께 자랑하듯 말했습니다.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허락도 받지 않고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로열티도 내지 않고, 예수님 이름을 함부로 이용하는 것은 특허권 침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독선과 배타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39,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지라도 얼마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이름을 높이는 것 보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을 더 중요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반대만 하지 않으면 다 포용하셨습니다. 우리도 복음역사를 섬길 때 다양한 모임, 다양한 사람을 영접해야만 합니다. 꼭 나를 통해서, 우리 모임을 통해서만 복음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다른 지체도 영접하고 함께 동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41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넓혀서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커피 한 잔 섬기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저의 올해 기도제목은 선교사님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무슨 말로 편지를 쓸까 하다가 일 년을 보내 버립니다. 연말에 성탄카드 보낼려고 하면 아주 뻘쭘합니다. 이번 주에 이 분을 심방해야지, 저 분에게 연락해야지 하다가 시간만 보낼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안일과 이기심을 회개하고 적극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여름 수양회를 앞두고 우리가 관계성이 멀어진 양들에게 물 한 그릇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축복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셋째로, 죄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세상에서는 중요치 않는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고 상처 주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아무리 작은 자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나의 말과 행동이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4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3절부터 47절 말씀은 무시무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발이 범죄케 하거든 잘라 버리고,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너무 무지막지한 말씀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하면 손과 발, 눈이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처럼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죄의 댓가가 너무나 무섭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합니까? 48절을 봅시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49절에 보면,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벌겋게 달군 프라이팬에 소금을 던져 보십시오. 톡톡 튑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않고 계속 죽음의 고통을 맞보는 곳이 지옥입니다.

 

가끔 언론에 보면 죄가 드러나서 카메라 앞에 설 때 너무 수치스러워서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타납니다. 너무나 부끄러운 자신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차라리 내 손 하나를 자를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택하리라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죄의 형벌도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을 때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것은 수치스러움만이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지옥의 고통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판과 지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했습니다. 내가 부정한다고 심판이나 지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천국이 있으면 반드시 지옥도 있습니다.

 

죄에 대한 처벌을 받을 때 사람들은 후회합니다. “죄 값이 그렇게 무서운 줄 알았다면 그때 죄를 짓지 말 것을” “그때 그것을 손대지 말 것을” “그때 거기 가지 말 것을” “그때 그것을 보지 말 것을그러나 그때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 죄와 처절하게 싸워야만 합니다. 손과 발을 잘라 버릴 각오로 싸워야 합니다. 눈을 뽑아버릴 각오로 투쟁해야만 합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까? 죄의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5:3,4절에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럽다고 했습니다. 꿀처럼 달콤하고 기름처럼 미끄러운 것이 죄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막상 죄를 짓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잠언5:5). 스올은 지옥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무서운 심판을 받지 않도록 우리에게 미리 경고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사형수가 감옥에 면회 온 어머니의 귀를 물어뜯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한번도 아들을 야단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아들을 야단 한번 안 친 적이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영혼을 정말 사랑한다면 예수님처럼 엄한 말로 경고도 해주어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무섭게 책망도 하고, 훈련도 시켜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게 됩니다.

 

50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제자들이 소금같은 자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헤롯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높은 자리에 앉아 특권만 누릴려고 하지 말고, 소금처럼 녹아져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소금 맛이 나는 사람, 소금의 영성을 소유한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죄와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자는 결코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볼 것 다 보고, 즐길 것 다 즐기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영성있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를 것은 과감하게 자르고, 거절할 것은 분명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소수일지라도, 영적 감화력이 있는 자들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숫자가 적을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죄를 미워하고 예수님의 성품을 닮고자 몸부림친다면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같은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좀 힘들고 어려워도 소금처럼 짜디짠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짭짤하게 훈련도 받고, 힘써 영적으로 투쟁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매일 나와서 새벽기도 하고, 인생소감 쓰고, 양들 심방하고, 장기자랑, 댄싱, 특송, 드라마 준비하다 보면 땀을 뻘뻘 흘립니다. 온 몸이 소금기로 범벅이 됩니다. 말씀 강사들도 한 말씀 받고자 밤을 새우며 말씀 묵상하고 기도실 드나들며 몸부림칠 때 얼굴이 눈물범벅이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영적인 소금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염전에 소금이 거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닷물을 가두어 놓고 따가운 햇살에 물을 증발시켜야 짜디짠 소금이 만들어집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셨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소금이 되어 지금도 타락해가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누구입니까? 성을 빼앗고 정복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입니다. 잠언 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위대한 자입니까? 뭇 사람의 끝이요, 종이 되어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품고 포용하고 영접하는 자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철저하게 죄와 싸우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이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해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