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특강

                                                                           골수에 사무치는 심정

말씀: 예례미야 19:10-20:9

요절: 예례미야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지금부터 13년전,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자폐아로 태어나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는 실제인물 배형진씨를 자랑스럽게 키워내는 어머니의 사랑이야기였습니다. 마라톤을 통해서 아이에게 희망을 심어준 거죠. 영화대사 중에 초원이 다리는 100만불짜리하는 말과 우리 초원이 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하는 어머니의 대사가 가슴 뭉클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생각할 때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사무치는 마음이 역경을 극복하고 아들을 자랑스럽게 키워낸 것입니다.

 

.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례미야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무치는 심정을 가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례미야입니다. 예례미야는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입니다. 요시야왕 13년에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시대와 마지막 왕 시드기야 때까지 제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예례미야를 부르실 때 아주 장엄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1:5)” 하나님은 예례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선택하시고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때 예례미야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 이때 하나님은 그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7-10)” 예례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신이 났을 것입니다. 악한 것들을 뿌리 뽑고 영적인 역사를 건설하는 열방의 선지자는 얼마나 멋있는 직분입니까? 예례미야는 이 사명을 영접하고 힘을 다해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당시 유다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살구나무 환상, 끓는 가마 환상, 썩은 베띠 환상, 포도주 병 환상, 토기 환상 등을 통해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고 하셨습니다. 특히 19장에서는 깨진 옹기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19:10,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요즘은 그릇이 대부분 플라스틱이라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릇을 옹기로 만들어서 깨지면 박살이 났습니다. 어려서 축구하다가 마당에 장독대를 깨뜨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애써 담아 놓은 고추장 그릇, 장 옹기 그릇이 깨지면 난리가 납니다. 쓸어 담을 수도 없고 그날은 초상날입니다. 예례미야 당시 유다의 영적상태가 그랬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서 유다는 깨진 옹기그릇처럼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부도덕으로 그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하나님이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례미야는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희들의 죄가 너무 많아서 옹기그릇처럼 산산히 부서질 것이다. 너희는 곧 바벨론에게 망할 것이다

 

19:14,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아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교만과 불순종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해도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교만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반발하면 깨진 옹기그릇처럼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예례미야의 메시지에 대한 반응이 어떠합니까? 20:1,2절을 읽겠습니다.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바스훌은 당시 성전을 맡아서 관리하는 총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의 총감독이라는 자기의가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예례미야가 예언하기를 유다가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진다고 하니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네가 뭔데 함부로 불길한 예언을 해바스훌은 예례미야를 유언비어 날조 죄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다음날 바스훌은 예례미야를 풀어주면서 입조심하라고 경고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이때 겁이 나서 가만히 있을 것입니다. 또 얻어맞고 감옥에 갇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례미야는 어떠했습니까?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바스훌이란 이름의 뜻은 즐거워하다그런 의미입니다. 반면에 마골밋사빕사방에 두려움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례미야는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바스훌이 지금은 걱정없이 즐거워하지만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으로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스훌 입장에서는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부모님이 지어주신 복된 이름을 저주스런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입니다. 증오심에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례미야는 더 구체적으로 재앙을 경고했습니다. 4,5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머지않아 유다가 멸망하고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부와 소득, 귀중품이 탈취를 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바스훌 개인에 대한 경고도 있습니다.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바스훌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끌려가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스훌이 거짓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바스훌이 성전의 총감독으로서 하나님 편에 서서 백성들의 죄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치신다는 것입니다.

 

예례미야는 지금 핍박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직선적으로 죄를 지적하면 얼마나 반발을 사겠습니까? 그러나 예례미야는 위축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우리도 사람들 눈치 보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분명히 죄문제가 있는데도 핍박이 두려워서 피하기 쉽습니다. 말씀을 전해도 좋은 말만 해 주기 쉽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암환자에게 좋은 말만 해줘서 되겠습니까? 병이 심각하면 분명히 말해주고 아픔이 있더라도 수술을 받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의 종도 하나님 편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분명하게 진리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 예례미야의 사무치는 심정

 

그런데 이처럼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나서 예례미야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7,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예례미야는 다가올 핍박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렸습니다. 본래 예례미야는 선지자 사명 감당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모릅니다라고 뒤로 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꾸 예례미야를 권유하셨습니다. “괜찮아. 내가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워줄게. 네가 전할 말을 내가 입에 넣어줄게. 내가 너와 함께해서 보호해 줄께그렇게 꼬셔놓고는 지금 조롱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례미야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힘든 선지자 생활에 회의가 들었습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예례미야는 너무 힘들어서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더 이상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절필을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 써 봐야 소용이 없으니까. 우리도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다시는 전도 안 나가. 배척받고 상처받는 것 싫어. 전도해 봐야 맨날 빈 그물인데 뭐” “다시는 양하고 일대일 안 해. 죽어라고 도와줘도 단물만 빨아 먹고 도망가는데 뭐

 

예례미야도 이런 데모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 앞으로 말씀 안 전합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듣지도 않고 날 조롱만 합니다. 저도 이제 지쳤어요예례미야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14절에 보면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다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 18절에서는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탄식합니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우리 어머니가 날 낳으셔서 이 고생을 하게 하는고예례미야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렇게 탄식하겠습니까? 예례미야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픔을 함께 나눌 아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결혼도 안했으니 위로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극한 절망, 두려움, 손해의식, 피해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예례미야가 이렇게 힘들어서 메시지를 안 전하고자 드러누워 있으니 마음이 편했습니까? 우리도 전도고 일대일이고 다 접고 집에서 내 할 일만 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던가요? 몸은 편한데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번 주 추석기간에 기초공부도 없고 파트모임도 없으니 편했습니까? 명절에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잠도 실컷 자고, 영화도 보고.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일대일을 하지 않으니 입이 근질근질 하지 않던가요?

 

예례미야는 어떠했습니까? 9b절을 봅시다.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처음 얼마동안은 말씀 안 전하고 사람들과 안 부딪히니 좋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속에서 불길이 점점 타올라왔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싶은 불길, 양들을 보고 싶은 열정이 타올랐습니다. “내가 말씀 전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지. 양하고 일대일 해야 하는데. 그 양 지금 뭐하고 있을까? 사탄의 밥이 되고 있지는 않을까?” 그 안타까움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사무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에서 뼈로, 나중에는 골수에 사무쳐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에 그런 아내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이 하도 술 먹고 노름하고 아내를 때리면 아내가 화가 나서 보따리 써서 집을 나갑니다. “다시는 집에 안 돌아오리라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아이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불붙는 듯해서 다시 돌아옵니다. 아이들을 향한 사무치는 마음 때문에 힘들어도 눈물을 흘리며 가계를 꾸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례미야도 불붙는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상한 심정이 골수에 사무쳐서 다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21장에 보면 시드기야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라(21:8,9)” 심판의 메시지 뿐 아니라 23장에 가서는 회복의 메시지, 메시야 예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라(23:5)” 말씀에 대한 열정이 골수에 사무치니 예례미야가 더 담대해졌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메시지는 더 힘이 있었습니다. 23: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그의 메시지는 바위처럼 완악한 심정을 부수어 뜨리는 불방망이 같았습니다. 그는 시련을 통해서 연단을 받아, 날카로운 칼 마광한 살이 되었습니다. 평안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메시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핍박과 시련, 고뇌가 있었기에 더 힘 있는 메시지,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개는 권세있는 메시지가 나온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18세기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을 일으킨 열정적인 목회자입니다. 그가 메시지를 전하면 사람들이 너무나 큰 감동과 충격을 받고 기둥을 붙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가 저절로 그런 불붙은 말씀의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미국은 개척기 청교도정신을 잃고 서서히 세속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교회 장로들이 쫓아냈습니다. 자녀들이 10명이나 되는데 쫓겨났으니 얼마나 생활이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의기소침하지 않고 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에 대한 불붙은 심정을 주셨습니다. 타락해 가는 젊은이들에 대한 골수에 사무치는 심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는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미국 대륙을 불태웠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종교개혁을 하면서 수없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름스 제국 의회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골수에 사무쳤기 때문에 끝까지 타협치 않고 부패한 로마 교황청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사람들이 잘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돌을 던지고 핍박했습니다. 특히 동족 유대인들이 더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면 꼭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9:3절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골육 친척, 동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쳐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버려지는 한이 있어도 그들을 구원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에게는 불붙는 심정, 골수에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에 줄기차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가만 있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합니까? 죄인들을 향한 불붙은 심정, 골수에 사무치는 마음입니다. 이사야 53:6,7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예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뜨겁게 사랑하셨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죽어 가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 제자들이 다 도망갔지만 부활하신 모습으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못자국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디베랴 바다까지 찾아오셔서 와서 조반을 먹으라말씀하시며 비취 파티를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불붙은 심정이 오순절 성령 강림때 제자들 마음에 불처럼 임했습니다(2:2,3). 그때 사도들의 마음에도 불이 붙어서 물불 가르지 않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아무리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어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4:20)” 불붙는 심정, 골수에 사무치는 마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요즘 중국의 시진핑이 장기집권을 위해서 자신을 우상화하고 기독교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허난성에서는 4000개의 십자가를 철저하고, 그 자리에 시진핑의 초상화를 걸었습니다. 저장성에서는 십자가를 철거하려고 하자 성도들이 십자가에 몸을 묶고 십자가를 사수하고자 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핍박을 해도 골수의 사무치는 예례미야의 심정으로 헌신하는 자들이 있는 한 교회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김사라 사모님이나 나윤 사모님은 중국선교를 하다가 돌아온지 2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중국영혼들을 생각하면 양들의 얼굴이 눈에 선해서 골수에 사무친다고 합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중국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중국어 모임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김사라 사모님은 이런 사무치는 심정으로 백명하 학사를 10년 넘게 돕고 있습니다. 지금은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있지만 화순까지 가서 일대일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 불붙는 심정에 감동을 받고 백명하 학사가 지난 여름수양회도 오고 요즘은 예배도 나오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 남편도 감동받고 복음을 영접하리라 믿습니다.

 

저는 이번 추석에 오랜만에 처갓집에 갔습니다. 동역자는 이번 기회에 장인어른에게 세례를 베풀자고 했습니다. 장인어른은 이전에 동역자를 많이 핍박했습니다. 대학졸업후 교사로 오라는 데가 많은데 갑자기 멕시코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자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를 택할래, 예수를 택할래협박을 했지만, 동역자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여 더 화가 나셨습니다. 그런데도 동역자는 아버님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복음을 영접하시도록 사무치게 기도했습니다. 32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버님이 순한 양처럼 머리를 숙이시고 제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동역자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근처 교회를 소개 시켜 드렸는데, 주일날 헌금은 얼마씩 해야 하냐고 물어보기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이를 보면서 누군가를 위해서 사무치게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 받는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를 원합니다. 내가 전도하면 양들이 즉시즉시 따라오고, 수양회만 데려가면 바로바로 회개하고, 말씀공부 1년 하고 나면 저절로 목동선서하길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로 목자생활이 녹록치가 않습니다.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점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너무 답답하고 절망이 되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영혼을 향한 사랑, 애타는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안타까움이 골수에 사무쳐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골수에 사무쳐서 한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거기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꿈은 간절하게>라는 시가 있습니다.

 

꿈을 꾸는 것처럼 쉬운 게 있을까

꿈을 품는 것처럼 중한 게 있을까

 

꿈을 입으로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몸으로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혼자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함께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꿈을 반짝 꾸면 꿈에 지나지 않지만

꿈을 끝까지 꾸면 반드시 현실이 된다

 

간절하게 절실하게 끈질기게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간절하게 절실하게 끈질기게 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족해도 간절하게 절실하게 끈질기게 마음에 사무치게 꿈을 꾸고 도전하면 반드시 꽃을 피우게 됩니다. 우리는 요즘 학생제자양성역사에 사무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부터 학생회 파트모임도 시작합니다. 많은 목자님들이 어찌든지 학생 양을 얻고자 줄기차게 캠퍼스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학생회들도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무치는 마음이 반드시 꽃을 피우게 할 것을 믿습니다. 사무치는 마음은 거룩한 아픔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무치는 마음, 거룩한 아픔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아픔이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